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은 正見 이르는 지름길
來生에는 수행자로 살고 파”
안동일(81·법명 觀海)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은 대표적인 불자 변호사이다. 홍익법무법인 고문변호사로도 활동 중인 그는 동산반야회 창립자인 김재일(1949~2008) 이사장 사후 동산반야회와 동산불교대학 제2대 이사장을 맡아 안정과 발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지금도 동산반야회 명예이사장과 전국염불만일회장을 맡아 신행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그를 만나 그간의 신행활동과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안동일 이사장은 팔순(八旬)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근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로에 위치한 재단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재단 설립자인 이종환 선생이 내가 일생동안 공익법인(재단법인·사단법인·학교법인·시민사회 단체 등)에서 경험한 봉사와 업무 경험을 살려 이 재단을 더 발전시켜달라고 부탁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직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명예회장이 세계 1등 인재를 육성해 우리나라와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2000년 6월 설립한 교육재단이다. 현재 1조 원이 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장학재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 이사장은 재단의 시스템과 소프트웨어 등 내실을 충실하게 갖춰 재단이 향후 100년, 1,000년 지속가능토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팔순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
그가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동산반야회는 한국불교 중흥을 이끈 재가불교운동가로 평가받는 김재일 법사가 ‘청년불교가 살아야 한국불교가 살고, 한국불교가 살아야 사회의 민주화와 국가 발전도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1982년 11월 설립한 신행단체다. 당시 조계종 원로의원인 무진장 스님(1932~2013)이 법주를 맡았다. 현재 법주는 법산 스님(前 동국대 이사장)이 맡고 있다.
동산반야회는 설립 초기 교리강좌와 동산선원을 통해 기반을 닦았고, 1992년 동산불교대학을 설립했다. 2년 뒤에는 한국불교기아도움기구를 발족했고, 1997년부터는 조계종 포교사를 배출하다가 2003년부터 한국불교교육단체연합회 연합포교사고시로 포교사를 배출하고 있다. 안동일 이사장이 전국염불만일회장을 맡은 건 2008년이다. 전국염불만일회는 1998년 여름 강원도 건봉사에서 1,000여 불자들이 모여 전국염불만일회 결사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부터 2019년까지 매년 염불정진대회를 개최해 회원들과 함께 염불 수행 의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개최하지 못했지만, 아미타부처님을 만일 동안 염불하는 총 27년 5개월의 대장정(회향, 2025년 12월 21일)은 지금도 순항 중이다.
안 이사장은 우리 사회를 뒤흔든 굵직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10·26사건의 김재규, KAL기 폭파범 김현희, 대도 조세형, 〈야생초편지〉 저자 황대권,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국회 대리인, 기타 긴급조치 사건과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을 맡아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아버지 여의고 불교공부 입문
그는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비심(大悲心)’이라는 법명을 갖고 있던 어머니는 서울 약수암과 예산 향천사를 다닌 신심 돈독한 불자였다. 그는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손을 잡고 향천사를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오대산 문중의 원보산 스님으로부터 대추씨로 만든 단주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업 때문에 가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닌 게 전부였다. 당시 그에게 불교는 막연히 ‘어머니의 종교’일 뿐이었다. 그가 다시 불교에 눈을 뜬 계기는 서울대 법학과(59학번) 재학시절 청담 스님(1902~1971)의 법문을 듣고서다.
