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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의 책 읽어주는 남자2_ 싯다르타서양인이 소설로 쓴 불교의 세계

세계인의 인간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주의 소도시 칼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영어교사였다. 해외에 파송하는 선교사를 지도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는 1881년 스위스 바젤로 발령받아 가족은 그곳에서 5년을 살았다.

헤세의 젊은 시절

헤세는 일곱 살 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 부인을 잃고 쓸쓸해하던 외할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은 고향 칼브(Calw)로 되돌아왔다. 열세 살 때 괴팅겐의 라틴어학교에 들어갔고, 이듬해 마울브론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속박이 심해 적응하지 못하면서 “시인이 되든지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학교에서 도망을 쳤다가 퇴학당하고, 신경 쇠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헤세의 부모는 아들을 바젤의 전도관에 맡겼다가 칸슈타트의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1893년, 고교를 자퇴하고 에스링겐에서 책방의 견습 점원이 되었으나 사흘 만에 도망쳐 칼브로 돌아와 영세한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다. 1895년 열여덟 살 청년이 된 헤세는 대학거리 튀빙겐의 헤켄하워 서점 견습 점원이 되면서 겨우 안정을 찾아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1899년, 스물두 살 때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자비(自費)로 간행하고, 일하는 곳을 바젤의 라이히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에는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헤르만 라우셔의 유작과 시〉를 발표했다. 1902년에 〈시집〉을 간행하면서 어머니에게 헌정한다는 헌사를 넣었으나, 출판 직전에 모친이 타계했다.

1904년 스물일곱 살의 헤세는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베를린의 피셔출판사에서 간행해 일약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해 스위스 접경 마을 가이엔호펜에 정착했다. 1906년, 〈수레바퀴 밑에서〉를 간행했고, 1907년에는 〈이 기슭〉을 간행해 아내에게 헌정했다. 헤세는 잡지 〈3월〉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는데, 1912년까지 초고의 대부분을 이 잡지에 발표했다.

그는 안락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고, 아내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1911년 〈도상(途上)〉을 간행하고 한여름에서 연말까지 화가 슈투르체네거와 함께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난 걸 알았음에도 다시 유럽여행을 떠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다. 그는 이런 상황을 2년 뒤 〈로스할데〉라는 작품에 그렸는데 ‘예술가에게 과연 결혼생활을 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썼다고 밝혔다. 1912년 서른다섯 살이 된 헤세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 근처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둘러가는 길〉을 간행하고, 1913년에는 〈인도에서〉를 간행했다.

〈삽화=배종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서른일곱 살의 헤세는 독일 국민병으로 베를린 영사관에서 사열을 받았지만 병역은 면제되었다. 그는 베른의 포로보호기관에서 독일 포로의 위문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11월에는 ‘신(新) 취리히 신문’에 반전 평론 ‘오, 벗이여, 그 가락을 그만두어라!’를 기고했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가 휩쓸던 시절,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한 이 글로 인도주의자였던 그는 매국노·반역자라는 비난을 받고 신문과 잡지에서 외면당했다.

1915년, 〈크눌프〉와 〈고독자의 음악〉을 간행하고 8월에 로망 롤랑을 만났다. 1916년 아버지가 사망해 칼브로 귀향했다. 아내는 정신병이 악화돼 입원했는데, 그 자신도 노이로제에 걸렸다. 정신병 의사 J. B. 랑의 치료를 받고 루체른 교외의 보호소에 들어갔다. 이때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간행했다.

1919년, 〈데미안〉을 ‘싱클레어’란 가명으로 피셔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소년의 고뇌와 자기 인식을 탐구하는 과정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과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이 책은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 겪은 시련의 여파로 내외가 함께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자 헤세는 자멸을 피하고자 가족을 떠나 남스위스의 아름다운 고장 몬타뇰라로 가서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고자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뫼르헨〉을 간행하고 수채화를 그렸다. 그리고 소설 〈싯다르타〉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1부는 쉽게 써져 1920년에 잡지 〈신전망〉에 발표됐으나 제2부를 착수하고는 갑자기 중단됐다. 〈방랑〉·〈화가의 시〉·〈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을 간행하고, 첫 개인전을 연 뒤 파리·마드리드·뉴욕·도쿄·몬트리올·함부르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22년 마흔다섯 살 때 소설 〈싯다르타〉를 간행했다.

