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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대석5_신달자 시인
  • 글·조용주 기자 사진·정현선 기자
  • 승인 2020.09.1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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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愼達子, 78) 시인은 현대 문학사의 여성 시 영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와 함께 숨 쉬고 살아 온 그녀는 최근 ‘만해대상 문예대상’을 수상했다. 8월 중순, 그녀를 분당 대광사 북카페에서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詩와 함께 살아온 50여 년
무한 에너지의 원천은 ‘어머니’

신달자(愼達子, 78) 시인은 현대 문학사의 여성 시 영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와 함께 숨 쉬고 살아온 그녀는 최근 ‘만해대상 문예대상’을 수상했다. 8월 중순, 그녀를 분당 대광사 북카페에서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든을 바라보는 원로 여류시인 신달자는 한국 여성 시를 개척한 대표시인으로 손꼽힌다. 1988년 펴낸 산문집 〈백치애인〉은 4년 뒤 영화화됐고, 1989년 쓴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이듬해 영화화, 3년 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시 뿐만 아니라 산문과 소설분야까지 폭넓게 활동한 그녀는 숙명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평택대와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했고, 2012년에는 한국시인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부처님오신날 태어난 아이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상남도 거창의 한 시골 마을에서 1남 6녀 가운데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열다섯에 종갓집 며느리로 시집와 ‘아들 셋을 꼭 낳아야 한다.’는 특명을 받았던 어머니는 불행히도 그녀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종갓집 며느리의 첫 번째 사명을 다하지 못한 만큼 시집살이는 매서웠다. 몸조리할 시간도 없이 집안일을 해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딸이 웬수’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웬수같은 다섯째 딸이 태어난 날은 다름 아닌 음력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었다.

“호적에는 생일이 12월 25일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실제 태어난 날은 음력 사월초파일 사시에요. 부처님이 탄생한 날과 시(時)까지 똑같죠. 아버지는 제가 딸로 태어나자 크게 실망하셔서 출생신고를 차일피일 미루셨어요. 신생아 사망률이 높을 때였죠. 연말에 읍사무소의 독촉을 받고서야 급하게 출생신고를 하셨어요. 그날은 12월 25일 예수님 탄생일이에요. 본의 아니게 인류의 스승인 부처님과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동시에 생일로 갖게 됐죠.”

중학교 2학년 무렵 자택 정원에서.

그 당시에는 ‘여자가 너무 큰 날 태어나면 일생이 고달프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는 10살 무렵까지 생일날이면 새벽같이 그녀를 이끌고 집 근처 절에 가서 아침밥을 먹였다.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서 스님과 어른들 틈에 끼어 앉아 바가지에 밥을 비벼 먹었던 추억이 지금도 또렷하다고 말했다. 어린 그녀가 비빔밥을 먹다가 “내 생일도 부처님과 똑같이 오늘이에요.”하면서 주변 어른들 입에 밥을 한 숟가락씩 떠넣어주면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나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촌부(村婦)였다. 반면 하나 있던 동서는 경북여고를 졸업한, 소위 잘 나가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더욱이 아들 일곱에 딸을 하나 낳아 어머니는 항상 동서를 부러워했다. 다행히 어머니도 막내아들을 낳았는데, 늘 배움에는 목말라 하셨다.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때부터 딸들을 통해 당신이 살지 못한 삶의 대리만족을 꿈꿨다.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던 1955년, 첫째·둘째 딸은 이미 출가했기에 집안 어른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셋째·넷째 딸을 마산여고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두 언니는 대학시험에 떨어진 후 곧바로 결혼을 했다. 실망한 어머니는 다섯째인 신달자에게 “마산은 터가 나쁘다. 너는 부산으로 가라.”며 부산 남성여고로 유학을 보냈다.

1973년 첫 시집 〈봉헌문자〉 출판기념회에서 어머니 故 김복련 여사와 신달자 시인.

“어머니는 시골마을에 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딸의 공부에 많은 신경을 쓰셨고, 저한테 거는 기대도 컸죠. 어머니는 부산에 가는 저에게 세 가지를 강조하셨어요. 첫째, 결혼 일찍 할 생각마라.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둘째, 내가 살아보니 여자도 돈을 벌어야하겠더라. 돈을 벌어라. 셋째, 그래도 여자는 행복해야 한다. 꼭 행복한 여자가 되어라. 대개 여자의 행복이 첫 번째인데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말을 우선하셨어요.”

