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연재
한승원의 그땐그랬지12_인민군 그리고 빨치산
  • 글·한승원 삽화·전병준
  • 승인 2020.11.17 16:49
  • 댓글 0

해가 서산 위에 걸리고, 산그늘이 내렸을 때 인민군이 한재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왔다. ‘욈소리쟁이’가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높은 목청으로 외쳤다. “인민위원회 회의가 있으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거무스레한 그늘이 드리워진 사장 마당에 마을사람들이 모였다. 아버지는 흰 바지와 맨 저고리 차림으로 마을사람 속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있었다. 아버지와 더불어 반동자로 지목된 남자들도 보였다. 여섯 마지기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 이장이나 어협조합 총대를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다 반동자로 몰렸다고 이웃집 기호가 귀띔했다. 반동자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 땅만 보고 있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어머니도 마을 아낙들 속에 끼어 있었다. 인민군 열 명이 총을 든 채 마을사람들을 에워싸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깨에 붉은 별을 붙인 장교가 팽나무 밑의 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이제 조선반도는 인민공화국의 세상이 되었다고, 위대한 항일 독립영웅이자 인민의 영도자이신 김일성 원수의 명을 받들어 여러분을 고루 편하게 살도록 보살펴줄 것이니 불안해하지 말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며 살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아이들도 모두 나와 뒤쪽에 앉아 듣고 있었다. 나도 그들 속에 있었다.

형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형은 머리에 흰 수건을 동이고 집에 있었다. 마루에는 약탕기 얹힌 화로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형에게 약도 먹이지만, 까치참외개구리를 고아 먹이기도 했다. 들판과 개울에서 그것을 잡아오는 것은 나의 세 살 아래 동생이었다.

세상은 변해 있었다. 동네에서 전혀 존재감이 없던 남자와 여자 몇몇이 붉은 별이 그려진 완장과 칼을 차고 있었다. 병술이 대장 아이에게 누구는 인민위원장, 누구는 세포위원장, 누구는 여성동맹위원장, 누구누구는 세포위원이라고 속삭였다.

순이는 하얀 저고리에 검정통치마를 입고, 붉은 별 그려진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인민위원장은 윗 골목의 김장수이고, 세포위원장은 그의 사촌동생 김종연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전처(큰누님의 생모)의 친정 대소가(大小家) 사람들이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친해지려고 인사말을 건네도 늘 코대답만 한다던 그들이었다. 큰누님의 생모는 진즉에 관산 동천의 한 남자에게 개가했고, 친정도 관산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나는 뒤늦게, 내가 보안서에 쌀을 짊어져다주러 간 사이에 순이가 여성동맹위원들을 이끌고 우리 집에 다녀간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순이의 요구에 따라 곡간에 있는 쌀 한 가마니와 무명베 세 필을 내주었다고 했다.

다음 날 순이는 여성동맹위원들을 이끌고 동네에서 수집한 무명베 열두 필을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와서 쑥물을 들였다. 논둑밭둑에서 베어온 쑥을 찧어 푸른 물을 낸 다음 무슨 약물인가를 넣어 염색을 했다. 마당에는 새끼줄을 치고 쑥물 들인 무명베를 치렁치렁 걸쳐 널었다. 염색을 주도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일을 했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어수선하게 들썽거리는 서슬에, 병술이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염색한 무명베로 세포위원들의 옷과 유격대원들의 옷을 지을 거라고 아는 체했다.

교통호 파기 울력

회진과 진목과 삭금마을 일대의 해변 언덕에, 방어를 위한 교통호 파기 울력이 시작되었다. 나도 괭이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 바 있는 아제가 우리 집에 들러 나를 데리고 앞장서 갔다. 그는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대했지만, 나는 떨떠름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어머니는 곡두새벽에 쌀 몇 됫박을 들고 그의 집에 가서 어린 나를 울력에 데리고 다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힘들겄지만 우리 애 잘 좀 데리고 다녀주시오.” 아제는 우리 집 사립 안으로 들어와 나를 앞장세우고 나서면서 어머니에게 염려 마시라고 했다. 방안에 계시는 아버지는 내다보지도 않았다.

