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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길 순례5_김천 사명대사길
  • 글·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20.09.1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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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는 15세 때 김천 직지사에서 신묵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사명대사가 삭발염의한 직지사 전경.

서릿발 기개로 승병 이끈
사명당 초발심·호국정신 서려

왜적의 칼바람에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갈 때, 목탁 대신 칼을 잡았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1544~1610) 스님.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사명대사는 15세 때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사문이 되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한 선승(禪僧)이자,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낸 의승장이기도 한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사명대사길’이 직지사 인근에 조성됐다.

‘난세영웅(亂世英雄)’.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전쟁 등 나라에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가를 드러내는 인물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외침이 많았던 만큼 난세에 출현한 영웅도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큰 전란 중 하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이때 숭유억불로 핍박받던 수많은 스님도 국난 극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 중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사명대사 유정이다. 스님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精)의 제자이기도 하다.

유정 스님은 15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형조판서에 추증된 수성(守成), 어머니는 달성 서 씨다. 속성은 풍천 임 씨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이다.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다.

고승대덕의 출생과 관련해 보통 어머니가 기이한 꿈을 꾸는데, 사명대사의 출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서산대사의 법제자인 해안(海眼) 스님이 지은 ‘유명조선국자통광제존자사명당송운대사행적(有明朝鮮國慈通廣濟尊者四溟堂松雲大師行蹟)’과 합천 해인사에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인 ‘유명조선국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병서(有明朝鮮國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幷序)’에 전하는데, 내용은 조금 다르다. 석장비의 비문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썼다고 전한다. 여기에서는 해안 스님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서 씨가 어느 날 저녁에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다.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선옹이 미소 지으며 “이 사람은 고해를 건너게 해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어찌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뒤로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트림과 한숨, 하품,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스님은 유년 시절부터 행동이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고 한다. 모래를 쌓고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 불상이나 불탑 모양을 만들어 놓고 꽃공양을 올리고 합장했으며, 가부좌를 하기도 했다. 길에서 자라를 잡아가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주워 모은 밤과 자라를 바꿔 깊은 못에다 놓아주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7세 때 조부로부터 역사를 배웠고, 13세 때 황악산 자락에 살고 있던 필법과 문장의 대가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서 〈맹자(孟子)〉 등을 배웠다. 뛰어난 실력으로 18세 때 선과(禪科)에 응시해 합격했다. 30세 전후로 출가사찰인 직지사 주지가 됐다. 32세 때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지만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의 법제자가 됐다. 이후 금강산·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지에서 수행했다.

사명대사길 코스 초입에는 사명대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평화의 탑’으로 명명된 5층 목탑이 우뚝 서 있다.

승병장 활약, 스님·유생 존경 받아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 때 정여립 사건에 연루돼 모함을 받고 투옥됐지만, 유생(儒生)들이 스님의 무죄를 호소해 풀려났다. 조선시대에 유생들이 스님을 옹호했다고 하면 의아할 수 있겠지만, 유생들이 뛰어난 수행력과 학식을 지닌 유정 스님과 교유하면서 우의를 쌓았고 흠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04년 선조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갔을 때 이수광(李晬光)·이시발(李時發)이, 1607년 삼청동에 머물 때 손기양(孫起陽)·심희수(沈喜壽)·이지완(李志完)·정협(鄭協)이 사명대사를 위해 직접 시를 짓거나 차운(次韻, 남의 시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했다. 이 시들은 〈증송운시첩(贈松雲詩帖)〉에 실려 있다.

사명대사는 승병장으로 활약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해 부산에 주둔 중인 왜군 진영에 세 차례나 드나들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는 무슨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근년에는 조선에 보배로 여길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삼는다.”고 말해 그를 감탄케 했다는 일화는 선조 임금도 놀라게 한 담대한 행동이었다. 또 선조의 명으로 일본 본토로 갔을 때, 일본 스님들의 요청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강화조약 체결 후 동포 3,500여 명을 데리고 온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 같은 사명대사의 활약에 당대와 후대의 스님과 유생들은 글과 마음으로 사명대사의 업적을 치켜세우고 존경의 뜻을 표했다. 서산대사의 제자이자 대사와 함께 승병장으로 활약한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 생몰연대 미상) 스님은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렸다.

