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학 현대화 주도한 원효학의 세계적 선구자

이기영 박사.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 1922~1996) 박사는 황해도 봉산군 만천면이 고향이다. 대지주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41년 경성제대(현 서울대)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고, 1943년 일제의 학병징용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45년 포로가 되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감금되었다가 해방과 동시에 석방됐는데, 집안에서는 전사한 것으로 간주해 제사까지 지냈던 터였다. 귀국 후 공산당 치하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결국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전쟁 당시 자리를 잡은 곳은 대구였는데, 효성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가톨릭재단 통해 유럽 유학

이기영 박사는 1954년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장학금을 받고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50년대에 유럽 유학을 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기숙사비를 아끼려고 가톨릭수도원에 머물며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한국에 남아있던 노모 역시 대구 칠성시장서 목판을 깔고 담배를 팔고, 아내는 채소를 팔며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루뱅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는데, 호머의 시를 줄줄 외우고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급생들에게 기가 질려서 전과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은사이자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E.라모뜨(E.Lamotte) 교수를 만나 그 문하에서 6년을 연찬(硏鑽)했다.

1960년 ‘참회의 기원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귀국해 동국대·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강의했는데, 가는 곳마다 최고 인기강좌로 명성을 얻었다. 몸담을 대학을 정해야 했는데, 유학을 지원해 준 가톨릭 교단에 대한 신의로는 서강대를 택해야 했지만, 불교학의 본당인 동국대에 대한 애착도 컸다. 서강대가 불교학 전공자를 뽑는데 주저할 때, 동국대 백성욱 총장이 손을 내밀었다. 백 총장은 만만치 않았던 불교계의 반발을 누르고 1964년 선생님을 전임교수로 임용하면서 인도철학과를 창설해 초대 학과장으로 임명했다.

1967년 〈원효사상〉을 출판했는데, 197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선정한 해방 후 25년 한국의 10대 명저로 선정한 명저다. 원효의 해동소(海東疏)를 중심으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 이 책은 선생님을 원효 연구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1968년에 동국대 불교대학장으로 취임했는데, 곧 사퇴했다. 일부 학생들의 불교대학장실 점거가 원인이었는데 천주교도가 불교대학장을 맡아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당시 선생님은 청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불자(법명은 설봉(雪峰))라고 천명했지만, 결국 학자적 자존심 때문에 동국대를 떠났다.

경주 불국사에서 춘성 스님을 만난 이기영 박사(우측). 좌측은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첫 만남

필자는 1965년 고려대에 입학해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1966년 12월, 서울대에 다니던 친구의 제안으로 동숭동 캠퍼스에서 ‘철학 특강’을 청강하게 됐는데, 이 특강은 필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박종홍 선생님의 강의로 기억하는데, 그날 이후 ‘한국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불교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에 동국대 입학을 결심했다. 학교 측에서 편입학을 권유했지만, 2개월 간 재수학원을 다닌 후 1967년 2월 동국대 입시를 치르고 인도철학과에 진학했다.

학부 1학년 때 처음 만난 선생님은 한문 문헌 위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교리 체계를 이해해온 학생들에게 산스크리트어를 들이밀었다. 생소한 언어에 당황하는 우리에게 “자네들은 부처님이 중국 사람인줄 아는가? 부처님은 인도사람이니 당연히 그곳의 말로 된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맞지. 한문만을 고집하는 건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영어를 모르는 것과 같아.”라고 일침을 가하셨다. 또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벨기에에서 공부했던 이력 탓인지 불교학을 가르치면서도 서양철학과 실존철학, 노장사상까지 끌어다 말씀하시면서 한국불교의 위대성을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평소 불교 연구의 기본적 외국어는 산스크리트(Sanskrit), 빨리(Pālī), 영어, 한문임을 역설하셨다. 한문 위주, 훈고학적 태도, 한국불교에 대한 맹목적 집착만이 불교학인줄 알았던 당시의 교계로서는 충격적 연구태도였다. 선생님은 네 가지 외국어 외에도 프랑스어, 티베트어에 해박했고 라틴어가 수준급이었다. 선생님의 학문세계가 깊고 넓었던 까닭은 바로 그 탁월한 외국어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에서 공부하신 탓인지 필자에게 맞담배를 권했을 정도로 격의가 없으셨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수련대회를 할 때는 엄격하셨다. 참선을 할 때 자세가 흐트러지자 장군죽비로 내리치셨다. “불교학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몸이 따라가야 한다.”며 공부와 더불어 실천을 강조하셨다.