울력에는 마을 모든 집의 어른 한 사람씩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욈소리쟁이’가 외쳐댔다. 그것은 인민위원회의 지시였다. 아버지는 그 지시를 어기고 열두 살인 나를 내보냈다. 우리 마을 두레[鄕約]에는 열다섯 살은 어른으로 인정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형은 울력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형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마을 울력꾼들은 한재고개를 넘어가다가 재 꼭대기에서 앉아 쉬었다. 이웃 갯마을 울력꾼도 함께 가고 있었다. 울력꾼 중에 몇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중구난방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허허, 간밤에 깐 잔털 뿌연 새끼를 울력 내보내는 집구석도 있네!”, “너, 뉘 집 새끼냐?”

아제가 나를 변호하고 나섰다. “시방 먼 소리를 하고 있어? 이 아이 올해 열다섯 살이라고! 시방 장가를 가도 각시 넉넉하게 거천(擧薦)할 수 있는 총각이라고!”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나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는 이웃집 기호네 형 기철이도 있었고, 내가 열두 살임을 잘 아는 동네 어른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아제에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철이 아제를 편들어주었다.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가고 참새는 작아도 알만 잘 낳는 법이여.”

갯마을의 호리호리한 청년이 나를 향해 빈정거렸다. “니 애비는 대낮에 감재 찌느라고 너를 내보내는 모양이다!” 나는 얼굴이 화끈했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감재 찐다.’는 말은 성행위를 뜻함을 알고 있었다.

그때 재를 넘어오는 학생들의 군가소리가 들려왔다. “백두산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그들은 책보자기를 어깨에 걸치고, 손에 자그마한 인공기 한 개씩을 들고 흔들었는데, 어깨에는 별이 그려진 완장이 둘러 있었다. 학교에 가는 덕산마을 아이들이었다.

인민군 장교

울력꾼들은 보안서 앞을 지나 진목리 쪽으로 갔다. 나는 아제 뒤를 따라 그들 속에 끼어갔다. 진목리와 삭금리가 갈리는 길목 옆의 풀 무성한 밭둑에 인민군 두 명이 걸터앉아 있었다. 한 명은 권총을 찬 장교였고, 다른 한 명은 장총을 어깨에 걸친 사병이었다. 그들의 계급장과 모자의 붉은 별 장식과 견장과 휘장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붉은 완장 찬 면 당원이 울력꾼들을 바다 쪽의 경사진 밭 언덕에 띄엄띄엄 한 줄로 배치하고 있었다. 아제를 따라 그 밭둑으로 올라서려 하는데 인민군 장교가 나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꼬마 동무!” 아제가 그들에게 물었다. “이 아이 말이요?” 장교가 “이리 오라우!”하고 말했다. 아제가 내 등을 밀어주었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 채 장교에게로 걸어갔다. 나와 장교를 번갈아 보느라 멈칫해 있는 울력꾼들을 향해 면 당원이 빨리 밭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밭에는 콩잎사귀들이 파랗게 어우러져 있는데 키 큰 수숫대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장교는 자기 옆의 풀밭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고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장교가 빙긋 웃고 나의 머리를 쓸어주고 말을 걸었다. “학교엔 왜 아니 가구서리?”

나는 두려웠다. 장교가 오늘 나의 울력을 무효로 만들려는 건 아닐까. 면 당원이 그 사실을 우리 마을 인민위원장에게 알릴 것이고, 인민위원장은 우리 아버지에게 자격 없는 아이를 보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장교가 말없이 내 머리를 다시 쓸어주고 나서, 작달막한 면 당원을 불러 앞으로 팔 교통호의 위치를 지시했다. 나는 장교 옆에 앉은 채 콩밭을 교통호로 만드는 울력꾼 속에서 아제를 찾아냈다. 삽질하던 아제가, 장교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나를 향해 손을 쳤다. 자기 옆으로 얼른 오라는 것이었다.

장교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와 함께 교통호가 완성되고 있는 이회진 쪽으로 가버렸을 때 나는 아제 옆으로 가서 울력을 했다. 7월의 해는 머리 위에서 쨍쨍 불볕을 쏘아대고 있었다. 무더웠고, 배가 고팠지만 참아야 했다. 도시락을 지참하고 온 사람은 없었다. 면 당원은 울력꾼들에게 점심 먹을 시간을 주지도 않았다. 밭둑에 물 한 동이가 놓여 있었다. 진목리의 여성동맹위원회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울력꾼들은 물동이 옆으로 가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들이켰다. 아제도 물을 마시고 왔고, 옆의 젊은이도 마시고 왔다. 아제가 너도 마시고 오라고 말해 나는 고픈 배가 불룩해지도록 마셨다.

