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품 실은 오토바이 ‘쌩쌩’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외친
전태일 열사 현수막 나부껴

골목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흔적이 서려있다. 서울 창신동(昌信洞)도 예외가 아니다. 창신동 봉제골목은 낙산 아래 미로처럼 길게 형성돼 있다. 봉제골목 인근에는 노후된 주택들이 늘어서 일명 ‘달동네’로 불리는 쪽방촌이 형성돼 있다.

창신동은 수차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옛 풍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경사진 지형 △문화재 앙각제도(仰角制度, 문화재 인근 건축물 높이 제한) △높은 주거밀도 등의 난제가 산적했고, 삶의 터전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주민들의 반대로 결국 재개발은 무산됐다. 현재 창신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노후한 마을정비를 준비하고 있다.

낙산 기슭 도시 빈민 보금자리

동대문 밖을 나오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마을이 ‘창신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인창방과 숭신방 일부에 속했는데, 1914년에 시행한 동명 제정 때 한 글자씩을 따서 지금의 이름을 만들었다. 조선 후기부터 성 안팎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창신동에 사람들이 몰렸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27부터 1938년까지 실시한 경성부 가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창신동의 조선인 가구는 1,534세대였다. 도화동·현저동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다.(경성상업회의소, 〈통계연보〉 1927~1938) 주로 일본인에 의해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거나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리며 이곳에 거주지를 형성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재민(戰災民)·월남동포 등이 터전을 잡으면서 불량주택·토막집·판잣집 등이 즐비했다.

한국전쟁 직후 청계천 일대는 의류도매업체가 다수 들어서면서 봉제산업이 발달했다. 1955년에는 내수 의류 중 60%가 이곳에서 생산됐다.(대한방직협회, 〈섬유연보〉) 1961년 평화시장이 세워졌고, 화학섬유 생산으로 의류산업이 더욱 발달하면서 내수 기성복 물량의 70%를 이곳에서 소화했다.(조영래, 〈전태일 평전〉) 자연스레 봉제 노동자들은 가깝고 주거비가 저렴한 창신동으로 모이게 됐다.

1970년대 후반에는 청계천 인근의 봉제공장들이 창신동 일대로 이전했다. 창신동이 동대문의류시장의 배후생산지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거주지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다세대주택의 지하와 1층은 공장, 2층부터는 주거지 형태의 건물이 들어섰다. 이러한 특성은 현재까지 남아 이 지역의 공장과 주거지는 외관상 구별하기 어렵다.

봉제골목에 위치한 ‘수진 어패럴’의 내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쉼 없이 돌아가는 미싱 소리가 요란하다

스팀 연기 사이로 오토바이 내달려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12월 말, 창신동 골목을 걸었다. 동대문역 1번 출구를 나서자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짐을 잔뜩 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오토바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게들 사이로 보이는 ‘시다’·‘마이깡’·‘패턴’ 등 생소한 용어들이 이곳이 ‘봉제골목’임을 알린다.

코로나19로 세상은 고요하건만 건물 안에는 평화시장·동대문패션타운 등으로 보낼 물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많은 사람에 비해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토바이와 재봉틀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수구에서는 스팀다리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창신동이 동대문의류시장의 배후생산지 기능을 맡으면서 오토바이 배달도 성행했다.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가 골목을 내달리고 있다

창신동 골목은 길고 복잡하지만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창신2동 135­2번지와 창신1동 226­18번지 사이 고개를 당고개[堂峴]라고 부르는데, 당고개길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공장·일반가게·다세대주택이 많고, 위쪽은 쪽방으로 형성된 주거지들이 군집 형태로 모여 있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는데, 봉제골목 입구에서 비교적 넓은 골목길을 조금 오르면 ‘전태일재단’(종로구 창신길 39-10)이 나온다. 전태일 열사(1948~1970)의 희생을 기리고, 노동운동 과정에서 탄압받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1985년도에 개관했다. 창신동의 역사가 봉제산업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다 보니, 재단사였던 전태일을 기리는 재단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건물 외벽에 걸린 현수막에 전태일 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동료들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영세한 공장은 2평 남짓한 공간에서 13명이 일하는 곳도 있었다. 10대 중반의 소녀들은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하루 14시간을 일했다. 환기가 되지 않아 폐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보다 못한 전태일은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조합 ‘바보회’를 창립했다. 이 사실이 사업주들에게 알려지면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다시 평화시장에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해 노동환경 개선을 주장했다.

숱한 노력에도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될 상황에 처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는 그날 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1929~2011)에게 자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에 따라 평생을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보노라니 그의 간절한 외침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전태일재단은 전태일 열사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전태일노동인권해설사’를 양성하고, 전태일 노동상·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곳곳은 도시재정비를 위해 간판을 칠하는 사람과 건물을 공사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그 사이로 원부자재를 실은 오토바이들이 바삐 내달렸다. 봉제골목에서 생산된 제품을 동대문에 빠르게 전달하는 게 오토바이의 중요 역할이다.

간판도 내걸지 않은 재단·재봉작업장 안팎에 원단과 옷이 든 봉지가 쌓여있다. 천천히 걷다보니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종로구 창신4가길 26)이 나왔다. 이곳에서는 한국 봉제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창신동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 잡았다. 필자는 총 세 차례 이곳을 방문했는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되면서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음피움봉제역사관의 이름에는 실과 바늘이 천을 이어 옷을 만들 듯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소통과 공감을 피워낸다는 의미가 담겼다. 왼쪽부터 역사관 전경, 2층 봉제역사실 내부, 기획전 ‘서완석 명장전’.

