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그리운 늙다리소
필몽 作.

우리 집 늙다리소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했는지, 언제 집을 떠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늙다리소라도 매년 새끼를 낳기 때문에 웬만하면 팔지 않았을 텐데. 아마 형제들 등록금 내는데 보태기 위해 팔았을 수도 있다.

저녁이면 마구간 횃대에는 닭이 잠을 잤고, 새벽에는 식구들을 깨웠다. 옆에 매달린 닭 둥지에서는 간간이 달걀을 꺼내기도 했다. 겨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죽을 퍼 대나무로 된 소죽통에 나르던 어린 시절 고향 집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현탁아, 소고삐 잡고 속새들 밭에 다녀오너라.”

증조할아버지는 국민학생인 내게 소를 몰고 삼촌들과 머슴이 일하는 밭으로 가 ‘소바리’를 실어오라고 말했다. 무던한 늙은 암소는 집을 나서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 밭으로 갔다. 주인이 짐을 실을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다가 일꾼들이 나에게 고삐를 잡혀주면 알아서 집까지 왔다. 집에서 아버지가 소바리를 내리면 다시 출발하는 일을 반복했다.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은 소를 겁내지 않는다. 송아지 때는 어미 소를 이용하거나 휘몰아야 말을 듣지만, 일단 코를 꿰고 나면 고분고분해진다. 물론 수소는 암소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용감한 아이들은 소등을 타기도 하나 나는 겁이 많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 농촌의 소는 주로 논밭을 갈거나 농산물을 나르는 일을 했다. 일 년에 한 마리씩 낳는 송아지를 팔아 등록금에 보태는 집안의 ‘보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소는 ‘성질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영리하다.’고 한다. 소는 과거에 다녔던 길을 기억하고, 주인장이 어디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우리 소는 ‘성질부리지 않고’, ‘아이 걸음에 맞추어’, ‘뒤따르는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고분고분하게 임무를 잘도 수행했다.

우리 집 소를 생각하면 나의 공직생활 초년병 시절 두 분 선배가 떠오른다. 열정과 기개 빼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나, 그분들이 뒤에 있기만 해도 나는 일을 알아서 헤쳐 나갔다. 돌이켜보면, 두 선배의 ‘나를 부리는 용인술’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아닐까싶다. 늑장 부린 적은 없었으나 나의 업무처리는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늙다리소가 어린 내가 겁먹지 않도록 배려했듯이 그분들은 절대로 내 기를 죽이지 않았다. 방향만 제시하고 나를 더 깊이 일에 몰입하도록 이끌었다. 따뜻하고도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품어주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밤새워 고민하고 공부했다. 나도 모르게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새로운 분야인 ‘케이블TV’와 ‘도박중독’에 관한 전문서적까지 출판하게 되었다.

소도 농사철에는 바쁘지만 다른 때는 한가하다. 농한기(農閑期)에는 들에서 일하거나, 산에서 풀을 뜯거나 동구 밖에서 되새김질하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마구간으로 돌아와 ‘소죽’을 먹었다. 늦가을이면 어른들은 작두로 볏짚·수숫잎·건초 등을 썰어 소여물을 준비했다. 추운 겨울날이면 소죽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푹 삶아서 소죽통으로 퍼 날랐다. 또 춥다고 등에는 거적을 덮어주기도 했다. 가끔 마당에서 억센 빗자루로 몸통을 쓸어주면 그렇게 시원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에게 소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요즈음의 애완동물이나 반려견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나는 사랑방에 기거했지만, 식사 때는 안채에 붙어 있는 마구간을 지나다니면서 소와 눈을 마주치곤 했다. 또 가끔 소죽을 쑤기도 했으니 소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좀 들어 낫질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방과 후 산골짝 안쪽까지 들어가 소가 풀을 뜯도록 놓아주었다. 소가 풀을 뜯어먹는 동안 나는 망태기 가득 소꼴을 베었다. 소를 몰고 산에서 내려올 때면 콧노래가 나왔다. 소는 나와의 연분에 보답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을까? 이것도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소는 보답하겠다는 생각 없이 무심하게 일했을 것이다.

영화 ‘워낭소리’에서와 같이 달구지를 끌거나, 비탈진 밭을 가는 풍경을 더는 보기 어렵다. 이제 소가 천수를 다해 집에서 생명을 놓을 때까지 기르는 가정은 없으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농사일을 하는 할아버지도 상상할 수 없다. 웬만한 골짜기에는 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예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농업이 개방되면서 농업과 농촌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한 결과다. 그럼에도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해 계절노동자를 외국에서 데려와야 한다. 어지간한 일은 트랙터·이앙기·탈곡기 등 기계로 해결하고 있다. 농사철에 동원되던 소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산골짝 논밭을 갈고 형제들 학비까지 책임졌던 늙다리소, 덩치도 크고 우직했던 소가 눈빛을 마주친 후 고개를 흔들며 아는 체 다가올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소는 내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소로부터 우직함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고삐만 잡고 있어도 묵묵히 소임을 수행하던 늙다리소처럼, 우리 사회가 헌신과 배려라는 미덕으로 물결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늙다리소는 아침이면 집에서 키우던 소·닭·개·돼지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저녁이면 제자리를 찾아 잠자리를 살폈다. 그런 정감 어린 사회라면 살맛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직장에서 선배의 배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지난 시절이 그립다. 멘토와 멘티 같은 선후배간의 연결고리의 제도화, 서로간의 간극을 좁히려는 다양한 소통채널의 등장과 같은 노력에도 왜 사회는 더 각박해질까? 서로의 존재가 상대에게 버팀목이 된다는 생각보다는 경쟁상대로만 인식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좋고 너도 좋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 더욱 필요한 때다.

겨울의 한기가 옷깃을 스며든다. 그 옛날, 우리 집 늙다리소의 등을 쓰다듬으면 정말 따뜻했다. 서로를 따뜻하게 품어줄 그런 사람이 그립다.

황현탁 제1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을 시작해 문화관광부 홍보협력관, 국정홍보처 홍보기획국장, 주일본한국대사관 홍보공사 등을 거치며 미국·일본·영국·파키스탄 등에서 근무했다. 한국카지노업관광협회 부회장,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시간의 정원〉(공저), 〈일본 들춰보기〉,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등 다수가 있다.

글 황현탁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황현탁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