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문학작품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의 파문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인사가 아무래도 좀 생뚱맞지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독자 여러분께 안부를 여쭈며 글을 시작해야 합니다. 본래 우리말에서 ‘안녕하십니까?’라는 물음은 일종의 입버릇처럼 으레 건네는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상대방과 자신의 ‘안녕’을 절실하게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시절을 건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일명 코로나19의 기세가 한동안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수도권을 중심으로 재확산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마스크를 쓴 채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非對面)과 같은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생산활동과 경제활동 모두 축소되고, 연기되고, 취소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야 할 텐데 전 세계가 발 벗고 나서고 있음에도 그 성과는 미미합니다. 이래저래 걱정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사실 ‘거리두기’나 ‘비대면’ 같은 말은 애당초 인간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아니, 양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은 결국 수많은 만남과 모임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사회(社會)’란 말을 한자로 쓰면, ‘모일 社’·‘모일 會’가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사회’를 일컫는 영어 단어 ‘Society’가 ‘동료·공동·협회·결사(結社)·연맹’을 의미하는 라틴어 ‘Societas’에서 파생돼 나온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그런데도 코로나19는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엉뚱하면서도 치명적인 심술을 부리고 있습니다. 만나지도 마라, 모이지도 마라,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라, 아예 일상을 멈추라……. 제 모습을 철저히 감춘 채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갑남을녀의 관혼상제(冠婚喪祭)마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 뼈아픈 것은 이 모든 사태가 결국 인간들의 무분별한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뒤늦은 자각입니다. 자연에 대한, 생명에 대한 진지한 존중과 성찰보다 너나없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갇혀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골몰해 온 데 대한 업보라지 않습니까?

이 역병의 회오리가 잦아들면 인류는 지구와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돌아보면서 세계사적 전환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상생’과 ‘공존’이라는 화두를 집어 들겠지요. 온전한 생명의 길은 결국 이 화두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영국 등 아홉 나라 문학현장

코로나19의 심각성으로 여행업계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몇 해 만에 가족여행을 꿈꿔왔던 가족과 연인은 물론 신혼여행객마저도 발만 동동 구른 채 애만 태우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여행기를 골라보았습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한국관광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세계 곳곳을 돌아본 동시영 시인의 〈문학에서 여행을 만나다〉입니다. 우리 모두 오가도 못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심신의 환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은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관련 정보를 소개하는 여느 여행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책 이름에 나와 있듯이 저자가 읽고 큰 감동을 받았던 문학가의 자취를 답사하면서 맞닥뜨리는 감회와 더불어 그 문학적 울림과 정서의 실체를 찾아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차 안엔 ‘브론테 버스’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드라이버에게 하워스 올드 화이트 라이언 호텔을 가려면 어디서 내리냐고 묻자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대답해 주었다. 사람들 표정은 따뜻하고 정겨워 마치 내 고향에라도 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릴 적 읽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낳은 하워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늘 가고 싶은 내 마음속 고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마음속에선 나도 모르게 그때부터 여기로 일찌감치 출발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 출발이 지금에 이르러 도착할 무렵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스듬한 언덕길의 차창 밖 풍경은 고원에 떠 있는 전설 같았다. 이 지방 특유의 말투와 몸짓으로 그 옛날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중국 여행에서 본 신장 지역 톈산(Tianshan, 天山)산맥처럼 웅장하고 망설임 없는 직선의 황갈색 고원이 표표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래 깃든 집들은 평온을 그리는 화가들 같았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는 하워스에 딛는 첫발은 마음 깊이에 기쁨을 심는 손길 같았다.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폭풍의 언덕〉의 산실이자 작품의 무대인 영국 웨스트요크셔의 작은 마을 하워스를 찾아가며 만난 감회를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브론테 가족이 이 마을에 살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그 가족이 살던 집을 그대로 살려 꾸민 브론테 박물관을 찾아가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와 어머니 마리아 브런웰, 여섯 자녀들의 행적을 살핍니다. 84세까지 비교적 장수한 아버지를 제외하고 온 가족이 하나같이 단명해서인지 그들 가족의 삶이 박물관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동안 많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태어난 곳과 박물관을 찾았지만, 이처럼 한 곳에 그들 삶의 모든 것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은 매우 드물었다. 하워스는 어느 곳보다 작가들의 삶과 작품의 외연을 확연히 드러내는 특별한 공간으로, 세계 곳곳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자처럼 그들의 흔적과 작품의 보존된 실체를 보고 만지러 오게끔 하는 곳이다.

박물관 직원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후,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암으로 지었다는 박물관 현관을 들어서자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잔잔한 기쁨의 얼굴을 하고 신비한 비밀의 징표를 찾은 것처럼 그들의 삶과 예술을 조심스레 노크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끝났어도 끝없이 퍼져 나가는 예술의 향기와 호흡이 거기 생생히 쌓여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1847년 자신의 유일한 소설 〈폭풍의 언덕〉을 ‘엘리스 벨(Ellis Bell)’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리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내용이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데다 등장인물 또한 흉측하고 음산하다는 혹평마저 듣습니다. 그리고 에밀리는 이듬해인 1848년 12월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기존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와 서정적이면서 긴박한 필치, 모순과 혼돈이 뒤섞인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평가됩니다. 나아가 영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듭 확인한 저자는 박물관을 나와 작품의 무대를 걸으며 동일시(同一視)의 체험을 격정적으로 기록합니다.