직지요양원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사명대사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임금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고 보면, 스님도 종군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했다. 왜적에 항거, 스스로 송운(松雲)이라 일컬었다. 부전(不戰)으로 싸움을 하고 무사(無事)로 일을 하여 행군하되 행렬이 없는 듯하고 휘두르되 팔이 없는 듯했고, 쳐부수되 상대가 없는 듯하고 무기를 쥐어도 무기가 없는 듯하였다. 8년 동안의 전쟁에서 흰 칼날이 앞에서 교차했어도 죽음을 보기를 사는 것처럼 여겼으니, 실로 부동심(不動心)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였다.

조선 영조 때 대사성·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낸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 1689~1768)는 ‘송운대사진찬(松雲大師眞贊)’에서 “깃털 부채 휘두르니 고래 같은 오랑캐가 흉악한 짓 멈추고 물 흐르듯 말재주 쏟아내니 왜군이 정성을 바치네. 아무렇지 않게 육조(六祖)의 문답 나누었고, 백 척의 배에 백성들을 실어 구했네. …… 그 자비를 찬양한다면 금빛 털을 가진 사자라고 할 것이다. 남겨진 초상화에 대사의 맑고 고결함이 칠 푼이나 닮게 표현됐을까. 대사의 시원하고 씩씩한 영혼을 천년만년 영원토록 제향하리라.”고 칭송했다.

사명대사는 1610년 합천 해인사에서 “사대(四大, 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이제 진원(眞源)로 돌아가려 한다./ 어찌 번거롭게 왔다갔다하여 이 허깨비[幻影]와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나는 이제 입멸(入滅)해 자연의 변화에 따르려 한다.”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법랍 57년, 세수 67세였다. 해인사 서쪽 기슭에서 스님의 법구를 다비했는데,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날아가는 새들이 놀라 지저귀었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홍제암 옆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사명대사에 대한 존경과 연모의 마음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천시는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3년 사명대사길을 조성했다. 조성 당시부터 매년 ‘사명대사길 걷기대회’를 개최해 유정 스님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중생을 향한 자비사상을 되새기고 있다.

사명대사길은 직지사 아래 직지상가(직지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직지문화공원→사명대사공원→직지요양원 입구→쉼터→직지 공영주차장으로 돌아오는 편도 4.5km 코스로, 성인 발걸음으로 두 시간가량 소요된다. 직지사·직지문화공원·사명대사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최소 4~5시간 정도 여유를 갖고 순례하는 게 좋다. 직지사에 다녀오면 전체 거리가 6.5km로 늘어나지만, 힘겨울 정도는 아니다.

사명대사길 쉼터 앞에는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사명대사 조형물이 있다.

직지문화공원을 지나면 왼쪽은 직지사, 오른쪽은 사명대사길로 이어진다. 사명대사길 순례 전에 직지사에 들러 사명대사의 자취를 먼저 느껴봐야 한다. 일주문과 대양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나온다. 이 사천왕문 왼쪽에는 직사각형의 널따란 바위가 있고, 바위의 내력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있다. 이 바위에는 15세 때 출가한 사명대사와 스승인 직지사 신묵화상과의 인연담이 적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명대사는) 1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 방황을 했다. 그러던 중 직지사에 왔다가 은행나무 아래 넓은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잤다. 그때 당시 주지 신묵 스님이 법당에서 참선을 하다가 사천왕문 앞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환영(幻影)을 보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신묵화상이 나가보니 한 아이가 자고 있었다. 신묵 스님은 이 아이가 황룡임을 직감하고 제자로 삼았다.

신묵화상과 사명대사가 사제의 인연을 맺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부모자식 간이나 부부지간에도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듯, 스승과 제자 간에도 남다른 법연(法緣)이 있어야 맺어진다는 세상의 이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방향으로 들어서면 조선 정조 11년(1787)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유정 스님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명각(四溟閣)이 있다. 내부에는 사명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데, 1975년 석조 축대를 신축했고, 그 위에 건물을 해체 복원해 올려놓았다.

직지사에서 내려와 사명대사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명대사길은 직지사 매표소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가야 한다. 눈앞에 웅장한 5층 목탑(평화의 탑)이 우뚝 서 있는데, 사명대사길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평화의 탑 1층 전시공간에는 탑 제작 영상자료와 사명대사 관련 자료를 패널로 전시했고, 5층에서 보이는 전경을 CCTV를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다. 탑 외부에는 조명이 설치돼 있어, 야간에도 탑의 웅장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5층 목탑은 사명대사공원 안에 있다. 이 공원은 김천시가 14만 3,695㎡(4만 3,543평)에 조성한 연면적 9,624㎡(2,916평)의 문화·생태체험 관광단지다. 수백억 원을 들여 2011년 공사를 시작, 9년 만에 완공해 지난 6월 말 일부 시설의 문을 열었다. 공원 안에는 김천시립박물관, 건강문화원(한옥 숙박동·체험동), 솔향다원, 여행자센터도 조성돼 있다. 공원 이름은 공모를 거쳐 ‘황악산 하야로비공원’에서 ‘사명대사공원’으로 바뀌었다.

