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도성 중심에 세워 정신적 구심 삼은 국가사찰

디지털 복원된 부여 정림사 중금당 모습. 〈사진=백제고도문화재단〉

신라 서라벌(현 경주)에 불국사가 있다면, 백제의 세 번째 수도 사비(泗沘, 현 부여)에는 정림사(定林寺)가 있었다. 사비시대(AD 538~660) 도성의 중심에 세워진 정림사는 백제인들이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자 건립한 국가사찰이다.

폐망의 아픔 새겨진 오층탑

정림사는 미륵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현재 절터(사적 제301호)에는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만 남아 있다. 정림사가 언제 건립됐고 폐사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사비시대에 창건했고, 고려시대 불상과 기와조각의 존재를 통해 고려 현종 19년(1028) 때 중건되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정림사는 사찰 중앙에 우뚝 세워진 높이 8.33m 규모의 오층석탑으로 인해 19세기까지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탑신 초층 4개면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내용이 담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의자왕, 태자 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했다.”는 내용과 함께 말미에 660년 8월 15일 당나라 하남 사람 권회소가 썼다고 적혀 있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카츠오(藤澤一夫)가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면서 ‘정림사지’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사비 시가지를 배경으로 1,500년전 정림사를 디지털 복원한 모습. 〈사진=백제고도문화재단〉

이 탑 역시 건립년도는 불명확하다. 미술사학계에서는 639년 세워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에 지어졌다고 보았는데, 제2차·3차 발굴조사 후 펴낸 〈정림사지발굴조사보고서(1981)〉에서 오층석탑 아래 판축토(단단하게 다진 땅)가 절 창건 당시에 만들어졌고, 석탑이 판축토와 밀착돼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정림사 창건 당시인 6세기 중엽에 건립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림사를 논하려면 먼저 사비도성을 알아야 한다. 1990년대 들어 발굴을 통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가 계획도시였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다. 성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62년간의 암울했던 웅진시대를 마감하고 천도를 결심한다. 사비도성은 백마강이 반달처럼 휘감겨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둘러쳐 있는 천혜의 요새다. 아울러 서해를 향해 흐르는 백마강을 통해 중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 진랍국과 참파국 등과 왕래하기 편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남쪽으로는 곡창지대인 평야가 위치하고 있어 삼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하늘 위에서 조망해 본 현재의 정림사지 전경.

사비도성의 상징 정림사

성왕은 웅진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운뒤 사비도성 건립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옮겼다. 옛 수도 한성 건설 이후 두 번째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성왕은 백마강 백사장과 주변 낮은 산지에서 저습지를 매립할 엄청난 양의 토사를 조달하는 동시에 저습지라는 사비의 결점을 역이용해 농수 확보와 홍수조절에 용이한 대형 연못을 만들었다.

사비도성은 평지에 왕궁을, 후방에 피난용 산성인 부소산성을 뒀다. 중국 남조의 건강성과 북조의 낙양성을 벤치마킹한 후 백제식으로 변형했다. 방어의 목적과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고자 나성(羅城, 왕궁과 시가지를 둘러싸 방어기능을 높인 성)의 개념은 낙양성을 참고했으리라 짐작되는데, 백마강을 자연 해자(垓字, 성밖 둘레를 파서 만든 못)로 활용하고 부소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쌓은 것은 변형된 점이다.

정림사 중문 디지털 복원 모습. 〈사진=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

정림사는 익산 미륵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1942년과 1980년 발굴조사에서는 가람배치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 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제10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북승방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새롭게 확인되기도 했다.

정림사지의 구조와 양식은 백제시대와 고려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금당·중문·남회랑 등은 백제시대 고려시대 유구(遺構)지만 백제의 건축양식과 평면구성으로 짐작된다. 최근 발굴조사를 토대로 살펴보면 가람배치는 ‘중문-탑-금당-강당-북승방’이 남북방향으로 배치되고, 강당 좌우에 승방이 위치했다. 또 동서승방의 남측으로 동서회랑이 자리했다.

지난 20년 동안 경주 황룡사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정림사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할 때 복원 논의가 더디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고증문제이다. 백제 관련 역사학계에서는 현재 완벽히 고증되지 않은 정림사의 복원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다. 현재 정림사 복원은 회랑 정도만 계획되어 있는 듯하다. 완전한 정림사 복원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 소요될 듯하다.

이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가상 디지털 복원이다.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실제 정림사와 흡사한 참배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5년 유네스코가 정림사지를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교육 및 홍보자료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부여군과 (재)백제고도문화재단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정림사 복원을 위한 고증심화연구를 지속했다.

7세기 정림사의 디지털 복원

정림사 건립 시기는 538년 사비천도 직후라는 주장과 7세기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복원을 위해서는 기준시점이 필요함에 따라 복원시점을 백제 멸망 직전인 기원 660년경으로 잡았다. 건축물의 복원은 백제의 최전성기에 중문·탑·금당·강당·북승방·동서승방·동서회랑·남회랑 등으로 정했다.

복원 범위는 제10차 정림사지 발굴조사(2010∼2011년)에서 밝혀진 유구를 기반으로 드러난 가람배치상의 모든 건물이다. 이 건물의 기단부위부터 지붕과 기와까지 포함했다. 건축부재의 자연과학적 분석(석재·목재·기와 등)뿐만 아니라 정림사지 금당의 불상(양식·재질·규모)과 수미단·닫집·단청 등 장엄분야도 포함해 복원연구를 진행했다.

