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갈등 사라지려면
‘다름’ 이해하려는 노력 우선돼야”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난 1세대 불문학자가 있다. 민희식(閔憙植, 87) 박사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박사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한 최고문화훈장 수상자이기도 하다. 60여 년 동안 불교사상을 통해 서양철학을 분석하는 학문적 성과를 올린 민 박사를 만나 그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민희식 박사는 대표작인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비롯해 〈프랑스문학사〉·〈불교와 서구사상〉·〈성서의 뿌리〉·〈성경 속의 성(性)〉·〈어린왕자의 심층분석〉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현대불문학사〉·〈예술론〉·〈불시집〉·〈보바리 부인〉 등 프랑스 작품을 번역했다. 또 〈한국시집〉·〈춘향전〉·〈별주부전〉·〈한국민화집〉·〈박경리의 토지〉 등 우리나라 대표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저서·번역서를 모두 더하면 출간한 책이 250권을 넘는다. 그는 연세대·성균관대·이화여대·한양대 등에서 교수로 봉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쓴 교육자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 염불로 인민군에 풀려나

민희식 박사는 1934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아버지인 故 민영성 원장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회 졸업생으로 120명의 졸업생 중 단 6명에 불과했던 조선인 중 한 명이었다.

부친은 평소 자녀들에게 “사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다 너희들만큼은 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며 “오늘 10분 공부하는 것은 10년을 가고, 평생을 그렇게 하면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말을 배울 때부터 외우게 한 세 가지 인생철학이 있는데 ‘만인평등주의’, ‘범인사상’, ‘자조정신’이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에게 본인의 인생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유엔(UN)헌장의 한 구절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Man is born equal by nature)’를 적어 목에 걸고 외우게 했어요. 그리고 종종 ‘인간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갑자기 물으셨죠. 그때 ‘Man is born~’ 하고 바로 읊어야지, 안 그러면 야단을 맞곤 했어요. 우리 남매들은 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개인과 국가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걸 체득(體得)했어요.”

민 박사의 어머니는 사범대학을 나와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어머니 또한 확고한 교육관과 뜨거운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자녀들이 100점을 못 맞으면 회초리를 들었는데, 훗날 아들은 모두 경기고-서울대를, 딸은 모두 경기여고-이화여대를 보냈다. 그런 어머니의 철칙은 하루에 한 끼, 저녁은 꼭 가족이 다 같이 모여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가족 중에는 외할머니가 신심 돈독한 불자였다. 민 박사는 어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절에 가곤 했다.

민희식 박사(왼쪽에서 세 번째)는 1934년 1월 7일 4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막내동생을 제외한 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

“네다섯 살 무렵 불심 깊은 외할머니가 저를 등에 업고 절에 가셨어요. 주로 사직공원 안에 있는 절에 갔는데, 당시 일제가 사직단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세웠던 사찰이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곳은 사찰이 아니라 일본식 신사였죠. 아무튼, 외할머니가 등에 업힌 저에게 ‘부처님’·‘지옥’·‘인연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수없이 해주셨어요.”

민희식 박사가 결정적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건 한국전쟁 때였다. 1950년 9월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기 직전의 일이다. 가족과 떨어진 열여섯 살의 민 박사는 인민군에게 붙들려 미아리에 있는 한 가옥에 갇히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인민군에게 아들을 돌려달라고 통사정을 하다가 결국 쫓겨났다. 어머니는 자식과 생이별하는 순간, 아들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 외우라고 말했다.

두려움에 떨던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계속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되뇌었다. 이후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선잠이 들었을 때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준 후 사라졌다. 기도 덕분일까? 다행히 9월 28일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학 중 불경과 성경 함께 공부

민희식 박사는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모교인 경기고에 복학했는데, 몇 개월 후 졸업을 맞으며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이하 불문과)에 입학했다. 불문과에 입학한 이유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어로 공부를 했다. 광복 후 중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영어와 함께 한글을 익혔다. 그는 겨우 익힌 한글로 〈장발장〉·〈루팡〉 등 불란서 문학을 접했다. 그때 본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불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또 〈부처님 생애〉 등 어린이용 불교서적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도 갖게 됐다.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은 했지만 광복과 뒤이은 전쟁의 여파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는 힘들었다. 당시는 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초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 하루아침에 교수가 되던 시절이었다. 강의는 대부분 휴강이었는데, 교수와 학생이 함께 불문학을 배우는 셈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도 그는 독학으로 불어를 공부했다.