사명대사 길에는 수령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소나무가 군락을 이뤄 운치를 더한다.

사명대사공원 위쪽으로 올라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사명대사길 안내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헤매기 쉽다. 두 길 모두 사명대사길로 이어지는데, 조금이라도 고즈넉한 길을 걷고 싶다면 마을을 통과하는 왼쪽 길을 추천한다. 두 길의 합류 지점에서 직지사 노인요양원 방향으로 난 차도를 따라 200m가량 오르면 오른쪽에 ‘사명대사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잘 정비해놓은 산길이 나온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사명대사길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순례객들이 한숨 돌릴 수 있도록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쉼터 앞에는 사명대사 조형물이 있는데, 기념촬영을 하기에 적합하다.

쉼터에서 땀을 식힌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산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데, 황악산 끝자락이어서 비교적 완만해 걷기에 수월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고승길 중에서 난이도는 가장 낮다. 활엽수 군락 사이로 난 좁은 순례길 바닥에는 지난 겨울 떨어진 낙엽들이 흙과 뒤엉켜 순례객의 발이 닿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직지사로 가는 오솔길. 높이 자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산책하기에 좋다.

사명대사가 살았던 시대와는 400여 년의 간극이 있고 무성한 초목도 당시의 생명은 아니지만, 길의 고즈넉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나무 틈으로 보이는 우렁찬 황악산의 기세가 초발심을 낸 사명대사의 기상을 크게 북돋아 주지 않았을까 싶다. 활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쭉쭉 뻗은, 백색으로 몸을 휘감은 자작나무 무리가 순례객을 반긴다.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는 이 숲길을 지나면 굳고 강직한 기상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순례길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다.

사명대사는 소나무와 같은 기개와 절개를 지녔다. 스님은 스스로 호를 송운(松雲)으로 지었다. 소나무와 같이 충직하고 굳건한 기상을 지닌 자신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유롭게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구름과 같은 운수납자(雲水衲子)로서의 자신을 표현한 건 아닐까?

시문(詩文)에도 능했던 스님은 황악산 자락을 포행(布行)하며 체득한 선(禪) 수행력으로 시를 짓고, 진리를 노래했다. 생전에 선시(禪詩), 칠언율시·오언율시, 칠언절구·오언절구, 사(辭, 사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 잡문(雜文) 등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그 중 〈사명대사집〉 권4에 실려 있는 시 ‘가을 밤 헌함(정자마루)에 앉아서(秋軒夜坐)’를 소개한다.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는 나그네의 생각이 많은데
몇 마리 반딧불이 서쪽 행랑으로 날아가는구나.
높은 산에 달이 뜨고 가을 하늘이 아득히 멀고
하룻밤 돌아가려는 마음에 귀밑머리 이미 백발이로다.

직지사 사천왕문 왼쪽에는 사명대사의 출가와 관련한 직사각형의 바위가 있다.

가늘고 붉은 소나무의 몸통에 기대어 이 시를 곱씹어 보니 ‘400여 년 전 사명대사의 흔적을 좇아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엄습해왔다. 황악산의 품에서 삭발염의한 사명대사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어찌 됐든 스님은 온갖 번뇌와 싸워 이겨냈고, 그 내공을 디딤돌 삼아 왜적과 싸워 나라를 지켜냈으리라.

하산하는 길, 사명대사의 성정(性情)을 닮은 청청거목(靑靑巨木) 사이로 구름 한 조각이 바람 따라 걸림 없이 흘러간다. 사명대사는 그렇게 세상에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스님이 행한 삶의 궤적과 남겨 놓은 정신적 유산은 오고 감이 없이 그대로 남아 사바(裟婆)를 정토(淨土)로 바꾸는데 훌륭한 거름이 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이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무애해탈을 위해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나 목탁 대신 칼을 들었던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희생정신은 아닐까? 

직지사 경내에 있는 사명각. 내부에는 사명대사 진영이 모셔져 있다.

글·사진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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