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시간 멈춘 골목여행2_인천 개항장 거리강화도조약 후 빗장 연
세 번째 개항도시의 중심
淸·日 흔적 여전히 남아
차이나타운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패루. ‘중화가’라고 쓰인 현판과 화려한 색감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1875년 9월, 강화도 앞바다에서 포성이 울렸다. 일본 군함이 조선군과 충돌한 ‘운요호(雲揚號) 사건’의 발발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2월 강화부 연무당에서 조선의 판중추부사 신헌(申櫶, 1810~1884)과 일본의 전권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淸隆, 1840~1900)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굳게 닫혀있던 쇄국의 빗장이 강제로 열리는 순간이다.

인천은 부산·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開港)했다. 개항도시에는 외국인이 거주·영업하고, 치외법권(治外法權, 체류하는 국가의 행정·경찰법에서 면제되고 본국법의 적용을 받는 권리)을 부여한 ‘조계지(租界地)’가 설치됐다. 인천에는 응봉산을 중심으로 일본·청국·각국 조계지가 형성됐으며, 각 국가의 문화·종교·생활용품 등이 사람들과 함께 흘러들어왔다.

그로부터 1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현재 인천광역시는 이 지역을 ‘개항장 문화지구’로 설정했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공연·체험·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화교 지친 몸·마음 달래던 ‘의선당’

수도권 1호선 전철의 서쪽 종착지 중 한 곳인 인천역에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중화가(中和街)’라고 쓰인 현판이 달린 패루(牌樓)가 입구를 지키고 서있다. 여러 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형태로 용·봉황·사자 등의 부조가 금·홍·청·녹색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돼 있어 멀리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패루는 인천의 자매도시인 중국 웨이하이시(威海市)에서 기증했다. 초기에는 목조였다가 2008년에 구조물 일부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해 지금의 돌패루로 교체됐다. 당시에는 별다른 채색이 없다가 2016년 웨이하이시에서 파견한 중국 단청전문가들의 손길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인천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화교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시에서 2007년 발행한 〈테마로 찾아보는 인천 개항장 역사기행〉에 따르면 1884년 선린동 일대에 약 1만6,500㎡ 규모의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현재 차이나타운 골목은 음식점과 카페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청에서 수입한 물품을 파는 상점이 주를 이뤘다.

패루를 지나면 바로 짜장면의 발상지로 유명한 ‘공화춘(共和春)’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곳은 원조 공화춘과는 다른 곳이다. 1908년 화교 우희광(于希光, 1886~1949) 씨는 ‘산동회관(山東會館)’을 개장했는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미를 담아 ‘공화춘’으로 가게 이름을 바꿨다.

이후 인천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지만, 1970년대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정부 정책으로 인해 1983년 폐업했다. 이후 현재 공화춘을 운영 중인 A씨가 2002년에 ‘공화춘’을 상표로 등록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인 왕해주 씨는 2019년 상표권을 되찾고자 A씨를 사기죄로 고소하고, ‘1,000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배상금을 1,000원으로 요청한 이유는 금액을 떠나 가족의 역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왕해주 씨는 공화춘 인근에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원조 공화춘 건물은 2010년 인천시 중구에서 매입해 현재 ‘짜장면박물관(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으로 사용 중이다.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차이나타운의 골목은 관광특구 지정 후 길을 정리·보수하면서 넓어졌다. 이곳은 만두·탕후루(糖葫蘆)·공갈빵 등 다양한 먹거리와 여러 물품이 관광객의 발걸음을 사로잡아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차이나타운 골목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가득하다. 관광객이 중국 간식인 탕후루를 구매하고 있다.
12년 째 십리향을 운영하고 있는 곡창준 사장이 화덕만두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은은하게 풍기는 고기 냄새에 이끌려 가보니 화덕에서 만두가 먹음직스레 익어가고 있었다. 12년 째 ‘십리향’을 운영하고 있는 곡창준 사장은 관광객들에게 화덕만두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직접 포장을 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곡 사장은 “코로나19 여파로 관광객들이 많이 줄어들어 걱정이 많다.”며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돼 예전처럼 관광객도 많이오고, 영화촬영도 하는 등 활기를 되찾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십리향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면 백년짜장으로 유명한 식당 ‘만다복’이 나오는데, 그 옆에 화교 불자들의 심신을 달래고 정보를 교환하던 사찰 ‘의선당(義善堂, 중구 북성동2가 9-16)’이 있다.

