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대, 口業을 경계하라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규율(規律)되는 우리 삶의 질서는 ‘소통의 시대’라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정보통신기술·디지털기술·인터넷·모바일·SNS 등은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상당 시간을 규정할 수 있는 ‘아날로그’라는 개념이 더 생소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소통의 기술들을 일상생활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다.

시공간 뛰어넘은 소통법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을 토대로 구축된 새로운 소통의 기술은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소통할 수 있다는 음성언어[口語] 기반의 의사소통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또한 직접 대면해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원하는 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모든 사회적·귀속적 지위의 구속에서 벗어나 누구나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익명성에 기대어 비난이나 욕설·루머 등을 정제하지 않은 상태로 내뱉기 때문이다.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는 이용자들이 짧은 대화를 지속적이고, 자주 나누게 함으로써 지인들 사이에 서로 시공간이 접합되는 것과 같은 체험을 제공한다. SNS를 통해 유지되는 사회적 관계는 높은 접촉빈도에 비해 이를 유지하기 위해 투여되는 시간이나 비용 등 자원의 양은 많지 않다. 또한 관계의 관여도도 그다지 높지 않다.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만남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고, 함께 하는 동안은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SNS를 이용하면 굳이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고, 다른 활동과 병행하면서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상대방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소통이 이어지는데 문제가 없다.

바로 이런 점이 SNS의 매력이다. 아주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필요할 때 언제든 접촉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선별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SNS를 통해 얻게 되는 정보들은 출처를 알 수 있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관심에 부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SNS에서도 악성 댓글을 비롯한 일탈적 문화의 폐해는 여전하다. 이것은 정보와 오락이 섞여 있고, 공적·사적 대화 주제와 양식이 함께 존재하며, 내가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있는 SNS의 특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SNS는 인터넷보다 익명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뿐이지, 비익명적인 소통공간은 아니다. ‘친구의 친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돈의 팔촌’은 모르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SNS를 통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와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터넷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 무대’에 비유할 수 있다면, SNS는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무대 뒤편의 대기실’에 비유할 수 있다. 소수의 관계자만 함께 하는 대기실은 배우의 사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팬들이 몰려든 대기실은 더 이상 배우의 사적 공간이 아니다.

새로운 소통법이 낳은 악업

이러한 특성을 가진 SNS의 부정적 측면으로 거론되는 주요 쟁점은 원치 않는 사생활 노출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 비대면적 소통으로 인한 정보의 왜곡, 민감한 이슈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의 증가,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의 증가와 그에 따른 언어폭력의 심화 등이다. 가까운 지인과만 공유하고자 했던 프라이버시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인의 지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난이 주는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후 사정이 배제된 채 감정을 알 수 없는 글로만, 혹은 생각을 알 수 없는 이모티콘만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듣는(정확히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해석됨으로써 왜곡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민감한 이슈에 대한 대립은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더욱 첨예화되고, 자기 의사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극단적 표현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들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SNS는 이를 빈번하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다.

SNS를 필두로 하는 새로운 소통 상황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대부분 언어에 의해 촉발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구업(口業)과 직결돼 있다. 이는 SNS상의 언어폭력이 외형상 구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지, 신업(身業) 및 의업(意業)과 무관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생각과 말은 행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말이 씨가 되어 행동하고 다시 생각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서로 연계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피드백은 서로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더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자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되며,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SNS 상에서 나타나는 언어폭력은 말로 짓는 악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에 걸쳐 악업을 짓는 동시에, 악업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업에는 과보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가르친다. 그 바탕 위에서 악업을 소멸하고 선업을 증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심코 올린 악플 하나가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악업의 사슬이 되는 것이다. 폭력적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곧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짓는 구도이자 수행임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언어가 사회 실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의사소통을 왜곡시키는 행위는 연기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와 상충한다. 또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집단생활의 기초는 구성원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왜곡은 인간의 존재 기반을 허무는 위험한 행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소통기술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 기반을 위협하는 동시에 불자로서의 삶과 구도행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최근 더욱 심해지고 있는 SNS 상의 언어폭력은 혐오 발언의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다. 혐오 발언은 편을 가르고 상대편에게 고통을 가중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악업이다. 그런데 혐오 발언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이 내재해 있다. 차별하고 무시하고 배제함으로써 혐오의 대상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겠다는 탐심(貪心)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혐오 발언의 상당 부분은 대상에 대한 분노 표출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분심(憤心)이 강하게 배어 있고, 혐오 대상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치심(癡心)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혐오 발언은 삼독(三毒)을 심화시키는 행위이다. 삼독은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번뇌이다. 결국, 혐오 발언은 번뇌 망상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불구덩이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잘못된 SNS 상의 소통은 폭력의 대상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수행에 장애가 되는 마군(魔軍)이다.
〈수십선계경(受十善戒經)〉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과 부처님 가르침이 기록돼 있다.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하지 않는 계라고 말하나니
입을 잘 지키기를 부처님 입과 같이 하며
항상 성실한 말을 하여라.
이런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서
입에서 나는 향기 모든 하늘들이 취하리라.
만약 세간에 태어나서
온갖 향기로 장엄하는 말을 하면
마치 향산(香山)의 물이
열반의 강에 흘러드는 것 같으리라.

만약 양설을 하지 않으면
마음속이 또한 두 갈래로 나뉨이 없나니
말을 온갖 부처님 말씀처럼 하면
향기로운 연꽃잎으로 얼굴을 덮은 듯하리라.
다섯 가지로 어우러진 고운 빛이
혓바닥으로부터 피어나리니
항상 거룩한 이의 진리를 말하며
지성으로 두 가지 말을 하지 말라.

만약 욕설과 거친 말 하지 않으면
이런 사람 대장부라 하나니
온갖 사람들 속에 단정한 이로서
모든 사람 보고서 모두 즐거워하네.

마치 전단(栴檀)의 아름다운 향기처럼
만약 꾸미는 말 하지 않으면
입에서 항상 미묘한 향기 피어나오는 것이
마치 우담바라 꽃향기와 같으리라.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부처님을 만나는 것은
구업이 진실되고 맑기 때문이니
삿된 소견들 칭찬하지 말고
사견(邪見)의 업은 말을 하지 말라.

태어날 때마다 항상 출가하여
바른 삶[正命]을 항상 구족하고
부처님처럼 열반에 머무는 것은
모두 진실한 말에서 얻어지느니라.

또한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악구·망어·양설·기어·사견을 찬탄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일체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의 대겁적(大劫賊)이 된다. 비유하면 여러 도적들이 위력이 자재하여 한 성(城)을 태우고 파괴해 온 천하의 백성들을 살해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죄의 과보가 많겠느냐, 적겠느냐?”고 엄중히 묻고 계신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참된 불제자라면 새로운 소통의 기술이 악업의 사슬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박수호
―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조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불교와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 주제를 발굴해 불교사회학의 지평 확장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포스트휴먼사회와 불교, 불교의 사회적 책임 등으로 연구 관심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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