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간의 일몰.

천 년 전 쌓은 2,200여 불탑
대평원에 펼쳐진 부처님나라 

미얀마의 정식명칭은 ‘미얀마연방공화국’이다. 인구의 89%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국가로, 명성에 걸맞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찰과 불탑이 있다. 특히 중부 만달레이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 바간(Bagan)은 11~13세기에 건립된 2,200여 기의 불탑이 장엄하는 ‘불탑의 도시’다. 이 도시는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 한 곳인 바간을 연재의 마지막 순서로 소개한다.

먼동이 틀 때면 어둠을 뚫고 서서히 드러나는 대지의 기운도 약동한다. 아침안개 속에 꿈틀대는 대지의 기운은 지평선너머 아스라이 먼 곳까지 끝없이 펼쳐진 불탑들이다. 붉은 여명 속으로 솟구치는 불탑의 장관은 인간이 만들어낸 풍경이라기보다 태고(太古)부터 존재했던, 신들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일 정도다. 그 감동은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도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게 한다.

바간 왕국의 수도였던 바간 평원.

아노야타 왕, 상좌부불교 받아들여

에야와디 강(Ayeyarwady River)이 휘감아 돌며 만들어낸 삼각평원에 있는 수많은 불탑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세웠을까?

미얀마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게 전하지 않지만, 많은 종족들이 불교를 신봉하며 살아왔다. 중부지역의 버마족을 비롯해 북쪽 산간지방의 샨족, 남부 해안지방의 몬족, 서부 해안의 라카인족 등 모두가 불교를 신봉했고, 불교와의 깊은 인연에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버마족은 자신들은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의 후예이고, 선조들이 티베트 산맥을 넘어 이 땅에 정착했다고 믿고 있다.

미얀마 중부지역에 도시국가가 처음 건설된 시기는 638년이다. 하지만 이곳에 상좌부 불교가 전래된 것은 1057년으로, 미얀마를 통일하고 바간 왕조를 시작한 아노야타(Anawratha, 재위 1044~1077) 왕 때다. 이전까지는 종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원시적인 불교 형태인 아리불교(Ari buddhism)와 정령신앙 등이 혼재돼 있었다. 아리불교의 승려들은 불법이 아닌 마술과 같은 눈속임으로 신도들을 현혹하고 자신을 불사신으로 포장해 세속적 쾌락을 즐기는 타락한 존재들이었다.

이른 아침 짜웅에서 탁발하러 마을로 향하는 승려들.

이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을 수탈하는 모습에 분노해있던 아노야타 왕이 몬(Mon)족 상좌부 불교승려인 신 아라한(Shin Arahan)을 만나면서 바간 왕국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노야타 왕은 강력한 왕권으로 타락한 아리승들을 몰아내고 남부 해안지역의 타톤(Thaton) 왕국에서 많은 승려들을 초빙해 상좌부불교가 급속하게 퍼져나갈 수 있게 했다. 타톤 왕국은 403년에 인도 승려 붓다고사(Buddhaghosa, ?~?)에 의해 빨리(Pali)어 경전이 전해져 상좌부 불교가 융성해 있었기에 많은 승려들의 초빙이 가능했던 것이다.

13세기 5,000개 사원과 탑 평원 가득

바간 왕국에 상좌부불교 승려들이 유입되면서 빨리어로 된 경전이 필요해졌다. 아노야타 왕은 타톤 왕국에 사신을 보내 경전 필사본을 보내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러나 스스로 문명국을 자부하던 타톤왕 마누하(Manuha)는 북쪽의 버마족을 미개인으로 취급하면서 경전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아노야타 왕은 1057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진해 타톤 왕국을 정복하고, 그토록 구하고자했던 경전을 32마리의 흰 코끼리(白象)에 싣고 귀환했다. 이때 다수의 건축기술자와 장엄물을 만드는 금은세공 장인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일반 백성 3만 명까지 바간으로 이주시켜 바간 왕국의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현재 바간에 남아있는 수많은 탑과 사원들은 이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벽화로 유명한 구바욱지.
바간에서 디자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술라마니 파토 내부의 벽화.