선생님이 동국대를 떠날 때 필자는 졸업반이었다. 필자는 선생님을 따라 영남대로 가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선생님이 당시 단과대였던 국민대 학장으로 옮길 때는 다시 동국대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국민대에 잠시 머물다가 동국대 이선근 총장과의 인연 덕에 1974년 동국대로 돌아오셨다. 필자는 이런 인연 속에 선생님과 공동저술, 공동연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1985년 한국불교연구원 주최로 열린 세미나 좌석에는 이영자·서경수·이기영 교수가 앉아있고, 필자(뒷줄 가운데) 좌우로 목정배·김상현·권기종 교수와 법타 스님 등이 보인다.

한국불교연구원 창립

첫 공동저술은 영남대에 계실 때였다. 선생님은 영남대 신라문화연구소의 소장을, 필자는 연구소의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문화공보부 연구비를 지원받아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을 조사했다. 당시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에 대한 자료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오래된 지도와 윤경렬 씨가 남산 기슭에 살면서 기고한 글만 있었다. 선생님이 단장이 되고 필자가 간사가 되어 조사를 시작했다. 시내 여관에 여장을 풀고 남산을 오르내리다가 시간이 아까워 아예 남산에 텐트를 치고 선생님과 2주를 보냈다. 동남계곡과 서남계곡을 10차례 이상 답사했다. 덕분에 필자는 남산 전문가가 됐다. 당시의 조사결과를 담은 책에는 선생님과 필자의 이름이 같이 올랐다. 그 가운데 선생님이 유독 애착을 가진 연구테마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불교 연구였다. 〈신라의 폐사〉 Ⅰ·Ⅱ는 경주 남산과 경주지역에 남아있던 옛 절터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국불교연구원이 2001년 경기도 광주에 연수원으로 지은 유마정사의 전경.

70년대 초반 불교계 내부에서는 스님들의 전횡적 교단운영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이 일고 있었다. 그래서 재가불교 교단의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재가만의 교단은 반대하셨다. 사부중이라는 불교의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는 조화를 이뤄야하는 관계이지 결코 대립일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로 일관하셨다. 다만 재가불자들의 리더십에 대한 부분은 고민을 하셨는데, 이에 대해 재가신자들도 청정한 도덕성을 지녀야 신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다. 따라서 기존의 오계(五戒)에 대한 재해석, 삼취정계(三聚淨戒)의 현실적 응용 등을 고민하셨다. 한국불교연구원은 1974년에 창립된 국내 유일의 불교학술단체인데, 한국불교연구원 구도회의 법회 때에는 삼대강령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반드시 큰소리로 복창하고 법회를 시작하곤 했다.

현판.

1. 우리는 구도자, 보살의 길을 간다.
1. 우리는 사무량심(四無量心),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실천한다.
1. 우리는 귀일심원(歸一心源) 이익중생(利益衆生)의 이상을 산다.

한국불교연구원 창립 멤버는 이기영 원장, 고 서경수(徐景洙)·고 황수영(黃壽永) 지도위원, 연구위원으로 이민용(李珉容)·고 장충식(張忠植) 그리고 필자 등이었다. 당시 한국불교연구원을 운영하는 최소의 경비는 일지사(一志社)에서 간행한 〈한국의 사찰〉 원고료가 전부였다. 연구위원 세 명은 각자의 전공에 따라 한 곳의 사찰을 역사·문화재·고승 등으로 나누어 집필했다. 구성원들은 삼보사찰을 필두로 우리나라의 유수한 사찰들을 망라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불국사를 필두로 석굴암·범어사·전등사 등 30여 권을 간행했다.

2003년 제막한 이기영 박사 추모탑.

한국불교 세계화의 원력

선생님의 연구태도는 불교의 입장에서 조명해온 비교사상적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포괄자(Das Umgriefende)에 대한 불교적 입장’, ‘하나(Advaita)를 향한 커뮤니케이션’, ‘종교간의 대화, 무엇이 핵심인가’ 등은 선생님의 비교종교적 관점을 대변하는 중요한 논문들이다. 특히 출세작 〈원효사상〉 이후에 선생님은 원효와 관련된 연구논문만 30여 편을 남겼다. 선생님은 원효사상의 골격을 반야·유식사상의 토대 위에 화엄적 융합(融合)으로 회향하는 대승불교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원효철학의 핵심은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일[歸一心源]’이며 원효가 보여준 삶의 궤적은 곧 ‘중생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일[利益衆生]’이라고 천명했다.