빈 채석장 위 판잣집·천막집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절개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절개지는 ‘채석장전망대’(종로구 낙산5길 51)를 지칭한다. 그런데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낙산 자락에 자리한 동네임을 과시하듯 가파른 경사를 따라 빌라와 주택이 첩첩이 있었다. 굽은 길을 곡예하듯 오르내리는 오토바이를 피해 언덕을 천천히 올라갔다. 숨이 차오를 때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가파른 경사에 정신이 아뜩해졌지만, 올라가면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가다보니 ‘축대마을’이 나왔다. 돌산의 경사에 적응하고자 바닥에 축대를 쌓아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2~3층 높이로 집을 지었다. 지형에 맞춰 터전을 가꾼 주민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잠시 땀을 식힌 뒤 전망대로 가는 마지막 길을 올라갔다. 과거에는 시멘트로 만든 길이었는데, 급경사에 길이 미끄러워 다치는 사람이 많아지자 시에서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길을 건너면 창신동의 명물인 산마루 놀이터와 채석장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낙산의 지반은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열과 화학반응에 강하고 단단해서 건축자재로 많이 사용된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는 경성에 식민통치의 기반을 다지고자 조선은행(1912년)·경성역(1925년)·경성부청(1926년)·조선총독부(1926년) 등 대형 석조건물을 세웠다. 이때 동대문 바로 앞이라는 최적의 입지조건 탓에 1924년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지정됐다.

1969년 돌산 일대의 낙산아파트 공사 모습. 서울시는 1969년 3월 이 구역의 무허가 주택 등을 헐고 아파트를 건설했지만, 안전·경관 등의 문제로 1998년에 철거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이후 1961년 서울시가 직영 채석장을 면목동으로 이전하면서 채석장이 비워졌는데, 그 사이에 사람들은 절개면을 따라 불량주택·판잣집·천막집·토막집 등을 세웠다. 서울시는 시영아파트와 경찰서 등을 지어 마을을 재정비하려 하고 있지만, 이곳은 아직도 천막집과 노후주택이 도심 속 절벽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2011년 축대마을 전경. 돌산의 경사지에 적응하고자 수십미터의 절벽 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3층으로 지은 집들이 지형선을 따라 배치됐다. 이 지역에 지어진 다가구·다세대주택은 여전히 창신동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서민 마음 다독여주던 안양암

내려갈 때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골목길 ‘회오리 골목’을 지났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급경사인데, 길이 좁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불규칙적으로 세워진 담벼락을 따라 뻗어있는 길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줬다. 생각지 못한 곳에 문이 달려있기도 했고, 막다른 길을 만나기 일쑤였지만 길을 개척하는 모험가가 된 느낌은 즐거움을 안겨줬다.

미로에서 나오면 당고개길이다. 길 중간쯤 서있는 구멍가게인 ‘미니대광슈퍼’의 오래된 간판과 빛바랜 글씨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당고개길에는 가수 故 김광석 씨가 16년간 살았던 집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과 같은 명곡을 만들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거주하는데, ‘국가유공자 김수영의 집’(김광석의 아버지)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어 그가 살았던 곳임을 알려준다.

당고개길은 조선 후기 낙산 전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점술가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길 중간에 위치한 미니대광슈퍼 앞으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있다.
故 김광석 씨가 16년간 살았던 집. 현재 그의 아버지 故 김수영 씨의 문패가 남아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재를 간직한 ‘안양암’(安養庵, 종로구 창신5길 61)이 나온다. 안양암 일주문 뒤에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와 그 위로 겹겹이 쌓인 주택의 모습이 독특한 경관을 자아낸다. 안양암은 현재 한국미술박물관의 별관으로 지정돼 있다. 1889년 성월(性月) 스님이 창건했는데, 조선 말기 조성한 전각·불화·불상·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사찰 전체가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성보는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장소에 소장돼 있지만, 화강암 바위의 한쪽 면을 얇게 양각한 마애관음보살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2호)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다. 이 관음보살님은 130여 년 동안 창신동 일대의 변천을 지켜보면서 찾아오는 불자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셨으리라.

대웅전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매끄러운 화강암 바위 위에서 창신동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건물이나 전깃줄이 없는 뻥 뚫린 풍경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사진기로 담아보지만, 눈으로 바라본 풍경이 모두 담기지 않아 아쉬웠다.

안양암 골목을 빠져나오면 창신초등학교(종로구 지봉로 73)다. 과거 원흥사(元興寺)가 있던 자리다. 원흥사는 1902년(광무 6년) 대한제국 황실의 보제사(普濟寺)이자, 사찰을 총괄하는 총본산으로 창건됐다. 1906년 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했지만,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해 폐지된 곳이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들어서 담벼락에 붙은 푯말이 원흥사 터였음을 알려준다.

세 차례 창신동을 방문하면서 복잡하고 깊은 골목에 몇 차례 길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원고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창신동에는 백남준기념관·비우당·동묘시장·박수근 생가터 등 다양한 볼거리가 더 있다. 

안양암 전경. 한국미술관의 별관으로 지정된 안양암은 사찰 전체가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양암을 둘러싼 거대한 화강암 바위 위로 주택이 정연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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