1부, 붓다를 만난 수행자 싯다르타

‘인도의 시’라는 부제를 단 〈싯다르타〉는 성인(聖人) 붓다를 다룬 소설이 아니다. 붓다의 시대,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한 수도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인도 여행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에 그는 ‘존경하는 벗 로망 롤랑에게 바침’이란 헌사를 붙였다.

인도 사회의 신분제도 카스트 가운데 최상의 신분인 브라만(사제 신분) 출신인 싯다르타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부친은 고결한 학자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싯다르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는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인데도 어째서 매일 정죄(淨罪)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가 아는 사람, 최고의 현자 중에서도 영원한 갈증을 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출가를 결심하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행한다. 절친한 친구 고빈다가 그를 따랐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유명한 스승을 찾아 고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스승은 ‘60세가 되어서도 열반에 이르지 않았으며 70세가 되고 80세가 되어도 그러할 것이며, 고빈다와 자신도 그처럼 늙어서도 수행을 하고 단식을 하고 명상을 하게 되겠지만 열반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때 그들은 고타마란 이름의 부처가 나타나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켰다는 말을 들었다. 싯다르타는 노발대발하는 장로를 정신력으로 제압하고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를 찾아갔다.

고타마는 얼굴과 걸음걸이, 고요히 내리깐 시선, 가만히 늘어뜨린 손과 손가락 하나까지도 평화와 완성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런 구함도, 욕망도, 모방도, 애쓰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치는 그의 음성은 빛과 하늘의 별처럼 맑고 조용히 뭇 사람의 위를 떠돌고 있었다. 교단에 입문할 것을 청하는 많은 순례자들에게 고타마는 말했다. “그대들은 가르침을 잘 들었고 잘 전해졌다. 자, 이리로 와서 모든 고뇌를 끝내기 위해 성스러운 길을 걸어라.”

고빈다는 귀의를 간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싯다르타가 생각에 잠겨 숲속의 길을 걷다가 각자(覺者) 붓다를 만났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세존의 교리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명명백백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세존은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터득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 교리에 의해서는 터득되지 않습니다. 저는 다시 편력의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붓다는 말했다. “사문이여, 그대는 지혜롭소. 다만 지나친 지혜로움은 경계하도록 하시오.”

싯다르타, 자각한 사람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2부가 출간되기까지

〈싯다르타〉를 간행한 이듬해 헤세는 마리아와 이혼했다. 그는 이 해부터 10년 동안 매년 늦가을 취리히 근교의 온천 자덴에서 신경통 치료를 받았다. 그는 국적을 스위스로 바꾸었고, 1924년 1월, 루트 벵거와 재혼했다. 1925년 〈탕치객(湯治客)〉을 간행하고 뮌헨으로 가서 토마스 만을 방문했다. 1926년, 〈그림책〉을 간행하고, 프로이셴 문예원의 재외 회원에 선출됐다.

1927년, 쉰 살의 장년 헤세는 〈뉘른베르크의 여행〉과 〈황야의 이리〉를 간행하고, 루트와 이혼했다. 이듬해 〈관찰〉과 〈위기〉를 간행했으며, 1929년에는 〈밤의 위안〉을 간행했다. 1930년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간행하고, 1931년 가을에 니논 돌빈 여사와 결혼했다. 이 해 〈싯다르타〉에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등 세 중편을 합쳐 〈내면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일흔다섯 살 기념으로 간행된 작품집에서 소설 〈싯다르타〉가 1부와 2부로 된 장편소설로 정리됐다.

2부, 또 한 명의 위대한 현자

2부에는 ‘일본에 있는 나의 사촌 W. 군델트에게 바침’이란 헌사가 붙어 있다. 붓다를 떠난 싯다르타의 행적이 그려진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며 인상적인 뱃사공을 만난다. 마을에서 그는 아름다운 기녀(妓女) 카마라를 보고 정욕을 느끼지만 그녀는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싯다르타의 시에 감동한 카마라는 도시 최고의 부자 카마스와미를 소개해준다.

