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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은사6_ 무애 서돈각
무애 서돈각 박사

매일아침 예불 올린 참 불자
‘한국 상법학의 태두’로 불려

무애(無碍) 서돈각(徐燉珏) 박사는 필자의 은사님이다. 제자로 은사님을 추모하는 글을 쓸 기회가 생겨 영광인 동시에 감개무량하다. 무애 선생은 1920년 11월 3일 태어났으니 11월로 꼭 탄신 100주년이 된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상이 난리를 쳐서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 무척 안타깝다.

필자는 누구보다도 무애 선생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제자로서 합당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항상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사해(四海)에 전하고 있는 〈금강(金剛)〉지에서 선생님을 추모하고 회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사실 〈금강〉 편집국에서는 〈주역(周易)〉으로 유명한 건국대학교 성태용 교수에게 원고청탁을 했는데, 성 학형이 무애 선생과 인연이 더 깊은 필자를 소개한 것이다.

무애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65년이다. 그해 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면접 자리에서 교무처장으로 봉직하시던 무애 선생을 처음 친견(親見)했다. 당시 학생처장을 맡고 있던 ‘한국 헌법학의 전설(傳說)’ 김철수 교수(한라대 총장 역임, 학술원 회원)도 동석하셨던 것 같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를 선생은 무척 인자한 모습으로 대해주셨는데, 그 기억이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 유학시절 부친과 함께.

일본 유학과 학도병 차출

무애 선생께서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보(현 경북고)를 졸업하고 일본의 송강고등학교를 거쳐 경도(京都)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셨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중국 남방지방으로 끌려갔다. 후에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내신 김증한 교수님(민법학, 문교부차관 역임)과 국민대·인하대·중앙대 총장을 역임하신 이재철 총장님 등 세 분은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종전(終戰)을 맞은 인연으로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무애 선생은 필자가 해공 신익희 선생과 성곡 김성곤 선생의 품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국민대학교와도 인연이 깊다. 김성곤 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탓이다. 필자는 1980년 초에 국민대학교에서 서돈각·이재철 두 어른을 모시기도 했다. 저에게는 하늘같은 존재였던 두 분과 동료 교수로(?) 지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추억이다. 간혹 두 분이 전쟁 중의 일화를 화제로 담소하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경북대학교 총장 재직 시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는 서돈각 박사.

동국대·경북대 총장에, 학술원 회장도

광복으로 귀국하신 무애 선생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에 최초의 상법전공 교수로 법과대학에 부임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세대교체도 많이 되었지만, 1990년대까지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학계와 법조계, 정계와 경제계에 무수하게 많았다. 제자 복이 참으로 많았던 어른이다.

무애 선생은 우리나라 상법학계의 태두(泰斗)로서 1960년 초 정부가 기업활동의 기본법인 상법을 제정할 당시 깊이 관여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또 선생은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장(1969~70), 법과대학장(1970~72), 동국대학교 총장(1972~74), 경북대학교 총장(1979~81) 등을 지낸 뛰어난 교육행정가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는 국가조직인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4년간 봉직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은사님은 우리나라 법학계 뿐만 아니라 학계 전체의 거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8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취임 후 학술원 회장실에서.

상법 분야 많은 저작물 남겨

무애 선생은 상법(商法)학자로 〈상법 개론〉·〈상법 강의 상·하〉·〈상법 연구〉·〈주식어음법〉·〈주식신상법통람〉 등 많은 상법 관련 저술로 건국 초기 척박했던 상법학의 토대와 체계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 저술하신 상법 관련 서적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거의 40년간 법학도들의 필수 교과서가 되었다. 제자이신 김성수 사장이 운영한 법문출판사에서 인세(印稅, 저작권료)를 받을 때는 ‘인세’란 이름에 걸맞게 사모님께서 책 한 권마다 도장을 찍었는데, 인장 한 번 찍을 때마다 서재에 모셔놓은 불단의 부처님께 절 한 번 하기를 반복하셨단다. 그러면서 절을 할 때마다 책을 읽는 학생이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기원하셨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서울대학교 최문환 총장께서 갑작스레 뇌일혈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언론에서 무애 선생이 후임 총장이 될 것이란 하마평이 나왔다. 이때 선생님은 곧바로 서독으로 출국하셨다. 그 후 전해들은 얘기로는 고교 선배께서 병석에 계시는데 하마평에 오르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라 생각해 일부러 출국했노라고 하셨다.

필자와의 행복한 인연

은사인 무애 선생과 많은 인연을 쌓았던 필자는 대학 졸업 직후인 1970년 초, 갑자기 어머님을 잃고 방황을 했다. 그때 선생께서 필자의 손을 잡고 대학원 진학을 위한 서류를 마련해 주시면서 “너는 교직에 맞는 사람이야.”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은 느닷없이 당신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학생이 된 필자에게 대학원 합격 소식을 사전에 직접 전해주기도 하셨다.

당시 상사법학회장이셨던 무애 선생은 상법전공 학생이 된 필자에게 학회에 참석할 기회까지 마련해 주셨다. 당시(1973년경)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상사법학회는 매월 열렸는데, 어느 날 학회에서 발표자가 질문을 받고 답변으로 말할 일본 상법서적의 제목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무애 선생께서 책의 제목은 물론 몇 페이지 근처에서 그 저자가 관련 주장을 펼쳤노라 말씀을 하셔서 참석자들이 대가(大家)의 학문 경지에 감탄한 일이 있었다. 상법을 배우는 병아리 신세였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때 ‘대가가 되려면 저 정도로 실력을 많이 쌓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78년에는 우리나라가 해양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박현규 회장의 주도로 한국해법학회를 탄생시켰는데 은사님은 이후 10여 년 간 회장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지금껏 박 회장은 후술할 무애장학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계시다.

