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영국 식민지 시절 개발
고품질 차 연간 5,000톤 생산

태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적도 부근에 자리하고 있어 연평균 기온이 32~34도를 웃돌지만, 중북부 정글 속 해발 1,500m의 고원지대는 연평균 기온이 15~20도에 불과할 정도로 선선하다.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은 이 비옥한 땅에 차나무를 심었는데, 바로 카메론 하일랜드(Cameron Highlands)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홍차의 산지, 카메론 하일랜드 차밭을 소개한다.

말레이시아는 일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계속되지만, 고원지대인 카메론 하일랜드의 연평균 기온은 15~20도 사이다.

말레이시아 관광청의 슬로건은 ‘진짜 아시아를 보려면, 말레이시아에 오세요.(Malaysia, Truly Asia)’다. 천혜의 자연환경·맛있는 음식·친절한 사람들·문화의 용광로·인종의 멜팅팟(Melting Pot) 등 말레이시아를 매력적인 ‘진짜 아시아’로 만들어주는 이유는 끝이 없다.

연평균 15~20도 산지에 차밭 조성

동남아 국가의 날씨를 떠올리면 작열하는 태양, 밤이 되어서야 조금 선선해지는 날씨, 시원하게 쏟아지는 스콜 등이 연상되지 않을까 싶다. 일 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를 경험하는 말레이시아. 그런 말레이시아에 연평균 기온이 15~20도를 오가는 곳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정말?’하고 되묻곤 한다. 말레이시아 중북부 정글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남짓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카메론 벨리(Cameron Valley)’라는 하얗고 커다란 글씨가 나타난다. 언덕을 내려다보며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사람들, 한눈에 모두 담기 힘든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보려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푸른 고원지대, 카메론 하일랜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카메론 하일랜드 차밭의 아름다운 풍경.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보다 면적이 넓다.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1.3배 정도다. 말레이시아는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태국·싱가포르와 맞닿아 있는 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부르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보르네오 섬쪽의 동 말레이시아다. 서쪽과 동쪽을 오가려면 비행기로 2시간 이상 비행을 해야 한다. 서 말레이시아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동 말레이시아는 원주민과 자연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서로 상반된 매력을 자랑한다. 원시림과 각종 희귀동물로 가득한 동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095m의 키나발루 산(Mt. Kinabalu)이다. 반면 화려한 야경과 드높은 마천루를 품고 있는 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180m의 구눙 용 블라르(Gunung Yong Belar) 다. 바로 그 인근에 카메론 하일랜드가 자리하고 있다.

월리엄 카메론이 발견

1885년 영국 정부의 지질 조사원이었던 윌리엄 카메론(William Cameron)은 서 말레이시아의 중심부에 자리한 페락 주와 파항 주의 경계를 찾아 정글을 탐험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다가 탁 트인 풍광의 너른 지형을 발견했는데, 바로 카메론 하일랜드다. 지질 조사원 카메론의 이름이 지명이 된 이유다.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서다.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원시림이었던 곳에 길을 내고, 1925년 조지 맥스웰(George Maxwell)이 역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1931년에는 카메론 하일랜드로 이어지는 24km의 도로가 건설되고, 증기로 움직이는 중장비가 공급되면서 카메론 하일랜드는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고원지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험준한 고원지대가 개발되는 과정에는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은 무더위와 끝없이 싸워야했고, 말라리아와 뎅기열, 풍토병 등을 이겨내야 했다. 카메론 하일랜드는 1928년 11월에 처음 개발을 시작했는데, 투입된 인력만 3,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공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400여 명이 열사병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한다. 공사비용도 300만 달러가 소요되는 대공사였다고 전해지는데, 쉽지 않은 개발과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서 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레이시아 전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생명의 씨앗들로, 푸른 찻잎과 빨갛게 영근 딸기, 은은한 보랏빛의 라벤더와 선명하도록 샛노란 옥수수였다.

‘BOH’는 ‘Best Of Highlands’를 의미하는데, 1929년부터 카메론 하일랜드 최고의 차를 담았다는 자부심을 나타낸다. 이 차밭 전망대에는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1929년 설립된 영국 차 회사 ‘BOH’

이곳에 대규모 차밭을 만든 건 1929년 영국인이 세운 차 회사 ‘BOH’다. 이 회사는 말레이시아 차 브랜드를 대표한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워낙 유명해 한국 관광객들이 귀국할 때 한아름 구입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BOH’는 ‘Best Of Highlands’를 의미하는데, 1929년부터 카메론 하일랜드 최고의 차만 담았다는 자부심을 나타낸다. 그래서 카메론 하일랜드에서 생산된 ‘BOH Tea’에만 특별히 ‘카메론 하일랜드’라는 이름이 쓰인다.