또한 짠싯타 왕(Kyanzittha, 재위 1084~1113)은 아노야타 왕이 이룩한 통일국가에 속한 각 종족을 통합해 적극적으로 불교를 발전시켰다. 짠싯타 왕이 재위한 28년 동안 바간 평원에는 수백 개의 불탑이 건설됐는데, 현존하는 다수의 사원이 이때 조성된 것이다. 이후 즉위하는 많은 왕들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큰 사원을 건설해 봉헌하고 귀족들과 경제적 여유를 갖춘 상인들도 건설에 보시하면서 13세기에 이르러서는 5,000개가 넘는 탑과 사원이 바간 평원에 빼곡하게 존재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많은 사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간 왕국의 통치이념이 불교라는 점 이외에도 강력한 군사력이 존재했고, 풍부한 경제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바간 왕국이 군사적·경제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에야와디 강을 끼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다. 바간 왕국은 강을 이용해 북쪽 산간지역과 남쪽 평야지대와의 교역이 모두 가능했고, 강줄기를 따라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 편리했기 때문에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강력한 불교왕국으로서의 바간은 인도에서 불교가 쇠락하고 스리랑카에서마저 이교도들의 침략으로 불교의 존립이 위태로울 때 가장 강력한 불교국가로 성장해 있었다.

아노야타 왕은 불교왕국인 폴론나루와(Poḷonnāruwa)가 힌두왕국인 촐라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군대를 파견해 물리치게 했으며, 1071년에는 이교도의 침략으로 사회가 혼란한 와중에 불교교단이 붕괴되자 불상·경전·승려·흰 코끼리 한 마리까지 보내 교단의 재건을 도왔다고 한다.

12세기에 짠싯타 왕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장소에 세운 보드가야(BodhGayā)의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이 이슬람교도들의 점령으로 폐허가 되자 사신과 함께 많은 재물과 인부들을 보내 탑을 재건하고 성지로 복구했다. 그리고 붓다의 의미를 생각하며 보리수 열매를 가져와 바간에 심었다. 또한 나다웅먀(Nadaungmya, 재위 1211~1234) 왕은 바간 도성 안에 마하보디 탑을 똑같은 모양으로 축소, 건립했다. 이는 후에 인도 탑이 파괴돼 원형을 잃어버리더라도 축소된 탑을 보고 복원할 수 있도록 한 조치로, 새로 조성한 사원의 이름도 마하보디 사원으로 명명했다.

작지만 내부에 벽화로 가득한 로카 테익판의 지모신상.

‘파야’, 용도별로 각각의 명칭 달라

바간 왕조가 가장 화려했던 11~13세기에 세워진 수많은 사원과 탑은 모두 ‘파야(Paya)’ 또는 ‘파고다(Pagoda)’로 통칭된다. 파야는 포괄적으로 사원을 의미하지만, 탑은 물론 불상이나 경전이 있는 건물 등 불교성물 모두를 지칭한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건축한 만큼 ‘파토(Pato)’·‘짜웅(Kyaung)’·‘테인(Thein)’·‘타익(Taik)’·‘우민(Umin)’·‘타자웅(Tazaaung)’으로 구분해야 한다.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파야는 바간 왕국 이전 9세기에 세워진 쀼족 양식의 부 파야(Bu Paya)가 있으며, 바간 왕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파야는 ‘쉐지곤 파야(Shwezigon Paya)’다.

‘파토’는 탑 아래에 불상을 모시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말하고, ‘짜웅’은 승려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공간이기에 ‘승원’ 혹은 ‘선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고대 왕국은 신들의 공간을 석재 혹은 벽돌로 건축한 반면, 인간의 공간은 목재로 지었다. 짜웅도 목재로 건축되다보니 내구연한이 짧아 현재 바간에는 근래에 신축한 짜웅 뿐이다.

에야와디 강변에 위치해 뱃길의 안전을 지켜주는 로카난다 파야.

