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대왕이 대탑 세운 세계 最古의 불교 성지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산치대탑.

인도는 붓다의 고향이다. 그래서 인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가 있다. 바로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치 불교기념물군(Buddhist Monuments at Sanchi)’이다. 공식 명칭은 ‘불교기념물’이지만 의미상 ‘불교유적군’으로 표기한다. 인도 보팔(Bhopal)에서 4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치(Sanchi)는 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2세기까지 인도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산치에는 사원·왕궁·수도원·돌기둥 등 불교유적군이 있는데, B.C. 3세기부터 A.D. 1세기까지의 다양한 유적이 혼재해 있다. 붓다가 단 한 차례도 방문한 적 없는 산치가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상수제자 두 분의 사리가 발견된 3번 탑.

주변에 드넓은 평원과 2개의 강이 흐르다보니 낮은 언덕을 오르면 데칸고원(Deccan Plat.)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사방으로 열려있고, 아침 안개마저 내려다보인다. 언덕 정상에는 반구형의 돔 모양을 한 크고 작은 탑이 햇살을 받아 한껏 곡선미를 뽐낸다. 그 중에서도 맨 위쪽에 위치한 탑은 크기도 크고, 형태도 완벽해 가장 아름답다. 탑신은 이리보아도 원형이고, 저리보아도 원형이다. 심지어 네 곳 탑문까지 두루뭉술하게 다듬어져 부드러운 언덕과 잘 어우러진다.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위엄을 잃지 않는 이 거대한 탑이 바로 ‘산치대탑’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수행처

남쪽 탑문 옆에 세워진 아소카 석주. 세 부분으로 부러졌다.

900m 높이의 산치 언덕이 언제부터 불교 수행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도, 전해지는 전설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수행처로 존재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아소카대왕(Vardhana Aśoka, 재위 B.C. 273~232)이 산치 중앙에 대탑을 조성한 후 석주를 세우면서 불교성지로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아소카대왕의 사랑이야기가 더해져 산치대탑은 신비로운 불교성지이자, 애잔하고 아련한 사랑의 현장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아소카대왕의 사랑이야기는 인도 기록에는 없고 스리랑카의 고서인 〈마하밤사(Mahāvaṃsa, 大史)〉와 〈디파밤사(Dīpavaṃsa, 島史)〉에 전한다. 그런데 왜 인도 땅에서 일어났던 사랑이야기가 섬나라 스리랑카 고서에 등장할까? 그것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Mahinda, B.C. 285~205) 스님이 바로 사랑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부러진 아소카 석주의 중간부분이 옆에 전시돼 있다.

아소카대왕 사망 이후 마우리아 왕조는 B.C. 100년 경 푸샤미트라(Puhsyamitra) 장군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슝가(Śunga)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했다. 슝가 왕조의 왕들은 바라문교를 신봉했지만 불교를 신봉했던 몇몇 왕에 의해 산치는 불교성지로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산치대탑은 아소카대왕이 전돌로 조성했는데, 후에 전돌을 넓은 석재로 덮고 석고로 외벽을 마무리하는 확장공사가 이루어져 지금과 같이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완성됐다. 이 모두가 슝가 왕조 때 이루어진 일이다.

아소카 석주에 새겨진 아소카 칙령.

불자 상인 주도로 대공사 진행

이런 대공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의 통치세력 중에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고, 지역 경제권 또한 불교를 신봉하는 상인들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슝가 왕조의 정치와 경제를 움직이는 두 도시는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와 수도인 비디샤(Vidisha)인데, 산치는 비디샤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비디샤는 마힌다 스님의 고향이자, 어머니 데비(Devi) 부인 집안의 경제적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도시이다. 이후에도 불교를 신봉하는 안드라(Andhra) 왕조(B.C. 3세기 말~A.D. 3세기 전반)가 들어서면서 400년 넘게 사회적으로 안정되자, 수행처 산치에도 남쪽 탑문을 시작으로 많은 조각 장엄물이 조성되었다. 안드라 왕조 이후에 세워진 왕조에서도 계속 사원을 조성하면서, 산치는 데칸고원에 우뚝 선 성지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산치는 단 한 번의 공사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마우리아 왕조 이전부터 △슝가 왕조 △인드라 왕조 △쿠샨 왕조 △굽타 왕조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약 2,000년에 걸쳐 조성된 불교성지이다.

북쪽 탑문의 앞면.

