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몰랐어도
본질에 공감한
불교와 서양 심리학의
가교자

사람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하지만 어떠한 감성에 휘둘려 처음 결정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왜 합리적인 선택인 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의식’이 제어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그것, ‘무의식’을 원인이라고 말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무의식의 존재를 정밀한 이론체계로 세상에 널리 알린 심리학자다. 그는 무의식을 바탕으로 마음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한 ‘정신분석’이란 새 지평을 열었다. 정신분석은 지동설이나 진화론처럼 서구 지성사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혁명적 이론이다. 

서양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불교를 알지 못했다. 기록상으로는 불교학자들과 직접적인 교류도 없었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 불교는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진 종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재의 첫 인물로 프로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20세기 서양 심리학계가 불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학문적 터전을 다져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수제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을 비롯한 20세기 초 서양의 심리학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내재된 심리학적 가치에 주목했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포함해 서양 심리학의 한계를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이때 그 가교(架橋) 역할을 한 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주는 해석적 틀이다. 즉,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기반으로 정신 현상과 종교 현상을 연구하고 이해했다. 마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됐을 때 중국인들이 도교적 시각으로 불교를 이해했듯이, 서양 심리학자들은 동양의 종교를 연구할 때 정신분석이란 틀을 사용한 것이다.

프로이트를 불교와 서양 심리학의 가교자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불교 이론과 여러 측면에서 상통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이트 이론과 불교는 모두 ‘고통’이라는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한다. 2,600년 전 싯다르타 태자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수행을 했듯이, 프로이트도 고통이란 출발점에서 ‘왜 우리의 마음은 고통을 받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해답을 모색했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부과된 인생은 너무 힘들다. 인생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해결책 없는 과제를 안겨준다.”고 토로했다. 붓다와 프로이트 모두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방법을 마음속에서 찾았는데, 두 분 모두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다만 붓다는 마음의 본질이 무아(無我)이며 비어있음을 통찰하라고 가르친 반면 프로이트는 마음속의 욕망과 도덕심 그리고 이 둘을 조정하는 자아, 이 세 요소의 균형을 강조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프로이트와 불교의 공통점을 비교·연구하는데, 바로 인간을 바라보는 문제의식과 접근방식에서 두 사상이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대는 원죄나 구원론 등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로이트가 기독교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을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애독한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등에 나오는 인간 심리의 본질이 인간의 삶을 불교의 공(空), 노자의 무(無)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집안 장남으로 태어나

프로이트는 랍비(유대교 율법교사)를 많이 배출한 유대교 집안에서 팔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오스트리아 모라비아(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이다. 3세 때 가족과 함께 수도 빈으로 이사해 거의 80년을 이 도시에서 살았다. 빈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프랑스로 가서 히스테리를 연구하기도 했다. 37세 때 정신분석 이론 개발에 착수해 3년 뒤 자신의 연구에 ‘정신분석’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의 정신분석 연구의 중심에 ‘무의식(無意識)’이 있다. 무의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꿈이나 정신분석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화되지 않는 의식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실수·꿈·강박행위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무의식의 탐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치밀하게 들여다보면서도 객관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프로이트의 타고난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휩쓸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뛰어난 자기분석 능력이 있었다. 

훗날 프로이트가 회고한 그의 어린 시절에 따르면 만 두 살이 좀 지났을 때 어머니의 몸을 보고 강하게 마음이 끌렸고, 여자 조카를 성적 관심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다투었던 남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 도리어 기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경험을 연구 주제로 삼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란 개념을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보인 어린 시절의 성적 호기심은 특별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아동들이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심리성적발달 이론은 후에 발달심리학과 성격심리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기록을 일부러 남기지 않았다. 사적인 기록을 1885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없애기도 했다. 1933년 독일 나치도 유대인인 그의 저작을 불태웠다. 수년 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루에 시가를 20개나 피웠을 정도로 골초였는데, 구강암으로 16년 간 30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결국 83세 때 의사인 친구에게 부탁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프로이트와 제자들. 1909년 프로이트(앞줄 맨 왼쪽)가 카를 융(앞줄 맨 오른쪽)을 포함한 제자들과 함께 클라크 대학을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카를 융도 프로이트와 갈등하며 학문적으로 성장했다.

