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씀이 사자후 되고
당신의 자리가 사자좌 되길”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면 시작하기 직전 언제나 영화사 로고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영화제작사 MGM사의 로고에는 제가 등장합니다. 거대한 머리에 달린 갈기를 멋지게 날리며 포효하는 저는 사자(獅子)입니다. 영화사 로고 속의 저는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자의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개들은 ‘멍멍’ 짖고, 고양이는 ‘야옹’ 하고, 호랑이는 ‘어흥’ 하는데 사자의 울음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하려하면 마땅치가 않습니다. 뭔가 소리를 내는 건 분명한데 고막을 찢는 소리라기보다 거친 숨소리, 주변을 진동케 하는 떨림이 먼저 느껴집니다.

이른 아침의 포효

저의 하루 일과는 이른 아침 굴에서 나와 앞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한 뒤에 크게 포효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 잘 잤다.”라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켤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근처에 있던 온갖 동물들은 전율합니다. 이런 장면을 〈대지도론〉에서는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동굴에서 나와서는 등을 낮게 펴고 으르렁 신음하며[頻申], 주둥이로 대지를 두드려서 그 큰 위세를 드러낸다. 이른 아침에 모습을 나타내어 사자왕의 위력을 보이며 노루며 사슴, 크고 작은 곰들, 범과 표범, 멧돼지 무리를 제압하고, 늦잠 자는 온갖 동물들을 깨워 높고 강력하게 위력을 드러내서 모든 동물을 항복시키며, 스스로 길을 열면서 크게 으르렁거린다. 이와 같이 포효[吼]할 때 그 소리를 듣는 동물들 중에 어떤 것은 기뻐하고, 어떤 것은 겁에 질리는데, 굴에 사는 동물은 더욱 깊이 숨고, 물에 사는 동물은 깊이 잠수하고, 산에 숨어 사는 동물은 낮게 엎드리고, 마구간의 코끼리는 사슬을 떨치고 미친 듯 내달리려 하고, 새는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아주 멀리 떠나간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뭇 생명체를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불립니다. 부처님도 바로 그렇습니다. 어디에 가시든, 그곳에서 어떤 법문을 하시든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거나 사악한 행동을 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전율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우리의 포효와 같다고 ‘사자후(獅子吼)’라 부르고,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를 ‘사자의 자리[獅子座]’라 부르며,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운 부처님의 자세를 ‘사자처럼 누우셨다.’라는 정형구로 표현합니다. 자세뿐만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생김새도 사자와 닮았습니다. 부처님은 사자처럼 머리가 크니 이것은 지혜를 머리로 삼는다는 표현이고, 부처님의 뺨에는 사자처럼 광대뼈가 볼록하니 이것은 온갖 선근이 모여서 볼록하다는 표현이고, 부처님의 눈은 사자의 눈처럼 맑고 깨끗하고 광택이 나는데 이것은 티 없이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는 표현입니다. 사자의 상반신은 아주 발달되어 있지만 하반신은 날씬한데, 부처님의 배도 이처럼 불록하게 튀어나오지 않았으니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표현이고, 부처님 허리는 길고 날씬하니 이것은 인욕을 상징합니다. 사자의 꼬리가 미끈하게 긴 것처럼 부처님도 세속을 멀리 떠난 수행[遠離行]을 닦았다고 말합니다.

〈대지도론〉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 사자인 저는 비록 동물이라 하더라도 그 어떤 생명체도 부럽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저를 꼭 닮았다는 말이니까요.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동물의 왕이어서 뭇 짐승들을 겁주지만, 부처님은 삼천대천세계 만중생을 지혜와 자비로 끌어안는 진리의 왕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 화엄사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

사자의 일곱 가지 덕

혹시 부처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이제부터 바로 저, 사자처럼 행동하기를 권합니다. 그 구체적인 사항을 알려드리지요.

첫째, 잡다한 것과 뒤섞이지 않아서 티끌 없고 청정하고 결백합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되고 싶다면, 그 마음이 티끌 없고 청정하고 결백해야 합니다. 행여 후회할 짓은 멀리 떠나보내야 합니다.

둘째, 네 개의 다리로 쏜살처럼 달려 나갑니다. 부처님이 되고픈 사람도 네 개의 다리[四神足]로 곧장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셋째, 저의 갈기는 아주 화려하고 광택이 흘러넘칩니다. 부처님이 되려고 수행하는 사람도 멋진 갈기를 지녀야 하니, 그것이 바로 ‘계를 지키는 일[持戒]’입니다.

넷째, 백수의 제왕인 저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속을 떠난 구도자도 그래야 합니다. 살아가려면 음식과 옷, 앉거나 누울 자리, 의약품과 같은 필수품을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물품들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상대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먹이를 먹을 때 차례로 나아가서 먹습니다. 먹이가 있는 곳에서는 원하는 만큼만 먹을 뿐 더 맛있는 먹이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구도자도 그처럼 하루 한 끼 탁발할 때 마을로 들어서면 차례로 집들을 찾아다니되 집들을 골라서 다녀도 안 되고, 더 맛있는 음식을 바라며 다녀도 안 됩니다. 음식이란 몸을 지탱하기에 족할 정도의 양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여섯째, 썩은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한 번 먹은 곳에는 다시 가지 않습니다. 그처럼 구도자라면 음식을 쌓아두고 먹지 않아야 합니다.