문학적 감수성 풍부했던 아버지

고통스러웠던 시기 신달자 시인을 지탱해 준 건 엄마를 바라보는 세 딸아이였다. 두 딸과 함께.

신달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대표로 경상남도 백일장대회에 나가 시 부문 1등을 차지해 어머니 기대에 부응했다. 그녀가 시를 쓰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다. 아버지는 제재소와 정비소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였는데, 겉보기와 달리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분이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 서랍 속에 있는 일기장을 보게 됐다. 일기장 첫머리에는 “외롭다. 오늘도 나홀로 울었다. 날개가 있다면 멀리 날아가고 싶다.”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만한 아버지가 왜 외로울까?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과연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뭘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내린 답은 ‘시’였다. 사실 아버지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업하고, 가족 부양하느라 꿈을 포기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훗날 그녀가 시인이 됐을 때 “사극을 보면 딸이 왕비가 되니 아비가 그 딸에게 절을 하더구나. 지금 내가 너에게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딸의 등단을 기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부산으로 갈 때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보내면 용돈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용돈을 받기 위해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옛날식 편지를 매주 보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며 용돈을 못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학교 앞 서점에서 톨스토이와 파스칼의 명언집을 구입해 마치 내가 쓴 것인냥 짜깁기해서 편지를 보냈죠. 편지 내용이 만족스러웠는지 그 뒤로 용돈을 꽤 많이 받았어요. 대학에 가서 글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란 걸 배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당시에 ‘우리 딸이 이렇게 글을 잘 쓰는구나.’ 하고 즐거웠다고 하시더군요.”

1961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는데, 당시 김남조 시인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서정주(1915~2000)·박목월(1915~1978) 시인의 특강을 들으며 신달자 역시 시인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1964년 여성지 〈여상〉에 시 ‘환상의 방’이 당선됐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코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하지만 1968년 조교생활을 끝내고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시인의 꿈을 포기한 채 가정에 묶여 있어야 했는데,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된 느낌이었다. 또 권위적인 남편 때문에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종로에서 우연히 박목월 시인을 만났다. 초췌한 몰골의 그녀를 본 박 시인은 “요즘도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껏 찾고 있던 게 글이었구나.’

1977년 11월 온양에서 있었던 한국시인협회 세미나를 마치고 시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세 번째가 그녀의 재등단을 도와준 박목월 시인, 왼쪽이 신달자 시인이다.

어머니 소원 이뤄드린 대학교수

박목월 시인은 “매주 일요일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해 다시 시인으로 활동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박목월 시인 밑에서 다시 공부를 했고, 1972년 〈현대문학〉에 ‘발’·‘처음 목소리’ 등으로 재등단했다. 그리고 1973년 첫 시집 〈봉헌문자〉 출판기념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남편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1977년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은 채 23일간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남편은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난폭해지는 등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시어머니마저 집안에서 넘어지며 고관절이 골절돼 꼼짝없이 자리에 눕게 됐다. 시어머니는 그 상태로 9년을 사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남편이 쓰러졌을 때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찾아오셨다고 해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저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가셔서 올케에게 ‘달자도 다 틀렸더라.’고 말씀하셨대요. 저한테 가진 기대가 다 무너지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얼마 지나 저와 통화를 하려고 중환자실로 100번 이상 전화를 하셨다고 해요. 어렵게 전화를 받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달자야, 그래도 니는 꼭 될끼다.’ 그때 그 말 한마디가 제 심장에 깊숙하게 박혔어요. 그 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어머니의 그 말을 기억하면서 이겨냈어요.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에요.”

인생의 스승과 같았던 어머니는 남편이 쓰러진 다음 해 돌아가셨다. 그녀는 늦었지만 어머니에게 성공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하고, 세 딸을 돌보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돈이 없어 등록금을 빌리고, 남들의 험담도 참아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마흔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도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녀의 이름을 세간에 알린 책은 1988년 출간한 수필집 〈백치애인〉이다. 이 책은 80만 부가 넘게 팔린 후 영화로 제작됐고, 2년 뒤 출간한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120만부가 팔리며 영화에 이어 드라마로 제작됐다.

