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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금강에세이
필몽 作.

곽재용 감독의 영화 ‘클래식’은 영상미가 뛰어난 순정만화 같은 영화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소년과 소녀가 가까워질 때쯤이다. 강가에서 소년이 소녀를 업고 목조다리를 건널 때 반딧불이가 날아올라 반짝이는 장면은 환상적이다. 소년이 빛나는 반딧불이를 잡아 소녀에게 건네줄 때 마주보는 그들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강가의 밤풍경과 별빛 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반딧불이는 ‘클래식’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한 주연급 조연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나 시설 폐쇄조치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작년 여름에 반딧불이 축제에 갔다. 공원 한편에 있는 습지원을 개방해서 시민들에게 반딧불이를 관찰하게 했다. 축제 막바지라 기다리는 줄이 길었다. 안내원이 나누어주는 반딧불이 캠페인 명찰을 받아 가슴에 달고 줄에 합류했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숲이나 밤하늘을 비행하는 반딧불이가 신기해서 찾아 다녔다.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보고 요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 병 속에 들어있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벌레를 보여주며 반딧불이라고 했다. 빛을 잃은 반딧불이의 형태를 보고 환상은 깨어졌다. 평범한 벌레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재주를 부리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반딧불이를 보던 어린 시절과 그 빛은 여전히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반딧불이 생태탐방 입장을 기다리는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반딧불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별도 없는 캄캄한 어둠이 그들의 동화로 밝아진다.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누구에게나 웃음을 보낸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시간 가량 줄을 서고도 지루한줄 몰랐다. 한 번에 삼십 명 정도 입장하는데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탐방로를 들어가기 전, 안내원이 반딧불이의 종류와 생태에 관해 설명했고 환경보존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는 대체로 세 종류의 반딧불이가 서식하는데 그 중에 우리가 만나볼 반딧불이는 아주 작은 애반딧불이다. 청정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반딧불이는 환경지표로도 예민한 곤충이다. 아파트와 자동차의 밝은 불빛, 농지 정리와 농약 등으로 서식처와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 안내원이 전날에 비가 와서 개체수가 더 적어졌다며 기대에 찬 관람객들에게 미안해했다. 영화처럼 빛나는 반딧불이 무리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딧불이를 볼 수 있었기에 다행으로 여겨졌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어둡고 좁은 탐방로에 들어섰다. 관찰로는 오솔길처럼 좁은 목재널판지로 만든 통로였다. 바닥은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 정도의 전등만이 밝혀져 있어 답답했다. 조금 지나자 어둠에 익숙해졌다. 반딧불이의 서식처답게 물이 졸졸 흐르고, 그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얇은 그물도 쳐있다. 사람들의 이동을 따라 천천히 들어가는데 반딧불이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반딧불이를 찾았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소풍가서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살폈다.

“저기 있다!” 앞서가던 남자가 탐방장소라는 것도 잊고 아이에게 소리치니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집중하니 뭔가 깜빡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경이로운 빛에 잠시 숨을 멈췄다. 반딧불이는 작은 불빛으로 인사라도 하듯이 깜빡였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반딧불이는 우리 앞에 나타났다. 탐방객들이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여기!”, “저기!” 손짓을 하면 모두 고개를 빼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행복해 보였다. 탐방로를 나올 때는 또다시 줄을 서서 채집망과 유리관에 가둬둔 반딧불이를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여전히 작은 빛은 아름다웠지만 자연을 떠난 반딧불이는 쇼윈도의 조형물처럼 보였다.

반딧불이가 빛을 발하여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생애는 처절하다. 물속에서 유충으로, 다시 땅에서 번데기로 산다. 그리고 성충이 되어 2주 정도 빛을 발하다가 알을 낳고 사라지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그 과정에서 발하는 반딧불이의 빛, 반딧불은 그들의 구애(求愛) 신호다.

별도 어두운 밤에 빛나고 반딧불이도 어둠 속에 빛난다. 어둠이 짙을수록 그 빛은 더 찬란하다. 예전에는 반딧불이가 너무 흔해서 ‘개똥벌레’라고 불렸다. 이제는 귀하신 몸이 되어 채집을 해서 채집망이나 유리관 안에 넣어 두고 관찰을 하니 격세지감이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진나라의 손강과 차윤이 가난해 등잔 기름을 구하기 어려웠다. 겨울에는 하얀 눈빛에 공부를 했고, 반딧불이를 수십 마리 잡아 주머니에 담아 그 빛으로 공부해 큰 벼슬을 했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예나 지금이나 희미한 빛도 눈에 익으면 글을 못 읽을 일도 아니니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도심의 화려한 불빛보다 작은 생명체의 희미한 빛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본다. 많은 일화와 동화에 등장하는 반딧불이가 점점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신형원의 노래 ‘개똥벌레’ 가사처럼 사라져감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기에 반딧불이는 자연의 너무나도 보석 같은 존재다. 사람들이 환상과 그리움으로 관심을 가지니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작은 몸짓으로 반짝이는 지상의 작은 별 반딧불이를 더 많이, 더 오래 보고 싶다.

사라져야 할 것은 개똥벌레 같은 곤충이 아니라 그들에게 해를 주는 환경이다. 한때는 환경이 오염되어 보기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코로나19로 언제 다시 만날지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면 자연도 보답하고, 환경을 파괴하면 아름다운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혹시 사람들의 관심으로 되살아난 자연 속에서 반딧불이를 만난다면 정말 반가운 일일 것이다.

허혜연 시나리오를 공부했으며,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산들문학회 회원이며, 공저로 〈시간의 정원〉이 있다.

글 허혜연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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