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오도암 뒤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청운대다. 원효 스님은 이 청운대 부근의 원효굴에서 6년 간 수행,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불교 대중화 이끈 신라 최고 학승
6년 바위굴 고행 흔적 고스란히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고승 중 한 분이다. 스님은 한평생 불교 대중화에 힘썼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불교 사상의 융합을 모색했다. 스님은 고향인 경북 경산 인근 팔공산 자락의 오도암(吾道庵)에서 몇 년 간의 정진 후 깨달음을 얻는데, 그 유서 깊은 곳에 ‘원효 구도의 길’이 조성돼 있다.

‘해골 물’, ‘요석공주(瑤石公主)’, ‘설총(薛聰)’, ‘화쟁(和諍)’, ‘소성거사(小性居士)’……. 신라시대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원효’의 연관 검색어로 나옴직한 단어들이다. 특히 ‘화쟁사상’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에서도 갈등을 치유하는 해법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원효 스님의 혜안에 감복할 따름이다. 원효 스님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해 비교적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승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원효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사료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 〈삼국유사〉,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권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10권 ‘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 등이 있다.

품에 별 들어온 태몽 꾸고 스님 낳아

원효 스님은 617년(진평왕 39) 압량군(押粱郡, 현 경산시) 남쪽 불지촌(佛地村, 현 경산시 자인면) 북쪽의 밤골[栗谷] 사라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만삭 때 모친이 길을 나섰다가 미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편의 옷을 나뭇가지에 걸고 해산했다고 한다. 속성(俗姓)은 설(薛)이고, 어릴 적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중 11번째인 내마(柰麻)의 지위에 있던 담날(談捺)이다.

‘고선사서당화상비’에 따르면 스님의 어머니는 별이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 산달이 되어 해산하려 할 때 갑자기 오색구름이 거처를 덮었다고 전한다. 스님의 유년시절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15세 즈음,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살던 집을 사찰로 바꾸어 초개사(初開寺)로 명명하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옆에 사라사(沙羅寺)를 건립했다고 전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권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에 스님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전한다.

원효의 성은 설 씨이고, 동해(東海) 상주(湘州)의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에 귀의해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았는데,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 삼학(三學, 계·정·혜)에 널리 통하여 저곳[신라]에서 그를 일컬어 ‘만인(萬人)을 상대할 만하다.’고 했다. 정밀한 의해가 신의 경지에 들어감이 이와 같았다.

중국 불교문헌에서도 원효 스님을 이와 같이 평가한 것을 보면, 요즘말로 원효 스님은 불교학 연구에 있어 ‘글로벌스타’였던 셈이다. 출가 후 스님은 스승을 따로 정해놓지 않은 채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교를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낭지(朗智)·혜공(惠空) 스님을 비롯해 고구려 보덕(普德) 스님으로부터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 등의 경전을 배웠다.

원효 스님은 한평생 불교학 연구와 불교의 대중화에 매진했다. 당시 신라에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經論)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했는데, 스님이 남긴 저술의 종류와 수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100여 종 240여 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등 일부만 전한다.

오도암으로 오르는 길. 팔공산의 고운 단풍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해골물 마시고 ‘일체유심조’ 깨달아

원효 스님은 648년(진덕여왕 2년) 경주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행하다가 650년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당시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 스님이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학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스님은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붙잡히면서 첫 번째 유학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신라 땅에서 수행과 학문연구에 매진하던 원효 스님은 661년(문무왕 원년) 다시 의상 스님과 함께 제2차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지만, 이번엔 자의로 유학을 포기한다. 그 유명한 ‘해골물’ 일화를 겪고서 말이다. 두 스님은 당나라행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唐項城, 현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원효 스님은 오래된 무덤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갈증을 해소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다. 그때 원효 스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말을 축약하면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된다. 다시 경주로 돌아온 스님은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물며 〈화엄경〉을 주석하는 등 불경 연구에 매진한다.

불교 대중화 힘쓰다 70세로 입적

원효 스님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다. 내용은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전한다. 스님은 설총을 낳은 뒤 스스로 ‘소성거사’,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파계(破戒)를 한 승려였기에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듯하다.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훗날 이두(吏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로 기록하던 표기법)를 집대성하고 ‘화왕계(花王戒)’라는 명문을 지은 대표적인 학자로, 신라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스님은 말년에 경주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입적 후 설총이 스님의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그 옆에서 예를 올리자 상(像)이 홀연히 돌아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원효 스님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뒷날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高仙寺)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는데, 일부 훼손되긴 했지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라와 고려의 후대 왕들도 원효 스님을 존경했다. 원효·의상 스님을 존경해 시호를 내린 왕도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11에 따르면 고려 숙종(肅宗)은 1101년에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聖人)으로 비기(碑記)와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이를 깊이 슬퍼해 원효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로, 의상은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로 추증하니 유사(有司)에서는 즉시 그들이 살던 곳에 비를 세우고 덕을 기록해 무궁하게 전하도록 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효 스님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스님의 행적을 따라가려면 전 국토를 다 누벼야 할지도 모른다. 전국 방방곡곡에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소박하지만 단정한 오도암 일주문. 문 왼쪽에는 ‘묵언’을 당부하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군위군 2017년 ‘원효 구도의 길’ 조성

팔공산 오도암도 그런 사찰 중 한 곳인데, 이 암자는 스님에게 아주 특별한 도량이다. 오도암은 원효 스님이 654년(무열왕 1년)에 창건하고 6년간 머물며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때, 오도암에서 머문 때는 1차 당나라 유학을 실패(648년)한 6년 뒤부터 2차 당나라 유학 도전(661년)에 나서기 직전까지로 짐작할 수 있다.