정림사 중금당 디지털 복원 과정. 〈사진=백제고도문화재단〉

복원설계를 위해 최근 발굴된 유구와 출토 유물, 정림사지에 참고할 수 있는 사찰들의 사례분석을 기반으로 가람배치와 정림사지에서 사용한 척도를 도출했다. 이어 건물구조와 부위 및 부재별 특성은 유사 사지 비교분석, 고구려 고분벽화와 한·중·일의 유물 및 벽화 등의 사료분석을 바탕으로 진행했다. 또 〈삼국유사〉·〈삼국사기〉와 같은 문헌기록과 각 분야의 선행연구 등의 문헌분석을 통해 정림사지의 위상과 이용방식의 특성 등을 파악했으며, 불상 및 장엄분야는 한·중·일 사례의 비교분석을 통해 구체적 실체를 추정했다.

그리고 고증연구는 정림사 주위 입지 분석→정림사 대지규모 고찰→정림사 가람배치 추정→용척(백제문화단지 기준)→건물별 규모(금당 포함 각 건물)→구조방식(백제 건축)→건물별 형태·규모·기능·건축 방식 고찰→정림사 각 건물 평면구성→정림사 건축에 쓰인 부재·건축별 특성·건축재료·백제식 단청 등의 순으로 진행했다.

디지털 복원에서 가장 큰 난제는 백제시대 건축물의 외부 모습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백제시대 건축물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백제식 공법이 동원된 백제문화단지 사진촬영(3D 매핑 소스용), 동 시대에 교류한 고구려·신라·일본 나라시대 건축물과 관련 벽화 및 유물의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백제시대 고건축 전문학자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최종 복원방향을 결정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사찰의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졌다는 기록을 참고해 적·청·백·흑·황의 오방색을 이용해 패턴화된 연화문·구름문·화염문·기하학적 문양을 적용했다. 용·봉황 등 사신도와 비천상도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고려이후 조선시대 사례와 크게 차이가 없는 문양요소이기도 하다.

정림사 전각의 정확한 공포(栱包)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송대 영조법식을 검토한 후 사례들에서 공포 규격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정림사 금당(金堂, 본존상을 모신 법당)의 구조방식을 계산했다. 정림사 금당 설계는 지면에서 용마루까지 높이 15m의 중층구조이고, 차양칸이 있고, 대략 8m의 기둥위에 공포가 놓여 하앙을 받치는 7량 구조로 추정했다.

금당은 정림사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안에 안치된 부처님은 고대 한·중·일 사찰 금당 내 불상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상정했다. 6세기 중·후반에 유행한 불상으로 유추해 정림사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불이편(佛耳片)을 근거로 장육존상의 소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봤다. 이는 사비 백제 당시 금당의 본존불상은 대체적으로 장륙불로 조성한다는 문헌기록에 근거한다. 금당 본존불을 받치고 있는 불단은 금당의 중앙에 위치하는 일반적 형태로 추정했다. 주로 전돌을 이용해 구축했고, 장식을 위한 문양전은 부조의 문양부에 단청을 입혀 불단을 보다 화려하게 장엄했다. 본존불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천개)을 설치해 불상의 장엄함을 한층 더 드러나게 했다. 금당 내부 삼존불의 디지털 복원을 위해 사전에 2D 드로잉 형태로 그려진 불상을 준비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가상공간 내부에 삼존불상을 안치했다.

중금당 내부 삼존불상 고증 복원 모습과 디지털 복원된 삼존불상. 〈사진=부여군·백제고도문화재단〉

사비도성 체험관에 되살아난 정림사

지금까지 정림사 디지털 복원을 위한 연구가 단편적으로 이루어져 진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림사의 디지털 복원은 기존 정림사 연구성과를 한데 정리했다는 점과 함께 디지털 복원을 위해 정림사 자료를 체계화·분석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2018년 11월 초, 정림사를 가상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이 부여군에 개관했다. 1,400년 전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문화를 꽃피운 백제 정림사가 최첨단 기술과 결합해 ‘디지털 가상현실 정림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 체험관에서는 한성시대에서부터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는 백제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비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다. 가상체험관은 컨버전스아트관과 인공지능관 등 총 2개관으로 구성돼 있다.

정림사 가상현실 디지털 복원 모습. 〈사진=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이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컨버전스아트·홀로그램 등 화려하고 다채로운 첨단기술을 통해 백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 중 백미는 단연 ‘정림사로 떠나는 시간여행’으로 이름붙여진 정림사 가상현실 체험코너다. 실제 절터와 탑만 남아있는 정림사를 컴퓨터그래픽 기술과 고증을 통해 구현한 660년의 모습으로 되살려낸 곳이다.

백제는 역사속의 잃어버린 왕국이다. 더 이상 백제국과 백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제 역사를 오롯이 증명했던 정림사 역시 폐허만 남아 있다. 공간은 그대로지만 시간은 1,400년 흘러 그 옛날 장엄하고 화려한 정림사는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하지만 가상의 디지털 복원을 통해 천 년 전 정림사는 되살아났다. 코로나19 종식 후 비록 디지털 가상공간이지만 ‘가상현실 정림사’를 통해 찬란했던 백제 사비시대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박진호
―문화재 디지털복원전문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상명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라벌 왕경·백제 무령왕릉·고구려 고분벽화·바미안 석불·앙코르와트를 디지털 복원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디지털 석굴암을 전시하는 등 20여 년 간 70개의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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