의선당은 현판이 작고 입구가 나무에 가려져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필자는 미리 정보를 알고 갔음에도 입구를 지나치는 등 조금 헤맸다. 입구 옆 담벼락에는 중국의 유명한 전설인 ‘팔선과해(八仙果海)’의 내용을 담은 ‘팔선도(八仙圖)’가 그려져 있다. ‘팔선과해’는 8명의 신선이 각자 재주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는 이야기로 ‘누구나 가진 재능으로 기량을 발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이곳을 드나드는 화교들이 벽화를 보며 자신만의 ‘성공’을 꿈꿨으리라 짐작해본다.

중국의 사찰은 대부분 큰 규모를 지어져 있는데, 의선당은 탑과 단층건물 3채(법당·경로청·행랑채)가 전부다. 탑 위에는 작은 불상들이 놓여있다. 그 옆에는 관광객이 소원을 빌며 올려둔 동전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의선당은 도교의 선당과 불교의 법당이 합쳐진 배신선당(拜神善堂) 구조다. 관세음보살·호태삼야·관운장 등을 모셨고, 각 칸마다 흙으로 빚은 토상(土像)이 놓여있다. 법당은 총 5칸으로 구성됐는데, 안팎으로 현판이 달려있다. 외부에는 △유구필응(有求必應) △물부재풍(物阜財豊) △자운균점(慈雲均霑) △의중천추(義重千秋) △자심제세(慈心濟世) 등이, 내부에는 △영험무쌍(靈驗無雙) △유국부민(裕國富民) △불광보조(佛光普照) △영명천고(英名千古) △파심제세(婆心濟世) 등이 쓰여 있다. 방문하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는 바를 현판에 적어둔 듯 보인다.

의선당은 1893년 황합경 스님이 화교들의 단합과 교화를 위해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뜻을 담았다. 화교 불자들은 이곳에서 타지생활 중 겪는 희로애락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특히 불우하게 사망한 화교의 시신을 안치해 고향으로 보내거나, 귀향할 여비가 부족한 화교에게 금전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자선활동도 펼쳤다.

1970년대 들어 화교사회가 위축되면서 의선당은 종교시설로서의 기능을 잃고 무당파(武當派)의 팔괘장을 전수하고, 연습하는 수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2006년에 들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오늘날에도 화교 불자들이 심신을 달래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오고 가는 불자들의 안식처 역할도 하고 있다.

의선당은 불교의 법당과 도교의 선당이 합쳐진 형태이다. 안팎의 현판에는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이 담겨 있다.

개항부터 일제까지의 건물 한눈에

의선당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길 양옆으로 쭉 뻗은 담장에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이 펼쳐진다. 도원결의·삼고초려 등 〈삼국지〉의 주요 장면이 그려진 ‘삼국지골목’이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장면 앞에 멈춰 이야기꽃을 피우며 〈삼국지〉 속 한 장면에 빠져든다.

벽화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1호)이 나온다. 이곳은 청국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일본조계지와 청국조계지를 구분 짓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자상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청국조계지 왼쪽은 일본조계지며, 돌계단 양옆에 세워진 석등도 각각 청나라와 일본 양식을 따랐다. 계단 양쪽에는 조경공간을 두고, 경사가 급한 점을 감안해 계단참(階段站)을 넓게 조성했다. 이곳에 세워진 공자상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2002년 기증했다. 공자상은 자신의 고향인 중국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그 옆에 앉아 반짝이는 바다와 인천항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생활하던 건물을 볼 수 있다. 일본조계지는 인천에 생긴 최초의 조계지인데, 관련 자료를 보면 1883년 9월 30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에 따라 중구 관동과 중앙동 일대 약 2만3,100㎡에 걸쳐 형성됐다. 1883년 당시 일본조계지에는 75호(348명)가 거주했고, 갑신정변이 있던 1884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증가해 1892년에는 388호(2,540명)에 이른다.