“1959년도 여름으로 기억되는데, 대학생 때 서울 종로 영보빌딩에서 세계 각 종교를 소개하는 대회가 열렸어요. 열 몇 개의 종교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그 당시 불교에 대해 설명한 분이 바로 청담 스님이었죠. 스님의 말씀이 한순간에 귀에 들어왔어요.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안 이사장은 청담 스님의 법문을 들은 이후 불교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그의 은사였던 황산덕(1917~1989)·서돈각(1920~2004) 서울대 법대 교수가 독실한 불자였다. 청담 스님의 법문과 은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황산덕 교수가 지은 〈복귀(復歸)〉·〈열반종요〉·〈여래장〉 등을 감명 깊게 읽은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불교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불교적 소양을 쌓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다시 불교와 멀어졌다. 그러던 중 1993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삶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는 상실감을 느낀 그는 순천 송광사를 찾아가 4박 5일 단기출가를 체험했다. 그것만으로는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품고 서울 조계사 인근을 배회하다가 마침 동산불교대학 3기 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그래, 다시 불교 공부를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동산불교대학에 다니면서 무진장 스님, 김재일 법사와 인연을 맺고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동산불교대학은 2년 과정 18개 과목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교수진이 대단했다. 그는 변호사로 바쁘게 활동하면서 토요일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불가피하게 토요일 수업에 참석하지 못할 때는 강의내용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구해 보충공부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아버지를 여읜 허탈감을 극복하고자 시작한 불교공부인데, 내가 행복해지기까지 했으니 완전히 불교에 빠져버린 셈이지요. 그러던 중에 김재일 법사가 염불수행을 권하더군요. 불교공부와 수행은 병행해야 한다면서요. 그날부터 새벽예불과 108배로 하루를 시작해 시간나는 대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사경을 했습니다.”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사태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계종전국신도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안 이사장과 김재일 법사는 “그래도 재가불교를 대표하는 신도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뜻을 함께했고, ‘한국재가불자연합’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의 부탁으로 지난해까지 27년간 조계종 법률고문을 맡아 각종 송사를 도왔고, 1998년 조계종 총무원 점거사태도 법원 판결을 받아 해결했다.
불같은 성격, 불교로 다스려
안 이사장은 불교수행이 변호사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1978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성격이 매우 급해서 화를 자주 내곤 했다. 이런 성격은 의뢰인은 물론 재판 당시 판사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어떤 선배 변호사는 법정에서 날선 변론 모습을 보고 그에게 살기를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단다. 급한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10년 뒤 심장병이 발병했다. 혈관 확장술만 여섯 차례 받고, 중환자실에 한 달 넘게 입원해야 했다.
퇴원을 하자 어머니께서 그의 손에 단주를 쥐어주면서 “너는 화를 잘 내는 편이니 이 단주를 주머니에 넣고 다녀라. 변론을 할 때 욱하거나 화가 나면 이 단주를 잡거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어머니 말씀을 새기고 욱하는 감정이 치솟을 때마다 주머니에 넣어놓은 단주를 잡았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지만, 자꾸 연습을 하니 익숙해졌고, 나중에는 손목에 단주를 차고 다니게 됐다. 어머니의 단주 때문인지 화(火) 많은 성격은 점점 고쳐졌다.
또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보살도’·‘화쟁’·‘연기’ 등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다 보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재판 당사자와 이야기를 할 때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게 됐고, 변론할 때도 죄지은 사람의 사정을 샅샅이 들어서 그에게 유리한 변론을 하려고 노력했다. 법정에서도 재판부에 간절하게 호소했다. 특히 40년이 넘는 변호사 생활 중에 남을 해코지하는 고소·고발 건을 단 한 차례도 수임하지 않은 것은 오직 불교의 영향이다. 지금까지 변호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김재규와 김현희다.
“김재규는 독실한 불자였습니다. 그와 대화할 때 그는 항상 한 손으로 염주를 굴렸습니다. 또 교수형으로 사형집행을 당할때도 두 손을 합장하고 염주를 떨어뜨리지 않고 손에 꼭 쥔 채 마지막 길을 떠났죠. 김현희는 처음 만났을 때 손수건을 쥐며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요. 다음에 만날 때 제가 염주와 불서 두 권을 가져다 줘서 볼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개신교로 갔더군요. 그 이유가 당시 개신교인이었던 안기부 관계자가 목사를 소개해 줬고, 그 당시 그가 성경을 줘서 읽어봤는데 북한의 유일사상하고 똑같아서 빠져들게 됐다더군요.”