보안서에서 흘러나온 비명

해가 서편 산마루에 걸렸을 때, 면 당원이 다음날 다시 와서 자기 책임구역을 완성하라고 명했다. 아제를 따라 회진부두를 향해 뛰었다. 괭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배가 고픈 데다 땅 파는 노동으로 지쳐 있었지만 뒤쳐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보안서 앞을 지나는데, 남자의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쳐 문초하는 남자의 소리도 들렸다. 출입문 앞에는 붉은 완장 찬 청년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나룻머리로 가는 울력꾼들이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와아, 젊은 보안서원 하나가 무릎 꿇은 남자를 장작쪽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더라.”, “그놈이 친일 반동자이겄지,”, “전에는 좌익들을 순경들이 두들겨팼는디…….”

나는 가슴이 떨렸다. 남자를 장작쪽으로 두들겨 팬 사람이 혹시 매형이 아닐까? 아니 당숙일지도 모른다, 제발 그들이 그런 독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누군가 우리 아버지를 끌어다 그렇게 두들겨 패면 어떻게 할까?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두들겨 맞을 만큼 무슨 죄를 지었을까? 매형과 당숙이 보안서에 들어있는데 설마 누가 아버지를 끌고 갈까?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서쪽하늘에 새빨간 노을이 타올랐다. 노을빛을 보는 순간 핏빛이 생각났고, 보안서 앞을 지날 때 들리던 비명소리가 내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교통호 파기 울력은 한 달 가까이 진행되었다. 낮에 폭격기가 날아다니자, 밤에 울력을 했다. 회진 일대의 해안방어 교통호는 9월 초순에 완성되었다. 한재 고개에서 숲 사이로 건너다보면, 회진과 진목리와 이회진의 해변 산기슭이 불그죽죽한 교통호로 띠처럼 둘려 있었다.

반동자의 재산 몰수

땔나무를 하러온 기호가 무서운 정보 하나를 말해주었다.

“우리 동네 반동자들이 모두 여섯인데, 인민위원회에서 반동자들 논밭을 다 몰수해서 가난한 집에 고루 나누어주었단다. 우리 집은 논 두 마지기, 밭 서 마지기를 받았다. 인제 우리 동네는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지 않고 다 똑같이 살게 되었어야. 이것이 조선 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란다. 느네집 논밭도 다 다른 사람들한테 나누어주었다고 하더라. 우리가 차지하게 된 논이 혹시 느네 논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투에 참가하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기는 한데, 면당과 마을의 인민위원회와 세포위원회와 여성동맹위원회와 조선 학생동맹원들은 날마다 씩씩하게 공산당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조급해졌다. 얼른 집에 가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재산 몰수와 분배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앞으로 논밭을 다 뺏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보안서원인 매형과 당숙은 우리가 논밭을 몰수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않고 뭘하고 있을까? 보안서는 마을의 인민위원회보다 더 센 권력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서쪽하늘에 노을이 붉게 타오를 때 나는 소의 엉덩이를 고삐로 힘껏 내려쳐 몰면서 집으로 갔다. 마당으로 들어서서 어머니에게 인민위원회가 실행하는 재산몰수 분배 사실을 말하려는데, 집안은 그 말을 뱉어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집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 있었다.

노숙(露宿)

사립 앞에서 발을 구르며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작은 누님이 지청구했다. “이 소가지 없는 것아! 어째 이렇게 늦게 오냐.”

집안은 조용했다. 할아버지 방에만 석유등잔불이 가물거릴 뿐 다른 방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소를 외양간에 매고 나니, 작은 누님은 나를 어둠에 잠긴 부엌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얼른 밥 묵어라.” 퉁명스러움과 애옥함이 섞인 말이었다. 부뚜막 앞에 형이 앉아 있었다. 형은 흰 머리띠를 풀어버린 채였다. 밥숟가락을 집어 드는데, 어머니가 무언가를 한 아름 보듬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겨울철에 입는 핫바지와 핫저고리였다. 형이 자기 것을 찾아 껴입었다. 알 수 없는 것은 나무청에 이불 한 채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뒤숭숭한 두려움을 어찌하지 못한 채 서둘러 밥을 먹었다.

내가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작은 누님은 나를 이끌고 뒤란의 대밭을 지나 마을 사람들이 겨울에 김 건장(乾場)으로 사용하는 가파른 계단밭둑을 하나씩 하나씩 치올라갔다. 집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작은 누님은 둘둘만 이불을 머리에 이고 갔고, 형은 핫저고리 셋을 말아들고 갔고, 나는 밀짚멍석을 어깨에 걸치고 갔다. 계단밭에는 고추와 고구마 따위가 자라고 있었다. 호박덩굴이 얽혀 있는 밭도 있었다.