1970년 초 세배를 온 대학생불교연합회 임원들과 이화동 자택 법당에서 기념촬영. 앞줄 왼쪽부터 신호철, 명호근, 무애 선생, 최동수, 전창열. 뒷줄 오른쪽 첫 번째는 김동길.

불교계의 대표적 재가(在家) 불자

무애 선생은 아호에 걸맞게 성품도 돈후(敦厚)하시고 남에게 항상 인자(仁慈)하신 ‘불보살’ 같은 어른이셨다. “세상을 살아보면 잘나고 출세한 사람이나 못나고 미천한 사람이나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강조하셨다. 또 신심이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계의 대표적 재가지도자 중 한 분이셨다. 이화동 집안 서재에 불단(佛壇)을 차려 매일아침 예불과 108배를, 저녁에는 참배를 드리며 정진을 하셨다.

은사님은 전생부터 불연(佛緣)을 맺으셨던 것 같다. 세 살 때 신문에 난 부처님 사진을 우연히 보시고 자당(慈堂)께 말씀드려 그 사진을 오려 벽에 붙여두고 예배를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부처님 사진을 평생 간직하셨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학 동료들과 참선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10여 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봉직

무애 선생은 이처럼 돈독한 신심을 바탕으로 학문의 길을 넘어 불교를 통한 사회교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1989년 대한불교진흥원 창립 때 이사로 참여하신 후 1993년부터 10여 년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봉직하셨을 뿐만 아니라, 잠시 불교방송사장직도 겸하셨다. 당시 불교방송사장으로 취임해 축하를 드렸더니, “사장직은 학자의 길에서 볼 때는 일종의 탈선”이라고 하시면서 “거절하다가 불가불 잠시 맡을 뿐”이라고 하셨다. 일생을 학자의 길만 걸으시려고 노력하신 점에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사표(師表)가 된다고 하겠다. 참고로 은사님께서 오랫동안 봉직한 대한불교진흥원은 동국제강의 장경호(張敬浩) 창립자께서 1975년에 한국불교의 발전과 불교문화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정신으로 설립한 단체다.

은사님은 대만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받은 오경웅 박사와의 인연으로 그분이 영어로 저술한 〈선학의 황금시대〉란 불서를 서울대 이남영 교수와 공동으로 번역하신 일도 있다. 1993년에는 은사님께서 무애장학재단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 수백 명의 젊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재단을 창립할 당시 이사들이 대부분 무애 선생과 가까운 연배였는데, 필자는 심부름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함께하게 됐다. 그 인연으로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오늘까지 그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은행 금리가 너무 낮아 장학금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차에 제자가 되시는 김교창 변호사(넥슨 김정주 회장의 부친)가 작년에 1억 원 이상을 재단에 희사하셨다. 그 자금으로 명맥이 끊어질 뻔한 한국상사법학회의 무애학술상(연 500만 원)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1994년 12월 무애문화재단 선발 장학생에 장학금 수여 후 재단이사 및 장학생들과 함께.

큰 스님들과의 인연

필자는 학문적으로는 무애 선생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종교적으로는 탄허 스님의 제자이다. 필자는 1970년 중반부터 대학 재학시절부터 존경해온 명호근(쌍용양회 회장 역임)과 전창열(국방부 법무관리관 역임) 두 분의 손에 이끌려 탄허 스님을 자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린 바 있다.

1983년 탄허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는 명호근·전창열 두 분의 주창으로 탄허문화재단을 만들어 탄허 스님의 위대한 불교사상을 선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무애 선생께서 탄허문화재단의 이사장직을 10여 년간 맡아주셨다.

무애 선생은 젊으실 때는 내소사의 해안(海眼) 큰스님과 깊은 인연을 가지셨는데, 해안 스님은 필자의 대학시절 학교에 오셔서 법문을 해주시기도 하셨다. 무애 선생은 또한 성철 큰스님과도 아주 돈독한 관계였다. 아마 일반신도로서 3,000배를 하지 않고 백련암을 무상 출입하셨던, 거의 유일한 분일 것이다. 한 번은 선생께서 성철 스님 앞에서 〈사자의 서〉를 읽는 중이라고 자랑하셨다가 성철 스님께서 책을 빼앗아가셨다며(?) 매우 아쉬워하기도 했다.

1991년 5월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식장에서 사모님과 다정하게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래전 필자가 무애 선생을 따라 김천 직지사에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오녹원 주지 스님께 정성스럽게 삼배를 드렸던 모습이 기억난다. 세속의 나이로는 훨씬 연배가 높은 한국상법학계의 거목인 선생이 ‘하심(下心)하시는 자세’에서 필자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데 은사께서는 심지어 어린 사미승에게도 항상 먼저 합장을 하셨다. 스님이 된 그 자체로 당신보다 높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은 항상 불연을 놓지 않으시고 전국의 유명한 선사들을 두루 찾으면서 불교의 종지를 탐구하셨다.

우리 사회도 무애 선생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 탓에 은사께서는 국민훈장 동백장에 이어, 1979년에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제정한 한국법률문화상을, 1991년에는 무궁화대훈장을 수상하셨다.

김문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교수를 거쳐 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녹색소비자연대 대표·아름다운가게 이사장·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대학총장협의회장, 산자부 전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글 김문환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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