그러나 13세기에 중부 인도를 지배하던 팔라(Pala) 왕조가 이슬람교도에 의해 멸망하면서 인도의 불교와 함께 산치도 점차 힌두와 습합해 명맥만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수행자가 없는 수행처가 되었다. 잊어진 사원이 되어버린 산치는 울창한 초목에 뒤덮여 있었는데, 영국 신민치하였던 1818년, 테일러(Taylor) 총독에 의해 존재가 확인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확인 이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몰려든 도굴꾼에 의해 상당수의 유물이 도굴되고 탑도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영국인에 의한 어설픈 발굴로 오히려 훼손이 가중되었다.

북쪽 탑문의 뒷면.

1822년에는 존슨(Johnson) 대위에 의해 산치대탑의 탑신 한쪽이 개방되면서 일부가 붕괴되었다. 1851년 커닝엄(Cunningham)과 메이지(Maisey)는 2번 탑과 3번 탑을 발굴해 석함을 찾아낸 후 중심기둥을 쓰러트려 붕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신민치하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산치는 1881년이 되서야 제대로 된 보수와 보존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였고 발굴된 유물들도 대부분 영국으로 반출된 상황이었기에 산치의 옛 모습을 찾기에는 너무나 늦은 뒤였다. 독립 이후 인도정부가 여러 차례 산치 불교유적군의 체계적인 발굴과 보수를 이어오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탑문에 조성된 대지의 여신인 지모신상

불교유적군 주인공 산치대탑

수많은 사원터와 탑이 있는 산치 불교유적군 중 주인공은 단연 산치대탑이다. 산치대탑은 바로 옆에 있는 3번 탑을 기초로 설계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의 산치대탑은 3번 탑보다 크기와 조각형태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산치대탑은 불자들의 보시로 계속 확장공사를 해서 커졌고, 조각장엄도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치대탑은 전통적인 인도묘지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아 조성됐는데,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묘지의 원형이기도 하다. 탑의 구성은 크게 하단의 기단부(基壇部, Medhi)와 중간의 탑신(塔身, 覆鉢, Anda)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相輪部)로 나뉜다. 전체가 수직으로 구성되었는데, 높이 16.5m, 지름 37m에 이른다. 이 탑 전체를 울타리(欄楯, Vedika)로 두르고 사방에 탑문(塔門, Torana)을 조성해 신성함을 나타냈다. 초기에 이 울타리와 탑문은 목재로 조성했는데, 후에 석조로 바뀌면서 튼튼한 재질에 다양한 조각으로 장엄이 가능해졌다.

네 개의 탑문은 기둥을 이루는 두 개의 석주 위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높이가 8.35m에 이른다. 직사각의 석재이지만 끝부분을 둥글게 마무리했고, 수평으로 살짝 곡선 처리가 되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시각적 상승감도 돋보이게 했다. 또한 모든 면을 조각으로 가득 채웠는데, 불상이전 시대에 조성했기에 불상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탑·보리수·좌대·법륜 등의 상징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조각에는 수많은 명문을 비롯해 불전도 28장면, 자타카 6종 등이 새겨져 있어 ‘불교 교리의 교과서’라고 불릴 뿐 만 아니라 미술사·고고학적으로도 가치가 극대화되었다.

동문의 조각과 배경이 되는 탑신.

네 개의 탑문을 통과하면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부가 있다. 기단은 사방으로 네 개의 계단을 통해 탑신으로 오를 수 있게 돼 있는데 이 계단의 형태가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돌아가는 스와스티카(Svastika, 卍자형)를 취하고 있다. 기단 위에 조성된 탑신은 지름이 35m에 이르는 반원형이다. 이 돔 형태는 하늘 즉, 우주를 뜻한다. 그래서 탑신은 하늘이고 기단부는 대지가 된다. 반원형 돔 맨 위에는 상륜부가 조성돼 있는데, 탑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상륜부분은 사각의 울타리(平頭, Harmika) 안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산개(傘蓋, Chatravali)가 윤간(輪竿)에 올려졌다.

사리불·목건련 유골함 나온 3번 탑

산치대탑의 주변에는 작은 돔형의 탑이 두 개 더 있다. 크기도 작고 훼손도 심하지만 3번 탑은 산치 불교유적군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851년 발굴과정에서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上首弟子)인 사리푸트라(Śāriputr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ana, 目犍連) 존자의 유골함이 발견돼 당시 산치의 종교적 위상을 짐작하게 했다. 산치대탑에서 서쪽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면 3번 탑보다도 더 많이 훼손된 2번 탑이 있는데 탑문도 상륜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탑신마저 완벽하지 않다.

기단울타리와 탑신 사이에 난 통로.