왜 도망가는 것일까? 아버지는 왜 보이지 않을까? 우리가 집을 나온 뒤 어머니는 어찌하고 있을까? 문단속을 해놓고 오려는 것일까? 귀가 멀어버린 할아버지와 어린 두 동생(아홉 살짜리와 여섯 살짜리)은 사랑방 안에서 잠을 자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뒷동산 맨 꼭대기의 고추나무가 촘촘 서있는 계단밭 가장자리 한쪽에 멍석을 펴고 아랫도리를 이불 속에 묻은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찬결이 들면 핫저고리를 덧입고, 잠이 오면 등 뒤로 누워 이불을 덮고 자려는 것이었다. 가지색 하늘에는 총총한 붉은 별 푸른 별 노란 별이 수런거렸다.

마을에서 소년단의 노랫소리가 날아왔다. 나는 배우지 않았지만 ‘백두산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나도 소년단에 들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못하게 했다. ‘카츄사’노래가 이어졌고, 달이 떠오르면서 별들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을은 검은 앞산 그림자에 덮여 있고, 앞산 너머 바다에는 하얀 달빛조각들이 떠서 반짝거렸다. 달이 드높이 올라왔고, 소년단 노래는 그쳤고, 흰 달빛에 젖은 마을은 교교해졌다. 우리는 소나무 그림자 속에 들어 있었다. 왜 산기슭 계단밭에서 잠을 자야 하는지, 작은 누님이 그 까닭을 속삭여주었다.

아버지와 재종간인 용호 당숙도 반동자로 몰렸는데, 그의 동생 용남이는 세포위원이었다. 우리 동네 세포위원들은 인민군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지령한 반동자 숙청을 결행하려 하고 있었다. 대덕면 관내의 모든 마을 세포위원들이 자기네 동네의 반동자 숙청을, 이날 밤 열두시를 기해 결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세포위원인 용남은 자기 형을 살리고 싶었다. 형에게 귀띔을 하러 직접 가지 못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다. 용남의 아버지는 자기 큰아들에게 오늘밤 피하라는 말을 전하고 나서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야 용기조카야, 오늘밤에 너랑 우리 용호를 다 죽이기로 했단다, 어디로든지 피해라.”하고 알려주고 갔다. 아버지는 어둠이 짙어지자마자 겨울용 검은 오버코트를 걸치고 뒷산 숲속 어딘가로 갔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형과 작은 누님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들은 계단밭 아래쪽에 있는 우리 집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하고 귀를 쫑그리고 있었다. 나도 귀를 쫑그렸지만 미세한 귀 울음과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중천에 둥근달이 떠 있었고, 마을은 교교하기만 했다.

이튿날 곡두새벽에 우리 셋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침구와 멍석을 말아들고 집으로 돌아갔고 어머니가 지어준 아침밥을 먹었다. 그 밥은 여느 때와 달리 하얀 쌀밥이었다. 우리가 평소에 먹는 밥은 언제나 쌀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눌눌한 보리밥이었다. 하얀 쌀밥은 할아버지 밥상에서만 볼 수 있었다. 조상님 제삿날이나 누군가의 생일 아침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쌀밥이었다. 흰 쌀밥을 내놓는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버지의 부석부석한 얼굴도 침울했다.

훗날 세상이 바뀌었을 때, 어머니는 그날 아침에 왜 쌀밥을 지어 내놓았는가를 말했다. ‘우리집안에는 앞날이 있을 수 없는데, 쌀을 아껴 무얼 할 것이냐, 살아 있을 때 쌀밥 한 끼라도 식구들에게 먹이자는 생각으로 그랬더니라.’

또 얼마쯤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나는 소름 끼치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마을의 세포위원회에서는 반동자로 지목한 아버지의 동태를 세세히 살필 정보요원 한 사람 부렸다는데, 그게 누구이겠냐고 하며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의심 가는 사람의 이름을 돌아가시는 날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건 누구였을까? 나에게 산돌을 준 기호네 형이었을까? 울력 다닐 때 나를 앞장세우고 다닌 아제였을까?

또 다시 바뀐 세상

9월 하순 어느 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섬으로 퇴각했던 경찰이 돌아왔다고 했고, 조선 인민공화국의 ‘회진보안서’는 다시 대한민국의 ‘회진파출소’가 되었다. 마을회관에 펄럭거리던 인공기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태극기로 바뀌어 펄럭거렸다.