“당시 이화여대는 불어가 교양과목이었는데 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졸업을 못했어요. 그런데 놀기에 바빴던 몇몇 여대생들이 불어 공부를 손놓고 있다가 4학년이 되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제가 1학년 때 지도교수가 제 실력을 보고는 당신이 아는 이화여대생의 불어 과외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여러 명을 졸업시켰어요. 남을 가르치면서 제 불어 실력도 일취월장했던 것 같아요.”

민희식 박사(왼쪽 끝)가 1970년대 후반 윤천주 서울대 총장(가운데 안경 쓴 인물)을 찾은 프랑스 시인 외젠 이오네스코(윤 총장 오른쪽)의 통역을 하고 있다.

민희식 박사는 1957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두 곳에서 생도를 대상으로 불어를 강의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민 박사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불어 교관을 했고, 이듬해 해군사관학교 불어 강사를 맡아 생도들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공군에서 불어 교관으로 활동했던 2년을 군복무로 인정해줘 1959년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중위로 전역했다. 그해 말, 민 박사는 프랑스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돼 5년 동안 소르본대학교(Sorbonne University), 스트라스부르대학교(University of Strasbourg) 등에서 수학하며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민 박사는 프랑스에 가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6인승 비행기를 탔는데, 일본을 비롯해 홍콩·태국·필리핀 등을 거쳐 4일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부류는 세 부류였다. 첫 번째 돈을 쓰려고 가는 사람, 두 번째 장학금을 받아서 겨우 공부하는 사람, 세 번째 가난한데 그냥 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는 사람이다. 그는 두 번째 부류에 해당된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학교 등록금과 방값을 내는 데 사용했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는 책을 샀다. 힘든 상황에서도 소르본 대학 도서관과 파리국립도서관을 누비며 동양문화를 공부했다. 동네 미용원에서 틈틈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해 마련한 돈으로 박물관이나 공연을 관람하면서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1961년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외국인교수 자격을 얻었으며, 1963년 동 대학 유럽문제연구소시험에 합격했다. 1964년에는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프랑스 작가인 ‘플로베르의 성격과 작품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민 박사는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불어로 번역된 불경(佛經)과 성경 공부에 심취했다.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한 이유는 당시 미쉘 위똘이라는 교수가 현대불문학 강의를 하면서 “전공 공부를 할 땐 항상 다른 공부도 같이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아침 경서(經書)를 정독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데 아침마다 성경을 읽었지만 갈수록 늘어가는 의문에 쉽게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쓰게 됐다. 당시 유네스코 측에서 참고서적으로 동양문고총서를 건네주었는데 인도·중국 등 동양 각국의 철학·문화 관련 서적 25권이었다. 그중에 〈법화경〉이 있었다. 민 박사는 “성경은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해 〈법화경〉은 이해하기가 쉬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법화경〉과 성경을 비교하며 읽던 중 일치하는 부분이 80~90%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는 그때부터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종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990년경 양산 통도사를 찾은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기우(가운데)와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왼쪽)과 함께 한 민희식 박사.

마라난타 스님 고향, 이동경로 밝혀

민희식 박사는 1965년, 5년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뒤 외무부 외교연구원에서 불어강사를 시작으로 1966년부터 연세대·이화여대 강사, 성균관대 부교수 등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이화여대 외국어교육과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 계명대 외국어대학 프랑스과 교수를 거쳐 1981년 한양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서울대 출신인 그는 정작 모교의 강단에는 서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북한에서 불어사전 제의를 받은 이력 때문이었다.

“귀국 1년 전인 1964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홍명희(1888~1968) 부위원장이 저한테 불어사전 편찬 제의를 했어요. 불어사전을 만들 때는 라틴어를 알아야 하는데, 제가 라틴어를 할 수 있었어요. 당시 북한에는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나 봐요. 결과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소위 ‘빨갱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또 프랑스 잡지 〈르몽드지〉의 기사를 번역했는데 제 기억으로는 ‘일본에서 돈을 받아야 (그 돈으로) 한국이 잘 산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걸 잘못 이해해서 제가 일본 편을 든다고 생각했나 봐요. 두 가지 사건으로 보수적인 서울대학교에서 저를 안 좋게 본 거죠. 어쩌면 제 실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있었을 거예요.”