싯다르타는 상인 카마스와미의 중요한 편지와 용무, 계약서 작성 등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엄청난 돈을 벌어주었으며 자신도 큰 부자가 되었다. 매일 지정된 시각에 좋은 옷에 멋진 신발을 신고 카마라를 찾아가 사랑의 유희를 즐겼다. 카마라가 알고 있는 30~40가지 유희의 환락과 비밀에 통달했다.

부와 정욕 그리고 노름에 탐닉하면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어 갔다. 마침내 그는 환락이 얼마나 죽음에 가까운 것인가를 자각하고 카마라와 작별했다. 싯다르타가 떠나자 카마라는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으며 사람들과의 접촉도 끊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싯다르타와 마지막 사랑을 나눌 때 임신을 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을 떠난 싯다르타는 그가 이곳에 올 때 건넜던 강에 당도했다. 그는 눈을 감고 죽음을 향해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의 영혼의 한구석에서 하나의 소리가 반짝이듯 들렸다. 그것은 ‘완성’의 뜻을 지닌 ‘옴’이라는 소리였다. 그는 마치 잠을 잔 듯한 시간을 보내고 눈을 떴는데 고빈다가 옆을 지키고 있었다. 붓다의 제자들과 편력 중에 숲에 잠들어 있는 사람을 보고 홀로 남아 지킨 것이다. 고빈다도 싯다르타를 알아보고 반가운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지치고 절망한 옛 싯다르타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이 흐르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끼고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강에서 싯다르타는 그가 이곳에 올 때 배를 태워준 뱃사공 바즈데바를 만나 그의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다. 세월이 흐르고 붓다가 곧 열반에 들것이라는 것을, 잇달아 강을 건너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들었다. 카마라도 아들을 데리고 붓다를 찾아 나섰다. 카마라는 나루터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뱀에 물렸고, 바즈데바가 비명을 들었다. 오두막에서 싯다르타는 그녀를 만났다. 카마라는 죽기 전에 아이가 그의 아들임을 알려주었다. 싯다르타와 바즈데바는 강변 언덕에서 카마라를 화장했다.

싯다르타는 열한 살짜리 아들이 행복과 평화를 갖고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두막 생활이 불편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증오와 경멸하는 말을 폭발적으로 퍼부었다. 그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는 아들을 찾아 나섰으나 집착을 끊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돌아왔다.

바즈데바는 늙었다. “빛에 싸여 떠나가는 그를 싯다르타는 배웅했다. 그는 깊은 기쁨과 진지함을 가지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걸음걸이가 평화로 넘치고 그 모습이 모두 빛으로 넘쳐 있는 것을 보았다.” 뱃사공 바즈데바는 완전한 사람이며 성인이었다.

수행자 고빈다는 강가에 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뱃사공의 얘기를 듣고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가 싯다르타임을 알았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일세.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붓다의 설교나 사색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와 생활 속에서만 나는 그분의 위대함을 보는 걸세.” 싯다르타와 작별하며 고빈다는 그의 미소가 그 자신이 수없이 외경의 마음을 가지고 본 고타마 붓다의 미소와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삽화=배종훈〉

헤세의 종교적 체험 고백

이 작품에서 헤세는 싯다르타라는 출가 이전 석가모니의 이름을 빌려 득도하기까지의 구도자에 대한 내면적 체험 세계를 탐구하려고 했다. ‘싯다르타’는 ‘목적을 완성한 사람’이란 뜻인데, 열반에 든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설법하거나 성도(成道)를 찬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헤세 자신의 종교적 체험 고백이다. 그 체험의 절실함과 탐구의 독자성이 아름답고 단순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문장에 의해 헤세 예술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서 주목받았고, 12개의 인도 방언으로 번역되어 작가를 기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헤세의 작품 중에 가장 많은 언어로 세계 각국에 번역되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1962년 8월 9일 여든다섯 살로 몬타뇰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글 유자효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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