브론테 마을을 경계하는 능선을 넘어, 현지인들이 스탠버리 무어(Stanbury Moor)라 부르는 바람의 언덕으로 출발했다. 박물관을 왼편에 두고 오른쪽으로 들어서자, 한꺼번에 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들어가 나도 바람이 되었다. 몸으로 받아쓰는 바람의 말을 마음이 듣고 있었다. 바람의 음파가 타전하는 암호 같은 처음 보는 풍경, 낯선 모습들을 바람에 맡겨 흔들리고 있었다. 혼의 바람 같은, 바람탈을 쓰고 춤추듯 들판이 감전하는 듯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희푸른 깃발 같은 구름, 생각을 쪼아 먹은 흔적 같은 붉은 흙, 역사의 기록을 말아 쥔 손아귀 같은 바람, 생각의 소리들 …….

〈폭풍의 언덕〉 끝 대목에선 히스클리프 무덤 근처에 피어 있었던 히스 꽃, 샬럿이 12월 추위 속 벌판을 헤매어 생의 마지막에서 앓고 있는 에밀리를 위해 꺾어 주었다는 그 히스 꽃이 곳곳에 앉아 있는 길이 내게 소설 〈폭풍의 언덕〉을 한 페이지씩 다시 읽어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폭풍의 언덕에서…… 바람 속에서 모든 인접한 것들은 포옹이다. 더러는 피할 수 없는 섞임이다. 웅혼하고 검푸른 하늘, 세찬 바람의 옷자락, 숨차게 말하는 듯, 아뜩아뜩 들릴 듯 말 듯…….

저자는 ‘브론테 패밀리가 연주하는 하워스’란 제목으로 쓴 브론테 에밀리 탐방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일요일, 하워스를 떠나기 위해 증기기관차를 타기로 했다. 브론테 가족이 살던 그때에도 있었던 기차 속에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옛날을 타고 있었다. 아쉬움의 눈물로 색칠한 마음의 눈을 반쯤 뜨고 바람 속을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여행은 만행의 다른 이름

총 9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영국 외에도 이탈리아·크로아티아·루마니아·러시아·타히티·모로코·중국·일본 등 아홉 개 나라의 문학 현장을 돌아본 저자의 감동이 생생하게 깃들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탈리아 여행기〉·〈구두쇠〉·〈오스만〉·〈드라큘라〉·〈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예브게니 오네긴〉·〈달과 6펜스〉·〈모로코의 낙타와 성자〉·〈이븐 바투타 여행기〉·〈여신〉·〈설국〉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소개합니다. 지면 관계상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에 대한 글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집중적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저자의 유려한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교직(交織)된, 나머지 부분의 글은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맛보시길 권합니다.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은 여행에 대한 저자 특유의 담론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낯선 곳에 마음이 가끔씩 가서 쉴 정신의 집을 짓는 것’을 여행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 아닌 저기로의 공간 이동에 의한 결핍 치유제’가 바로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여행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게 있어 문학과 여행은 나이면서 나를 바라보게 하는 어떤 대상이다. 그 두 개의 현으로 연주되는 일상은 하프의 선율로 흐르는 음악이요 슬픔, 우울 같은 삶의 그늘마저 태양으로 빛나게 하는 그림이다.

멀고 가까운 꿈의 허구 속에 실존의 무지개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본 모든 시간과 장소의 속삭임 속에 나의 오늘이 있다. 정해진 시간도 장소도 없는 그곳에서 우린 또렷해 보이는 무게도 질량도 없는 허구의 지금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도……. 무슨 증명처럼 보이는 그리고 마음의 피부에 닿아 느끼게 하는 것은 내겐 여행이다. 여행은 그 많은 시간과 장소가 교차하는 낯선 곳의 꽃들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예술적 영감으로 작품을 통해 거기 새롭게 태어난다.

여행은 먼 곳을 가깝게 한다. 새로운 길들은 낯설고 그리운 것들을 내 곁에 가까이 데려온다. 어쩌면, 지상의 모든 길을 헤매고 싶어,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태어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의 갈피엔 길들이 끼어 있고 그 길이 데리고 가는 여행, 그건 내게 언제나 행복한 바벨이다. 사는 건 지금 이 순간마저도 너무나 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먼 곳으로의 방황이니까. 그리고 처음 본 자연으로, 도시로 새로 피어나는 꽃처럼 스며드는 것, 그건 삶의 생생한 매력이다. 사는 건 지상의 모든 길로 가는 커다란 길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수행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참나와 마주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방법 중 하나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만행(萬行)의 다른 이름입니다. 물론 행선(行禪)이나 경행(經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겠지요. 저자는 ‘내가 본 모든 시간과 장소의 속삭임 속에 나의 오늘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나의 오늘’을 뭉클하게 가꿔가야겠습니다. 코로나19라는 발등의 불부터 우선은 끄고 말입니다.

윤효 시인. 본명은 창식(昶植). 1956년 논산에서 태어나 1984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얼음새꽃〉·〈참말〉·〈배꼽〉 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이 있다. 제16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제7회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제1회 풀꽃문학상, 제31회 동국문학상, 제13회 충남시협상을 받았다. 현재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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