붓다와 프로이트의 고통 극복법

다시 돌아가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연구하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하려 하고,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쾌락 원리’라고 명명했다. 달리 설명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결정할 때 즐거운 쪽을 택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타고난 본능이란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본능은 항상 이렇게 속삭인다고 말했다. 

“나는 즉각적인 보상을 주는 즐거움을 좋아해. 고통은 피하고 싶고 즐거운 게 좋아. 즐거움 중에서도 오래 기다려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금방 얻는 즐거움이 최고야. 만일 즐거움을 얻기 위해 고통을 거쳐야 한다면, 그건 가급적 사양할게. 나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심지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할지라도 현재의 고통을 회피할 수 있다면 말이야.”

고통과 쾌락에 대한 붓다의 입장도 비슷하다. 붓다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란 존재의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여겼다. 붓다는 “사람은 기분 좋은 대상에게 끌리고, 기분 나쁜 대상에게 반감을 느낀다. 따라서 좋은 대상에게 접근하고 고통을 주는 대상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이라고 가르쳤다.

붓다와 프로이트는 이구동성으로 쾌락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지만, 이 욕망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프로이트는 ‘욕망과 사회적 제약 사이에서 자아가 적절히 타협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현실과 잘 타협할 수 있도록 욕망을 다스리는 힘인 자아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붓다는 ‘집착하려는 그 본질을 통찰하는 것으로 욕망을 다스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프로이트의 고통 극복방법은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자아 기능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고통]과 내가 원하는 방향[쾌락]이 다르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고, 그 와중에 나의 욕망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이 시점에서 다시 고통이 일어난다. 현실적 타협에는 언제나 고통이 동반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프로이트의 방식으로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프로이트도 스스로 “성공적인 치료는 히스테리에 의한 괴로움을 평범한 불행으로 전환해줄 뿐”이라고 말하며 한계를 인정했다.

이와 달리 붓다의 가르침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불교는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가 집착하는 쾌락의 대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쾌락의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해서 그 대상에게 집착하던 욕심이 사라진다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 이론과 불교의 알라야식

학자들은 불교와 프로이트 사상을 논할 때 불교의 잠재의식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종종 언급하는데, 특히 불교심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식불교는 다양한 형태의 무의식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정신이론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양의 무의식이론과 자주 비교·연구된다. 

자신들의 명상 체험을 바탕으로 마음속에서 여러 개의 의식층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1,600여 년 전에 이미 현재의 무의식이론보다 더 정교하게 설명했던 유식학자들은 특히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의 잠재적인 힘이 되는 알라야식을 강조했다. 

알라야식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을 저장하고 저장된 것을 잠재적인 상태로 보유하고 있다가 적절한 조건이 외부에서 일어나면 의식의 표층으로 내보낸다. 결국 우리는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정신분석과 유식불교 모두 동일하게 주장한다. 다만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이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아뢰야식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겠다. 인간존재의 내면과 심리에 관한 프로이트와 불교의 이론은 많은 학자의 연구로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여전히 소통 중이며 앞으로도 우리의 정신세계에 관해 더 깊은 해설을 제공해 줄 것이다. 

프로이트는 한평생 쉼 없이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 탐구했다. 자신이 세운 정신분석 이론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더 깊은 영역을 향해 나아가려했다. 마치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고, 6년의 고행을 겪었던 붓다의 수행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비록 불교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친구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을 통해 동양의 명상을 맛보았다. 로맹 롤랑은 그에게 힌두교의 명상을 ‘대양(大洋)적 느낌’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이후 프로이트는 신비적 종교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신선한 경험에 당혹감을 느꼈으나 이후 영적 체험을 더 깊이 탐구했고, 결국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그가 만년에 동양의 명상이 무의식의 깊은 차원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좀 더 일찍 동양의 명상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서양 정신분석의 연구방향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음은 전체의 7분의 1만 물 위로 드러난 빙산과 같다.”고 말했던 프로이트. 그는 위대한 심리학자이자, 진정한 탐험가였다. 

문진건 
―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조교수. 미국 ‘California Institute of Integral Studies(CIIS)’에서 동서양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CIIS 동서양심리학과 초빙교수(2012~2014), 미국 중독심리전문상담사(CAADAC), 동국대학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2015~2019)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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