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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의 책 읽어주는 남자1_아득한 성자무산 스님의 시로 쓴 법문

스님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1968년이다. 그해 나는 〈시조문학〉에 초회 추천을 받았는데, 스님은 3회 천료(薦了)하셨다. 그래서 잡지를 통해 이름을 접한 것이다. 나는 20대, 스님은 30대였다.

11년 뒤, 나는 전봉건 선생의 청으로 〈현대시학〉에 시조 월평을 쓰고 있었다. 1979년 5월호에 조오현 시인의 첫 시조집 〈심우도(尋牛圖)〉를 다루었다. 때마침 나온 승려 시인 윤선효의 〈임진강〉과 함께 ‘승려의 시조’란 제목으로 두 시조집을 비교 분석했던 것이다.

스님을 직접 뵙게 된 것은 다시 11년이 흐른 뒤다. KBS 파리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990년 여름, 경희대 국문과에 재직하고 있던 친구 김재홍 교수의 권유로 대학생들의 문학기행에 동행했다. 그런데 방문지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산실인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백담사였다.

당시 백담사는 작은 절이었다. 김 교수의 안내로 만난 스님은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차 시중을 들던 시자에게 “내 시를 좋다고 칭찬하신 선생님이시다. 잘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현대시학〉 월평을 읽으셨구나.’ 짐작했다. 스님은 내 고향을 물으시더니, 부산에서 활동한 서예가 청남 오제봉 선생의 글씨 한 점을 주셨다. 그 글씨는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김재홍 교수는 ‘만해 한용운론’으로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다. 스님은 김 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1995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고 1998년부터는 백담사에서 만해축전을 개최했다. 나는 제1회 만해축전부터 행사 사회자로 차출되었다. 외국 학자들이 참여하는 세미나의 사회며, 만해대상 시상식 사회 등이 나의 몫이 되었다. 올해 24회 만해대상 시상식 사회를 하면서 거슬러보니 나의 50대와 60대, 그리고 70대 전반기가 만해축전과 함께 흘러갔다. 오현 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2007년, 스님은 시조 ‘아득한 성자’로 제19회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심사위원 김남조 시인은 “그의 작품 성향은 관조와 달관 쪽에 기울고 있으며, 침잠과 일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평했다. 조오현 시인의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골라낸 고은 시인은 “과연 오현음(五鉉吟)의 높이”라고 극찬했다.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문학작품이란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세계의 산물이란 점에서 우리의 제일 오래된 형식인 시조에 주목했다.”고 했고, 이근배 시인은 “지용의 한라와 무산 스님의 설악이 조응하였다.”고 했다. 정지용은 ‘백록담’이란 시를 썼고, 무산(霧山)은 오현(필명)의 법명이다. 또 김재홍 문학평론가는 “종교적 명상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는 하루살이를 성자라고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스님의 시에서는 번뜩이는 천재성이 느껴진다. 그는 우리 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었다. 이후 ‘아득한 성자’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같은 이름의 시집은 그의 대표 저작이 되었다. 만해가 단 한 권의 시집 〈님의 침묵〉으로 불멸의 시인이 된 것처럼 오현은 〈아득한 성자〉 한 권으로 영원을 찰나처럼 걷어쥔 것이다. 시인으로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있을까?

오현 스님은 퇴락한 백담사를 중창하고 만해마을을 만들어 문인들의 집필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서울에 흥천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일들을 한 오현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3교구 본사인 신흥사 조실이 된 후 절에 잘 계시지 않았다. 스님이 기거하신 곳은 나의 집 근처였다.  

“지금 뭐하시능교?” 불시에 스님의 전화가 온다. 마침 집에 있을 때면, “퍼뜩 오이소.”라고 하신다. 달려가 뵈면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시 얘기 등을 나눈다. 

한 번은 내가 “절에 계시면 편할 텐데 왜 이 고생을 하시느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내가 웅크리고 있으면 젊은 중들이 불편해 해.” 그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나와 계신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안거 때는 꼭 참여하셨다. 따라서 하안거 석 달과 동안거 석 달은 절에 계시고, 나머지 여섯 달은 세간에 계시는 셈이다. 나는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 ‘심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를 생각했다. 수도의 최고 경지가 세간에 함께 계심이 아니었던가?