이 탑의 조각으로 보았을 때 산치대탑 조성 이후인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훼손이 심해 미술사적 가치는 낮은 대신 이곳에서 아라한의 사리함이 발굴돼 종교적으로 더욱 가치 있는 탑이다. 1851년 탑의 중앙에서 작은 사암으로 만든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명문에 의해 아라한 열 명의 사리란 게 밝혀졌다. 이곳에 새겨진 아라한들의 이름은 〈디파밤사〉에 기록된 이들인데 이중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 스님은 아소카대왕이 참여한 ‘제3차 결집’을 주도했던 스님이므로 탑의 조성시기를 가름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 작업을 마무리한 초기의 두 개 탑과는 별개로 대탑 주변으로 작은 탑들이 많은데 이 탑들은 이곳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의 탑이다.

울타리 안에서 기단으로 오르는 네 개의 계단이 스바스티카(svastika, 卍자형)를 취하고 있다.

시대상 반영한 50여 사원 건립

산치대탑을 중심으로 많은 사원이 오랜 시간을 두고 조성되었는데 최근 발굴과정에서 50개가 넘는 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원의 형태도 제각각인데 이는 각각의 시대를 반영한 형태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 산치대탑의 동쪽에 있는 사원 터에는 법당과 승원이 함께 조성됐다. 많이 붕괴되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2층의 형태로 된 작은 방에 석불이 안치돼 있고 별도로 승방이 있는 형태다. 이곳은 7세기경 건립됐지만 화재로 불탔고, 9세기에 다시 건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아있는 석재 조각의 선이 굵고 유려해서 채색장엄이 무척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아래편에는 높은 돌기둥을 사용한 사원도 있는데, 이 또한 7세기에 세워진 사원이다. 돌기둥 안쪽 중심에는 스투파나 불상을 안치한 예배공간이 있고, 기둥 밖으로 회랑이 연결돼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초기 불교사원에 많이 적용된 형태이다. 초기에는 사원의 일부분을 개인 기도처이자 승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수행자와 순례자가 증가하면서 승방이 더 필요로 하게 되자, 별도의 공간을 조성했다. 현재 승방의 위치는 산치대탑에서 볼 때 남쪽 언덕 아래에 있는데 산치대탑이 올려다 보이면서도 돌계단을 조성해 직선거리로 마주하는 모양새다. 승방 터를 보면 30m가 조금 넘는 정사각형으로 중앙에 큰 방이 있고, 사방으로 작은 22개의 방이 줄지어 있는 인도 전통형식이다.

현재는 사각의 반듯한 기초만 보이는데 발굴시 많은 양의 숯이 발견돼 목조건축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승방 옆에는 사원 조성에 필요한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는데, 처음 설계 때부터 상수원으로 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승방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산치 불교유적군의 구조는 종교적 중요도에 따라 수직 구조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세워진 사원 터. 높은 석주로 원시사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유적 입구에 유물 전시한 박물관

산치 불교유적군 입구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유물 대부분이 석물이고, 비록 창고와 같은 곳에 버려지듯 전시돼 있지만 유물 하나하나의 의미가 크다. 특히 눈에 띄는 석물은 석주(石柱)다. 아소카대왕이 제3차 결집 이후 전국에 석주를 세우거나 마애비문(磨崖碑文)을 조성해 수행처의 정화를 위한 법칙령(法勅令)을 새겼는데, 산치에도 작은 석주가 세워졌다.

산치대탑의 남문 옆에 세워진 석주는 부러져 현장에는 밑둥만 있고 석주는 별도로 전시돼 있는데 이곳에 법칙령이 조각돼 있다. 또한 아소카 석주의 상징인 상부의 사자상은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 석주 하나가 세 부분으로 흩어져 있는 셈이다. 이곳에는 아소카 석주 이외에도 많은 석주가 세워졌다.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 즉위하면 자신도 아소카대왕처럼 ‘불법(Dharma)에 의한 통치’를 다짐하면서 석주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그 많던 석주는 대부분 사라졌다. 아소카 석주마저도 마을 농부가 사탕수수를 짜는 맷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록 사원의 석물들이 흩어져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고 해도 산치에 남아있는 수많은 돌들은 보석 같은 존재로 남아 오늘날까지 아소카대왕의 법과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승방 터와 오른쪽의 채석장을 활용한 연못.

김성철 사진작가. 대학에서 사진을, 대학원에서 문화재를 전공했다. 문화재전문작가이자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화재 관련 책에 사진을 찍었다. 현재 문화재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49’와 해외유적도시 전문출판사인 ‘두르가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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