민희식 박사는 귀국 후 불경과 성경의 공통점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학계와 종교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오히려 모두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일부 종교인들은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를 계속했다. 1986년 펴낸 그의 대표작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출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법화경〉을 역해(譯解)해 신약성서의 뿌리가 된 부분들을 찾아 제시했다. 또 부처와 예수의 닮은 점을 살폈다. 이 책은 유럽의 성서학자는 물론 국내 학계와 종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 박사는 이후 기독교인으로부터 “죽여 버리겠다.”는 살해협박도 많이 받았다. 특히 〈법화경과 신약성서〉와 2008년 출간한 〈성서의 뿌리〉는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귀에 거슬리는 내용이 많았던 모양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수년 간 이 책들을 수거하고, 파기·처분했다.

민희식 박사는 불경과 성경 이외에도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간다라 지역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2008년경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파키스탄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에게 동서양 문화교차의 중심지였던 간다라·스와트·탁트히바이·라호르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재 발굴 및 연구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는 페샤와르 국립박물관(Peshawar Museum) 등 5개 박물관과 함께 고고학 연구 활동을 펼쳤다. 또 프랑스·이스라엘 정부 초빙으로 양국 고고학발굴단을 이끌고 이스라엘·터키·이집트 등에서 발굴 및 연구조사도 진행했다.

1970년경 정일권 국무총리(가운데)와 프랑스 정부 관계자의 환담에서 민희식 박사가 통역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연구활동을 통해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의 고향과 이동경로를 밝혔냈다. 이에 따르면 마라난타의 고향은 현재 파키스탄 쵸타 라호르 마을이고, 스님은 페사발-스와트-길기트-훈자를 거쳐 키르기스스탄의 톈산산맥을 넘어 구자국(현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지구)에서 수행을 했고, 둔황을 거쳐 중국 동진에 이르렀다. 다시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법성포에 도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법성포를 도래지로 지목한 것은 ‘아무포’·‘부용포’란 불교적 지명과 함께 스님이 가져왔다고 전하는 불두와 매향비(埋香碑) 때문이다.

“마라난타 연구를 위해 일곱 차례에 걸쳐 파키스탄 현지를 답사했습니다. 문헌 조사와 도서 구입을 위해 일본도 세 번 방문했고, 프랑스와 중국도 다녀왔어요. 또 파키스탄 정부의 의뢰를 받아 관련 서적도 3권을 썼습니다. BBS불교방송에서도 1년간 간다라 미술을 주제로 강의를 했지요.”

민희식 박사는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공로로 1985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상은 프랑스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1959년 한국인 최초로 노기남(1902~1984) 가톨릭 주교가 받은 이후 두 번째다. 1983년에는 발자크 원작 〈환멸〉로 국제 PEN 번역문학상도 수상했다.

각 종교 가르침 모은 책 만들고파

학술연구 목적으로 사찰은 물론 교회·성당·이슬람 모임도 가봤다는 민 박사는 종교마다 각각의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불경이나 성경·코란 등 각 종교의 좋은 이야기만 모아 책을 만들고, 전 세계인이 그 책을 읽는다면 종교의 갈등은 사라지고 다함께 화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가 진정한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는 개방적인 자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인류가 종교로 인한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이 같은 방법이 선행돼야 한다고 확신한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불교·기독교·이슬람 등 각 종교의 경전에 나와 있는 좋은 말을 엮어 발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 예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기에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이슬람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이전에 현지인들이 믿어온 종교를 공부하고 난 후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종교를 알아가다 보면 모든 종교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강의를 갔을 때,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말이 있었어요. ‘먹을 것만 주지 말고 자신들의 친구가 돼 달라.’는 거였죠.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말이고, 자신들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달라는 뜻이었죠.”

최근 한 기독교인이 ‘신의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남양주 소재 수진사 전각을 방화해 전소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IS)은 종교적 견해차를 이유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테러를 자행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원로학자의 종교에 대한 풍부한 식견(識見)은 다름을 이해하지 않은 채 종교 갈등에 빠져 있는 세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민희식 박사.〈사진=문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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