인천광역시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당시 건물을 매입해 그대로 박물관·구청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 근대가옥거리는 차이나타운에 비해 짧게 형성돼 있어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다. 주로 목재건물에 기와로 지붕을 올리고, 상점과 거주지가 일체화된 ‘마치야(町家) 형식’으로 지어졌다. 과거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매입·보수해 카페와 상점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구청 방향으로 조금 더 걷다 보면 개항박물관(중구 신포로23번길 89)이 나오는데,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본제1은행은 주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金塊)와 사금(砂金) 등을 매입하는 업무를 대행했다. 1899년 화강암을 사용해 지었으며,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한 좌우 대칭 구조가 특징이다. 내부는 총 4전시실로 구성돼 있는데, 다양한 문화재를 해설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인천광역시는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을 매입해 ‘개항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내부는 총 4전시실로 구성됐으며, 개항기 인천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인천시는 구인천부청사, 일본18은행지점 등 과거 건립된 건물을 매입하고 보수해 중구청, 인천근대건축전시관 등 공공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중구청 옆길로 나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각국조계지계단이 나온다. 각국조계지는 약 47만5,200㎡ 규모로 주로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이 거주했다. 이곳으로 통했던 각국조계지계단은 처음 조성된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경사가 가파른데 계단참이 좁고 울퉁불퉁해서 통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외국인들이 친목을 다지던 공간이다. 현재 교육·문화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계단을 모두 오르면 가로 34cm, 높이 60cm, 두께 14cm의 작은 비석하나가 세워진 동산이 보인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복원공사 중 발견된 1기의 비석을 복제한 것으로, 전면에는 ‘각국지계(各國地界)’, 후면에는 ‘조선지계(朝鮮地界)’라고 적혀있어서 각국공동조계지와 조선의 경계를 나타내는 지점에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발굴된 ‘각국조계석’은 인천시립미술관 야외전시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비석 바로 옆 건물은 ‘제물포구락부(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제물포구락부)’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친목을 다졌던 사교장인데, ‘클럽’의 일본식 표현이 굳어져 지금까지 ‘구락부’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에는 ‘재향군인회관’과 ‘부인회관’으로, 광복 후에는 미군 장교클럽으로 사용됐다. 현재 인천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전시회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청국조계지와 일본조계지의 경계를 나타냈던 ‘청일조계지경계계단’.

산의 혈 뚫어 통행로 만들어

제물포구락부에서 천천히 내려오다 보면 홍예문(虹霓門) 윗길이 나온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경사가 급한데다 노후됐다. 난간도 녹이 많이 슬어있어 내려가는 동안 계속해서 긴장해야 했다. 방치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관리가 되지 않아 연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홍예문은 일본조계지 확대를 위해 응봉산 남쪽 마루터를 뚫어 만들었는데, 일본인들은 산의 혈(穴)을 뚫었다고 해서 ‘혈문(穴門)’이라고도 불렀다.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한 아치구조로 폭 4.5m, 높이 13m, 통과길이 8.9m로 쌓아올렸는데,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일본의 토목공법을 알 수 있는 사료로 가치가 높다.

홍예문은 일본인이 감독·설계를 맡고 중국의 석수장이가 공사에 참여했다. 이외의 잡일은 기술이 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는데, 예상치 못한 암반층 노출 등으로 인명피해가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현재 도로로 사용되며, 인도가 따로 설치되지 않아 홍예문을 도보로 통과하는 경우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홍예문 근처에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 ‘신포시장’이 있다. 이곳은 각국조계지와 인접해 외국인의 생활을 지원하는 시장으로 형성됐다. 2002년 시장 현대화작업으로 시설을 정비하면서 과거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몇 대째 이어오는 식당과 다양한 주전부리, 소품들을 보기 위한 관광객으로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의 일본 근대가옥거리에서는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신포시장을 지나면 답동사거리다. 1883년 인천에는 기독교·천주교를 비롯해 일본불교·신도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됐다. 특히 일본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답동 일대에는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진종본파(眞宗本派) △정토종(淨土宗) △조동종(曹洞宗) △진언종(眞言宗) 등 여러 종파의 사찰이 곳곳에 세워졌다.

답동사거리의 ‘답동로얄맨션’은 과거 조선식민지화를 위해 적극 활동했던 진종(眞宗) 오타니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의 별원인 ‘동본원사(東本願寺)’가 있던 자리다. 동본원사는 1884년 9월 갑신정변으로 죽은 일본인의 유해를 안치하고 위로하고자 건립된 사찰이다. 처음에는 주택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1899년 10월에 이르러 3,000평 대지에 동본원사를 건립하고, 불상·범종 등을 안치했다. 불상은 일본 본원사에서 보내준 목불회상(木佛繪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존명이나 형태·크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개항장 거리에는 이밖에도 △대불호텔전시관 △청국영사관회의청 △초한지벽화거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등 우리나라의 격동의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볼거리가 가득하다.  

문지연 기자  dosel7471@gmail.com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지연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