일곱째,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도 근심하지 않고 먹을 것을 구해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그릇된 마음 없이 먹습니다. 구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을 얻지 못했다고 근심하지 말 것이요, 먹을 것을 얻었어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맛에 탐착하는 것이 죄요 허물이라 여기고 해탈의 길을 생각하며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밀린다왕문경〉

부처님은 이렇게 수행하여 진리의 왕이 되셨으니 부처님을 흠모하여 그처럼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 일곱 가지 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자답게 만드는 두 가지 덕목

저는 백수의 제왕입니다. 그런데 ‘제왕’이란 호칭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때문에 모든 동물의 왕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 첫 번째 마음가짐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향해서나 한결같다는 점입니다. “배가 고파서 코끼리를 잡아먹을 때 분연히 신속하게 힘의 기상을 다하고, 양이나 사슴 같은 작은 짐승의 무리를 잡을 때에도 떨치는 힘의 기상은 코끼리에게 하듯 한결같습니다. 이처럼 사자는 그 두 가지 경우를 따로 여기지 않습니다.” 〈묘비보살소문경〉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우직하게 정진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왕 사자도 먹이를 쫓을 때면 상대가 강력하거나 연약하거나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요령을 갖춘 현명한 자세라 하겠지만 가벼운 상대를 만났다 해서 집중과 노력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처하지만 그때조차도 최선을 다합니다.

두 번째 마음가짐은 대상을 정확히 꿰뚫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비구니 스님이 길을 가다가 고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온몸을 불로 지져대는데 뜨거운 열기에 목구멍과 입술과 혀가 바짝 말라 있었지요. 열기를 이기지 못해 땀범벅이 되어 땅바닥에 뒹굴며 괴로워하면서도 고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는 낡은 베옷을 입은 채 언제나 온몸을 불로 지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갈자(縷褐炙)’라고 불렀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누갈자의 고행을 지켜보다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지져야 할 것은 지지지 않고, 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지지고 있소.”

고행자 누갈자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가소롭구나. 까까머리 수행녀야. 그래, 대체 내가 뭘 지져야 옳단 말인가?”

비구니 스님이 답했습니다.

“정말 지져야 할 것은 지금 그 화내는 마음이다. 마음을 지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지짐이라 할 것이다. 소가 수레를 끌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대는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수레를 채찍질 하겠는가? 몸은 수레와 같고 마음은 소와 같으니, 그대는 마음을 지져야 하거늘 어째서 몸을 괴롭히는가?”

선업을 쌓고 덕과 지혜를 완성하겠다면서 정작 마음에는 교만과 분노가 가득 차 있으니 비구니 스님은 그런 고행자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지면 사자는 곧바로 그 사람을 쫓아간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기왓장이나 돌로 때리고 던지면 개는 사람이 아니라 기왓장이나 돌을 쫓아간다. 사자는 지혜로워서 근본원인을 꿰뚫어 알지만 어리석은 개는 그러지 못하니, 지금 고행을 하며 온몸을 불로 지지는 그대야말로 사자가 아니라 저 어리석은 개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대장엄론경〉

비구니 스님의 일갈에 고행자 누갈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게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한로축괴(韓盧逐塊)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전등록〉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한로)는 흙덩이를 쫓지만 사자는 사람을 문다.’는 것으로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비유하는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문제의 근본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여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사자가 지닌 놀라운 능력입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지혜를 갖춘다는 뜻 아닐까요?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날아오는 온갖 흙덩이, 화살 같은 고통과 슬픔, 번민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충 아무 데에서나 그 원인을 찾으면 영원히 괴로움과 슬픔과 번민에서 풀려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가리켜 우리들 사자에 비유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런 지혜를 갖춘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겁을 먹거나 위축되지 않습니다. 당당하고 품위가 있어서 상대를 압도합니다. 마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되는 것이지요. 〈숫타니파타〉

저, 백수의 왕 사자는 이렇게 지혜와 용기와 정진력을 다 갖추었습니다. 이런 나를 당할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천하무적인 저도 끝까지 조심해야 할 적이 하나 있으니 바로 내 몸 속에 기생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는 벌레[獅子身蟲]입니다. 저의 몸속에서 자라난 벌레에게 결국 백수의 왕인 저도 잡아먹힙니다. 〈범망경〉

‘나를 당할 자는 없다.’는 교만에 사로잡혀 마음공부에 게을러지면 끝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녀린 사슴을 쫓더라도 커다란 코끼리를 쫓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자처럼 당신의 하루하루도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느 사이 당신의 말씀은 사자후가 되고, 당신의 자리는 사자좌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정진하고 성찰합시다. 사자처럼.

이미령
―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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