반동자로 몰렸던 중년 남자가 이장이 되었고, 마을의 ‘욈소리쟁이’는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대덕경찰지서의 토치카 쌓는 울력에 참여해 달라고 외쳤다. 빨치산의 야습에 대비한 토치카 쌓기였다. 집집마다 어른 한 사람씩이 나가 울력을 해야 했는데 이때도 아버지는 형을 감추고 열두 살의 나를 내보냈다.

대한민국 학생연맹 대덕면 지회에서 형을 데리러 왔는데, 아버지는 검은 제복에 검은 모자를 쓰고 카빈총을 어깨에 맨 두 학생에게 화로 위에 놓인 약탕기와 방안에 누워 있는 형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학생 가운데 하나는 지난 번 인공 때 학생동맹에 들었던, 형의 한 학년 선배였다.

학련(學聯)에 들면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유치 산골에 숨어든 빨치산 토벌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한 학련의 학생은 따로 사격훈련을 시켜 참여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는 형이 학련에 들게 되면, 훈련 도중 탈이 생길세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장자(長子)인 형을 위해 아버지는 차남인 나를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울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대덕경찰지서까지 시오리길(6.5km)을 걸어가 토치카 쌓은 울력에 참여했다. 이때도 아제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 초가을이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쌀랑하지만 한낮에는 무더위가 남아 있었다. 울력꾼 틈에 끼어 한재고개를 넘어가는데, 어느 누구도 어린 내가 울력 나온 것에 대해 시비 걸지 않았다.

덕산 마을의 통학단이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맨 앞의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역적의 김일성을 때려죽이자.’는 행진곡을 불렀는데, 그 노래의 후렴은 한결같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였다. 후렴이 끝나는 순간 통학단장이 ‘역적의 스탈린’하고 외치면, 모든 학생들이 ‘역적의 스탈린을 때려죽이자, 인민공화국을 때려 부수자.’하고 노래했다.

모두가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피했다. 우리 마을에도 통학단이 조직되었는데, 아침이면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등교한다는 것을 나는 아랫집 기호에게서 듣고 있었다. 기호는 하루 전날 오후에 찾아와 “선생님이 너 데리고 오라고 하더라. 너 혼자만 결석하고 있어야.”하고 말했었다. 기호의 말을 아버지에게 전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마을 청년들이 죽이려 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거듭 바뀌고 있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다시 들어선 이승만 정부가 또다시 김일성 정부로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면소재지에 이르렀다. 우리 마을 울력꾼은 이장의 지시에 따라 대덕초등학교 옆의 마른 강바닥에서 뭉실뭉실한 돌덩이 한 개씩을 짊어지고 경찰지서로 갔다. 길옆의 대덕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학생연맹 학생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카빈총 한 자루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지휘자는 키 작달막한 학생이었다. 한 울력꾼 남자가 말했다. “저 쪼그만한 대장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장을 하던 사람인데, 숙청을 당했단다. 눈에 불을 켜고 제 아부지 원수를 갚을란다고 학생들을 훈련시킨단다.”

학생들은 훈련을 하면서 행진곡을 불렀다. 아침에 덕산 마을 통학단이 부르던 그것이었다. “학련아, 잘 싸웠다. 정의의 손으로, 역적의 공산당을 쳐들어가자. 인민공화국을 때려 부수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

대덕경찰지서는 장터 입구에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키 큰 녹색의 대로 엮은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울타리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수 없도록 촘촘히 엮여 있었다. 총알이 날아들면 미끄러운 대의 표면에 부딪쳐 비껴가도록 한 것이었다. 하늘을 향하고 있는 대의 끝은 죽창처럼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빨치산이 그 울타리를 타고 넘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그 울타리 바깥의 땅에 사람의 머리가 잠길 정도의 깊은 도랑이 패여 있고, 황토색 물이 고여 있었다. 경찰지서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울타리 문이 달려 있고, 그 안쪽에는 돌과 흙으로 쌓은 초소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는 군복에 철모를 쓰고 총을 든 경찰 두 사람이 드나드는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연재를 마치며

글을 쓰면서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oun)의 말을 실감했습니다. 편집국의 배려로 시작한 연재를 바탕 삼아 자서전을 집필해 조만간 출간 예정입니다. 독자여러분과 〈금강〉 편집국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한승원 삽화·전병준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한승원 삽화·전병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