김남조 시인(가운데)과 나민애 문학평론가와 함께. 김남조 시인은 1961년 숙명여대 국문학과 입학 당시 교수였다.

두 권의 책은 그녀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베스트셀러 〈백치애인〉의 인세를 받은 그녀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어머니 무덤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덤 앞에 10만 원권 수표 세 장을 묻었다. 〈물 위를 걷는 여자〉 인세를 받았을 때도, 쉰에 어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때도, 대학교수가 됐을 때도 어머니 무덤 앞에 엎드렸다. 그녀는 훗날 한 시상식에서 이렇게 수상소감을 피력했다.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편히 눈을 감으실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진 마음의 빚은 그렇게 오래 남아 있었다.

영화 ‘백치애인’과 ‘물 위를 걷는 여자’ 포스터.

2000년 병상에만 누워있던 남편은 투병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길었던 그림자가 걷히기 무섭게 2005년에는 자신이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오래지않아 완치됐지만 마음이 공허해졌고, 글쓰기도 귀찮아졌다. 또다시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무렵, 수서역 근처로 이사를 했다. 당시 주변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했는데, 그녀는 저녁마다 포장마차에 가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때 쓴 시가 2007년 제12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인 ‘저 거리의 암자’다. 시조시인이기도 한 신흥사 조실 오현(1932~2018) 스님이 그녀에게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오현 스님이 누군지 몰랐기에 여러 차례 거절했다. 그러다 2011년 동안거 해제 날 신흥사에서 오현 스님을 만났다.

2014년 4월 9일 천태종이 주최한 열린문화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신달자 시인.

“신흥사에 갔는데 오현 스님께서 200여 명의 젊은 스님들을 앉혀두고 제 시 ‘저 거리의 암자’를 낭송하셨어요. 그러면서 ‘여러분이 3개월 수행한 것보다 이 시 한 편에 담긴 수행의 무게가 무겁다.’고 말씀하셨죠. 당시 시가 잘 써지지 않아 절망하고 있던 때였는데, 오현 스님의 그 한마디는 정말 큰 힘이 됐고, 위로가 됐어요. 스님은 주눅 들어 있던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분이죠. 이날 스님은 저에게 ‘남암(南庵)’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어요.”

인터뷰 말미, 행복을 좇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현대인에게 위안이 될 한 마디를 청했다. 신달자 시인은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으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모아서 여행을 가야지.’하고 미루지 말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게 바로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또 “지는 것에 익숙해지라.”고 조언했다. 과거 자신은 늘 운명에, 가족에, 친구에게 이기려고만 했는데, 언제부턴가 욕심을 접고 지는 데 익숙해졌더니 마음에 평안이 저절로 찾아오더라고 하면서. 하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말라.”고도 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그동안 〈고향의 물〉·〈아버지의 빛〉·〈어머니, 그 삐뚤빼뚤한 글씨〉·〈열애〉·〈종이〉 등 15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다수의 장편소설·수필도 출간했다. 이런 작품활동을 통해 ‘대한민국문학상’·‘시와시학상’·‘한국시인협회상’·‘현대불교문학상’·‘영랑시문학상’·‘공초문학상’·‘김성준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문화예술분야 발전의 공을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와 함께 숨 쉬고 살아온 신달자 시인은 최근 제24회 만해대상 문예대상을 수상했다.

내후년이면 여든이 되는 신달자 시인은 요즘도 인생의 마지막 산문집 출간을 위해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온갖 풍파를 견뎌온 노(老) 시인은 “인생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많이 사랑했고 많이 나누었고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면서 “여러분도 머뭇거리지 말고 도전하고 저지르고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저 거리의 암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신달자 / 2007년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

신달자 시인은 행복을 좇는 현대인에게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으라.”고 말했다. 또 “지는 것에 익숙해지라.”고 조언했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말라.”고도 당부했다.

글·조용주 기자 사진·정현선 기자  smcomnet@naver.com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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