군위군은 원효 스님의 구도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약 1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2017년 6월 ‘원효 구도의 길’을 완공했다. 원효 구도의 길은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팔공산 일원에 조성됐는데, 제1주차장을 출발해 오도암~시자굴~원효굴~하늘정원까지 이어지는 왕복 4~6km 코스다. 하늘정원까지 가서 같은 길로 되돌아올지, 하늘정원을 지나 차도로 제1주차장으로 돌아올지에 따라 거리가 달라진다.

지난해 10월 말, 1차 취재에 이어 올 10월 중순 2차 취재 차 이 길을 걸었다. 방문한 시간에 차이가 있었기에 산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도 달랐다. 작년에는 알록달록 예쁜 옷이더니, 올해는 녹색이 보다 짙었다. 인간과 달리 시간과 자연은 거짓 없이 흐르고 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제1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면 ‘원효 구도의 길’ 입구가 나온다. 아치형의 나무문을 지나면 곧장 산길이 시작된다. 도심에선 잘 볼 수 없는 정겨운 흙길이다. 입구에서 일부 구간은 ‘맨발로 걷는 길’이다. 이 구간에는 하산 시 세족장, 입산 시 세족장이 있어 부담 없이 맨발로 걸을 수 있다.

산길이지만 비교적 평탄하다. 중간 중간 땀을 식힐 수 있는 나무 벤치와 바위가 있어 쉬어가기도 좋다. 바위 위에는 오도암을 오간 불자들이 쌓은 돌탑이 종종 눈에 띈다. 특히 가을에는 짙게 물든 팔공산 단풍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입구에서 오도암까지는 1.2km 정도다. 출발점은 평탄하지만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호흡도 가빠진다. 그럼에도 오를수록 좋아지는 풍경과 맑은 공기, 가벼워지는 마음은 기쁨 그 자체다. 매번 고승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깊이 찍혀있는 선각자들의 발자국 위를 걷는 듯하여 조심스러우면서도 즐겁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점점 울창해지는 숲길을 따라 오르면 오도암 입구가 나타난다. 사립문 양쪽 위에 삼각형 형태의 나무를 올려놓고 그 중간에 ‘오도암’ 현판을 걸어 놨다. 여닫이 사립문이 달린 간결하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일주문이다. 문 옆으로 ‘도량 내에선 묵언(黙言) 할 것’이라고 적어놓은 글귀가 붙어 있다. 문을 지나 몇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전각과 요사채 등 건물 몇 채 뒤로 우뚝 솟아 있는 청운대의 위용에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팔공산의 힘 있고 웅장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효 스님이 수행한 원효굴. 이곳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도 삼국통일을 기원했다고 하니, 영험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오도암~원효굴 이어지는 왕복 4~6km

팔공산은 기운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보통의 수행력으로는 버티기가 힘들다고 한다. 원효 스님은 이곳 청운대 정상 부근의 바위굴에서 6년을 수행했다. 세상 사람들은 원효 스님이 해골 물을 마시고 난 뒤 깨우친 바를 ‘오도’라고 보기도 한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해골 물’ 일화 이전에 오도암에서 각고의 정진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도암 입구로 나와 원효굴(또는 서당굴)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원효 스님은 이 굴에서 정진했다고 전한다. 원효굴은 가파른 714개의 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원효굴에 가기 전 500계단 즈음에 ‘시자굴’이 있는데,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시자굴 위가 원효굴이니 원효 스님의 시자가 수행했던 곳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원효굴은 세로로 쭉 뻗은 바위의 4분의 1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비교적 공간이 넓고, 바닥에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도 있다. 이 샘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마신 물이라고 해서 ‘장군수(將軍水)’로도 불린다. 신라를 대표하는 이들이 수행하고 기도한 곳이니 보통의 공간은 아닌 듯싶다. 원효굴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있는데, 원효 스님이 참선하던 ‘좌선대’라고 한다. 올라가는 것도 어렵고, 올라가 앉는다 하더라도 방심하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원효 스님을 떠올려본다.

원효 스님이 참선을 한 곳으로 알려진 좌선대.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정도의 공간 밖에 되지 않는다.

원효굴 앞에 앉아 원효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팔공산을 바라보노라니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른다. 여섯 번째 마지막 순례길을 걷고 있다보니 지난 1년의 시간도 스쳐 지나갔다. 눈 내린 위험천만한 겨울 산길, 촬영해놓은 사진파일 대부분이 손상돼 가슴 철렁했던 일, 이외에도 다닐 때마다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연재를 시작할 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고승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걸어 독자들에게 고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해주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쉬움이 남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걸었고 자료조사도 할 만큼 했으니 후회는 없다. 물론 앞선 연구자들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출가 여부를 떠나 초발심을 끝까지 이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원효 스님도 그걸 알았기에 후학의 정진을 독려하고자 〈발심수행장〉을 썼을 터이다. 〈발심수행장〉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고승길 순례’의 연재도 마친다.

시대는 홀연히 흩어져 오래 보호해 머물지 못하니
오늘도 (벌써) 저녁이니 자못 아침부터 수행해야 한다.
세간의 즐거움은 뒤의 괴로움이니 어찌 탐착할 것이며
한 번 참음이 긴 즐거움이니 어찌 닦지 않겠는가.
도인의 탐(貪)은 수행자의 수치이고
출가자의 부(富)는 군자의 웃음거리이다.

- 〈발심수행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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