원효연구로 시작한 선생님의 불교학 여정은 한국불교 세계화라는 꿈으로 발전한다. 선생님은 세계의 불교학자들과 남다른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동문수학했던 뒤르뜨(Dürt) 박사, U.C버클리의 랑카스터(Lancaster) 교수, 도쿄대학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같은 대학의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등과 막역한 사이였다. 틈나는 대로 국제 불교학술회의를 개최하거나 특강을 마련했고, 당신도 시간을 쪼개어 유럽·미국·중국·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강의와 심포지엄의 주제발표자로 나섰다.

한국불교를 세계화하려면 한국불교의 특성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해답을 원효에게서 찾았다. 중국이 종파불교, 일본이 정토불교를 표방한다면 한국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회향하는 장점, 즉 일승(一乘)불교이면서 선교합일을 도모하는 원융회통성(圓融會通性)이라고 보았다. 하나를 추구하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많은 개성을 지녔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통일되는 아름다운 불교가 이 땅의 전통이고 특징이라고 파악했다.

국제학술회의 석상에서 타계

필자는 학부 때부터 석사·박사까지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다. 불교학자로 성장하기까지 선생님의 학술적 역량을 배우고 따랐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발밑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분이 공부한 흔적은 대장경 속에 칠해진 형광싸인펜,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메모 등으로 남아있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신삼국유사(新三國遺事)를 편집해 보라고 지시하신 적이 있다. 원본은 최남선(崔南善) 본을 썼고 한글번역본은 권상노(權相老) 본을 썼는데, 〈삼국유사〉 전체를 해체해서 시대순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삼국사기〉는 편년체 형식이기 때문에 시대의 판단이 용이하지만 〈삼국유사〉는 들쭉날쭉해서 좀처럼 시대구분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경전윤독회를 매주 열었는데, 〈미륵삼부경〉·〈유마경〉·〈승만경〉·〈법구경〉 등으로 기억한다. 윤독회 날짜 전에 해당 경전의 내용을 반드시 손으로 써서 제출해야 했다. 이때의 훈련으로 필자는 〈고려대장경 해제색인(解題索引)〉을 출판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공부에 있어서는 냉혹하리만치 엄격했지만 일상에서는 자상하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었다. 필자는 한 번도 선생님께 칭찬을 들은 적이 없는데 서경수 교수 장례식장에서 방지하 스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내심 놀란 적이 있다. 이기영·서경수 두 분이 연구실에서 환담하면서 “좋은 제자 하나 얻기가 힘들다.”고 말씀하면서 “그래도 정병조 하나 건졌네.” 하셨다는 것이다. 서경수 교수가 웃으면서 “아니, 당신 혼자가 아니라 나하고 합작이야.” 하신 말씀을 나한테 전언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동료들은 필자를 놀릴 때 ‘아버지가 둘[二父之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 두 분의 감화는 필자의 불교관을 결정했고 삶의 가치관으로 이어졌다. 홍익대 총장을 역임한 이항녕 교수는 이기영 선생님은 원효의 후신이고, 서경수 선생님의 전생은 달마(達磨) 대사였다고 말하곤 했다.

선생님은 1996년 11월 국제학술회의 석상에서 홀연히 타계하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개회식에서 한 사람씩 외국인 학자들의 경력과 학문세계를 일일이 소개하고, 자신의 기조강연도 담담히 발표하셨다. 청중의 박수갈채를 뒤로하고 복도에 나설 때 갑자기 심근경색이 닥쳤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학술열반’이라는 용어를 썼다. 평생 학술을 연찬했던 노학자에게 붙여진 영예로운 호칭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유골은 평생토록 흠모하였던 경주 동남산의 보리암 인근에 일부 산골했고, 일부는 사후 후학들이 건립한 경기도 광주의 유마정사에서 수목장으로 모셨다.

이기영 박사는 1990년대 중반 경주고속철도백지화운동추진본부 위원장을 맡아 경주 일원의 문화재 보존을 이뤄냈다. 1996년 5월 종로 탑골공원에서 열린 국민대회에는 현 천태종종의회의장 도원 스님(당시 총무부장), 시인 고은, 윤청광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의 모습도 보인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철학박사)했다. 동국대학교 교수·부총장·인도 네루(Nehru)대학 교수·한국불교연구원장·금강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실천불교〉·〈불교문화사론〉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