‘테인’은 승려의 수계를 위한 장소이다. 그래서 실내공간을 넓게 짓다보니 지진에 아주 취약했다. 바간에는 13세기에 건축된 우팔리 테인(Upali Thein)이 남아 있는데, 이 사원 역시 1975년 진도 6.5의 강진으로 붕괴직전에 놓여 내부를 철재로 보강한 상태다. ‘타익’은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로 장경각(藏經閣)으로 볼 수 있다. ‘우민’은 동굴형태의 사원을 말하는데, 평지인 바간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석굴사원이 있다. ‘타자웅’은 불상을 안치한 건물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바간의 사원은 이름대로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붕괴와 건축이 반복되면서 건물의 용도가 변경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런 구분으로 볼 때 바간 평원에 수없이 펼쳐진 사원의 대부분은 탑, 즉 파야로 볼 수 있다. 그 형태·모양·크기가 모두 다르지만 구조적인 면에서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사각의 기단 위에 종모양의 탑이 조성되는 ‘제디(Zedi)’와 기단부분에 내부공간을 확보하여 불상을 안치하고 그 위에 탑을 조성하는 ‘파토(Pato)’ 형식이다. 파토 형식의 윗부분에 조성하는 탑은 대개 사각뿔 형태로 만들어졌다.

아버지가 세운 술라마니 사원을 본 떠 만든 틸로민로 파토.

이렇게 조성된 탑들은 후대로 갈수록 내부공간에 안치되는 불상이 강조되면서 탑의 높이는 더욱더 높아졌다. 이는 종교적 위엄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건물 전체가 높아지면서 위쪽 하중을 줄이기 위해 탑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생겼다.

수계 장소로 쓰기 위해 넓은 내부공간으로 조성한 우팔리 테인.

사원 외부 장식으로 종교적 성스러움 더해

건축된 사원들은 외부를 회반죽으로 바르는 스투코(Stucco) 양식으로 마무리하면서 조각장식으로 장엄했다. 또한 가장 성스러운 탑신부와 상륜부는 금판을 입혀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더했다. 현재 바간에 있는 사원 대부분은 외벽의 스투코가 떨어져나가면서 벽돌이 그대로 노출돼 원래의 외형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쉐산도 파야(Shwesandaw Paya)에 상당부분이 남아 있고, 술라마니 파토(Sulamani Pato)에 일부 조각들이 남아 있다. 내부는 벽돌표면에 회반죽을 칠한 다음 건조 후 채색해 벽화를 그렸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기상의 영향을 덜 받은 덕분에 지금도 많은 사원에서 벽화를 볼 수 있다. 벽화의 내용은 대부분 석가모니 부처님의 547개 전생담인 자카타와 일대기 그리고 상징문양이다.

바간 최초의 탑이자 미얀마 탑의 원형이 된 쉐지곤 파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가장 잘 간직한 아난다 파토.

드넓은 평야에 펼쳐진 크고 작은 사원들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인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해낸다. 이렇게 화려했던 바간 왕국도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하는데, 미얀마인의 가슴 속에 간직돼 있던 불심은 그대로 전해져 근래까지 수많은 사원은 원형대로 잘 유지되었다. 이렇게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에도 유지돼온 사원도 대지진은 견뎌내지 못한 채 벽돌로 지은 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는 불운을 겪고 만다. 197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13세기에 5,000여개가 넘던 사원(불탑) 중에 온전한 사원은 2,217개에 불과했다. 벽돌더미 형태의 붕괴된 사원까지 포함하면 4,000개에 달했다. 이후 많은 탑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의 보시와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되었지만 2016년 8월 진도 6.8의 강진으로 또다시 상당수가 붕괴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유네스코를 비롯한 전 세계의 손길로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얀마 사람들 사이에는 바간의 탑에 대해 전해져오는 한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한때 바간에는 400만개의 파고다가 세워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정확하게는 400만개가 아니고 444만6,733개라고 전한다. 당시 바간 왕국 수도의 넓이는 40km2이고,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주변 지역까지 포함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 이야기를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미얀마 최초의 통일국가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바간 왕국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원을 건설할 때 주변 왕국과는 달리 왕이 개인비용으로 건축자재는 물론 동원된 인력의 인건비까지 지불했다하니 현재보다 더 정의로웠던 당시를 그리워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들의 지극한 불심이야 말로 바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궁극의 이유일 것이다.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 불국토에서 살고픈 간절한 그리움 말이다.

바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탓빈뉴 파토.

김성철

사진작가. 대학에서 사진을, 대학원에서 문화재를 전공했다. 문화재전문작가이자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화재 관련 책에 사진을 찍었다. 현재 문화재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49’와 해외유적도시 전문출판사인 ‘두르가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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