염불,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
안 이사장은 지금도 다양한 수행을 하고 있다. 특히 2004년경 우연히 홍콩국제공항 서점에서 〈The Art of Happiness〉(〈달라이라마의 행복론〉으로 국내 출간)을 구입해 읽은 후 달라이라마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행복하려면 중생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위하는 사랑의 마음이 곧 자비심이자 이타심이며, 보리심”이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후 달라이라마의 저서를 20여 권 넘게 읽었다. 2010년에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기도 했다.
달라이라마가 새벽마다 오체투지를 한 후 기도문을 암송한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매일 새벽 달라이라마가 암송하는 기도문을 따라 외우며 기도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김재일 법사의 영향으로 매일 아침 108배와 예불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절을 한 번 올릴 때 열 번씩 염불을 했는데,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절 수행은 자제하고 있다.
대신 염불 수행은 꾸준히 하고 있다. 날마다 틈날 때 1만 번 이상 염불을 한다. 길을 걸을 때도 박자에 맞춰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되뇌고,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도 염불을 한다.
안 이사장은 “염불만일결사(念佛萬日結社)는 신라 경덕왕 17년(758) 발징(發徵, ?~785) 화상에 의해 최초로 이뤄졌다. 당시 염불만일결사는 호국불교적인 입장에서 시작됐다.”며 “그 뒤 1908년 일제강점기 때 금암 의훈 스님이 5차 결사를 진행했다. 이는 바로 염불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염불수행이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고, 화합·소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염불이 ‘화쟁(和諍)’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이다.
또 염불은 정견(正見)에 이르게 하는 가장 쉬운 길이며, 염불만큼 대중적인 수행방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용수보살(150?~250?)은 염불을 이행도(易行道, 아미타불의 타력본원에 의지해 수행하기 쉽고, 깨닫는 경지에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라고 했고, 원효대사(617∼686)도 마지막에는 염불을 항상 강조했다.”면서 “옛날에는 사찰마다 염불당이 있었는데 요즘은 없어진 것 같아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불교계, 국가 현안에 목소리 내야
안 이사장은 불교단체에서 활동했지만, 타 종교단체 및 사회단체에서도 활동한 경험이 풍부하다. 그는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불교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사부대중’인데 늘 비구스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점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조계종 법률자문을 맡고 있던 2003년 어느 날,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법장 스님이 점심 공양을 함께 하자고 했다. 법장 스님은 안 이사장에게 건의사항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문화부장은 비구니스님으로, 재무부장은 재가자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건의했다. 말로만 사부대중공동체라고 하지 말고, 인사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반영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이 의견은 실제 종무회의에 올라갔는데,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는 후문을 들었다. 특히 재무부장직을 재가불자가 맡겨야 한다는 의견에는 모든 스님이 반대했다. 그 후 비구니스님이 문화부장을 맡게 됐고, 현재 재무부장직도 맡고 있지만 재가자의 참여는 아직도 요원한 상황이다.
“원래 불교는 사부대중인데 조계종 집행부를 보면 최근에 비구니스님 자리가 생겼을 뿐, 재가자의 자리는 아직까지도 전무한 실정입니다. 공인회계사나 세무사 등 재가전문가들이 종단 실무를 맡고, 스님들이 문화·복지·수행에 전념한다면 불교 발전이 보다 빨리 이뤄지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웃 종교와의 대화와 세계적·국가적 현안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불교도 홍보되고, 궁극적으로 포교에도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안 이사장은 그동안 꾸준한 법조계 활동을 바탕으로 2012년 재야법조계의 가장 큰 상인 ‘명덕상’을, 2017년 조계종 법률고문을 지낸 공로로 ‘조계종 불자대상’을 수상했다. 또 회장을 맡고 있는 전국염불만일회가 2015년 대원상 재가부문 단체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인생을 돌아볼 때 후회는 없다. 다만 더 많이 베풀지 못하고, 불교적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점이 아쉬움”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꼭 수행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도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불교공부를 권하는 그는 현재 맡고 있는 전국염불만일회장과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직을 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며 살겠노라 말하는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