신흥사에 조계종 기본선원이 설립될 때 찾아뵈었다. 큰 법당이 스님들과 신도들로 가득했다. 스님은 선종의 역사적 배경과 기본선원이 갖는 의미를 말씀하신 후 당신의 시조 한 수로 법어를 마무리하셨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그렇다. 석가는 강물도 없는 강물을 흘러가게 해 놓으셨다. 더 나아가 온 세상에 넘치게 하셨다. 뗏목다리의 역할을 다하시고는 자신이 넘치게 한 강물에 떠내려 가셨으니 그 얼마나 위대한 생애인가.

법어가 끝나자 대중 스님들이 소리 모아 “석가모니불”을 불렀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시로 끝내는 법문도 처음 보았다.

오현 스님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큰 감화를 받았노라고 내게 말한 바 있다. 소설 〈싯다르타〉에는 강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수행자 싯다르타는 뱃사공 비즈데바에게 이렇게 묻는다. “강으로부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을 배우셨소?” 싯다르타는 강의 흐름과 하나가 되면서 전일적(全一的) 의식[Einheit]에 도달했던 것이다. 오현 스님의 시조 ‘부처’도 소설 ‘싯다르타’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다. 많은 시인이 스님의 도움을 받았다. 오현 스님이 계심으로 해서 시의 위상, 시인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던가? 특히 한국 시조단이 스님에게 진 신세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나는 우리 문단이 앞으로 오현 스님 같은 시승(詩僧)을 만나기는 어려우리라고 본다.

한 번은 스님으로부터 지중해 여행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스님이 미국에 계실 때 가까이 지내던 분이 여행이나 하시라고 꽤 큰돈을 보냈다고 했다. 스님은 시인 몇 사람을 여행에 초대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좋은 게 있으면 함께 봐야지. 혼자 재미있으면 뭐해.” 그리고는 인천에서 로마까지의 긴 항로를 스님은 이코노미석에 타시고 원로 시인들을 프레스티지석에 모시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스님이 더 원로인 듯 했는데 말이다.

가까이 계시다보니 스님의 건강상담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어느 날은 사타구니에 혹이 만져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겪어서 짚이는 바가 있어 병원에 모시고 갔다. 탈장이었다. 탈장은 간단한 수술로 금방 쾌유되었다. 끼고 계시던 틀니가 훼손돼 아는 치과에서 보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어려움은 그 뒤에 찾아왔다. 속이 쓰리다고 하시더니 병원에서 식도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초기라고 하여 내시경 수술을 받고 짧게 입원 후에 퇴원하셨다. 다행이었다. 

어느 날 문득, 스님의 전화를 받은 지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스님께서 시간이 날 때 전화를 주셨기 때문에 무심코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볼 일이 있어 경상도 쪽에 내려와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서울에 오시면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서초동 토굴을 처분하고 만해마을에 기거하신다고 했다. 그 통화가 이승에서 스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한 달 뒤 나는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양산 통도사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浮屠)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 ‘재 한 줌’ 전문

2017년 가을날 저녁, 그날도 스님의 부름을 받고 찾아뵌 곳에서 스님이 문득 나를 “자효야”하고 불렀다. 나는 “네”하고 답했는데, 그 순간 문득 혈육과도 같은 정을 느꼈다. 그때 스님은 마지막 원(願)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도를 가고 싶다고 했다. 도착하면 여권과 소지품을 모두 버리고 걸식하며 방랑하다가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불교를 잘 모른다. 선승들의 세계도 짐작만 할 뿐이다. 내게 스님은 언제나 시인이셨다. 스님을 만나면 나누는 얘기의 대부분이 시였다.

스님은 언제나 주위와 나누고자 했다. 내가 아는 최고의 기부자 오현 스님이 무척 그립다.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날은 보이지 않데 

- ‘인천만 낙조’ 전문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는 조오현 시집 〈아득한 성자〉는 처녀시집 〈심우도〉 이후의 작품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래서 스님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는 연구자들에게 좋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스님의 시를 소재로 한 학위 논문들이 나오고 있는데, 앞으로 스님의 문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필수적인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연구자들에게도 이런 배려를 남기고 가셨는가?

1부에서는 불교적 세계관을, 2부에서는 저잣거리의 풍경들을, 3부에서는 수행자의 삶을, 4부에서는 개인적 내력들을, 5부에서는 절간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이 시집을 펴든다. 찬찬히 읽고 있으면 생전의 스님 육성을 듣는 듯하다. 내 생애에 그런 큰 시인 스님을 뵐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복이었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대표서정시 100인선 〈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글 유자효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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