카메론 하일랜드의 차나무는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종이다. 이 종은 보통 16~20m까지 자라는데, 고원지대인 카메론 하일랜드에서는 1m 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다. 낮은 키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닿기 쉬워 직접 수확할 수 있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꾸준한 품질을 유지하며 대량생산을 하기에도 좋다. 이 지역 찻잎의 품질이 우수한 이유는 이런 환경에 있다. 먼저 찻잎이 자라는 기간을 고려해 매일 새로운 구역에서 찻잎을 수확하더라도 8~9일 정도 지나면 다시 처음 차밭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찻잎을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환경이 좋다. 또한 연중 차 생산량이 일정하고, 계절별 생산량의 격차가 적어서 수준 높은 차 품질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

‘BOH’ 차 농장은 현재 1,200ha에서 연간 4,000t 정도를 생산하는데, 말레이시아 전체 생산량의 70%에 해당한다. 한 직원이 수확한 차를 한 곳에 모으고 있다. 카

말레이시아는 세계 18번째의 차 생산 국가로, 세계 차 전체 생산량의 약 0.5%를 생산한다. ‘BOH’ 차 농장은 현재 1,200ha에서 연간 4,000t 정도를 생산하는데 말레이시아 전체 생산량의 70% 수준이다. 전 세계 생산량으로 계산하면 0.3%를 조금 넘는데, 하루에 550만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는 분량이다. 주로 홍차를 생산하는데, 색이 선명하고, 우려내면 황금빛이 감돈다. 입안을 감도는 풍미가 부드럽고 깔끔하다. 이외에 프리미엄 녹차·백차·우롱차·허브티·얼그레이티 등도 생산한다. 생산품의 80%는 국내에서 소비되고, 나머지를 미국·일본·싱가포르·브루나이·아랍에미리트 등에 수출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대표 휴양지로 거듭나

이외에도 카메론 하일랜드에는 바랏 티(Bharat tea)로 알려져 있는 ‘카메론 밸리 티(Cameron Valley Tea)’ 농장이 있다. 이 농장은 일찍이 말레이시아로 건너온 인도인이 1933년 설립했는데, 약 700ha 규모의 차밭에서 매년 약 900t의 차를 생산하고 있다. 생산하는 차종류는 ‘BOH’ 농장과 비슷한데, 차맛도 ‘BOH’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 바랏 티에서는 카메론 밸리 티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스리랑카나 남인도 풍의 차를 제공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딸기맛 차·오렌지맛 차·페퍼민트 차 등이 인기가 높다.

EBS의 간판 프로그램이자 장수 프로그램인 ‘세계테마기행’에서 말레이시아를 다룬 횟수는 총 여덟 번이다. 그 중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곳이 바로 카메론 하일랜드다. 그만큼 카메론 하일랜드는 말레이시아에서 상징적 장소이자, 귀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13년 전 말레이시아에서 4년 간 거주할 당시 EBS 세계테마기행 ‘말레이시아·태국’ 편인 5부작 ‘오지 말레이 반도’에 출연한 바 있다. 이때 첫 에피소드로 카메론 하일랜드를 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카메론 하일랜드가 나만 알고 싶은 곳, 특별한 휴식을 허락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무려 22일 간 길고 힘든 촬영을 하면서도 따뜻한 홍차, 달콤한 딸기 케이크, 바쁜 도시의 일상을 잊게 해주는 초록 바다를 볼 수 있는 카메론 하일랜드 덕분에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카메론 하일랜드에 있는 바랏(Bharat) 차 농장의 아름다운 풍경.

카메론 하일랜드는 차 농장이 운영되면서 유럽인들이 몰려왔다. 1934년에 이스턴(Eastern) 호텔이 문을 열었고, 이후 세월을 거치면서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휴양지로 거듭나게 된다. 현재 카메론 하일랜드는 상당한 규모로 넓어졌다. 지역의 중심지는 타나 라타(Tanah Rata)인데, 쿠알라룸푸르나 이포 지역에서 접근하기 편리해 리조트와 호텔이 몰려 있는 곳이다. 북쪽에는 캄풍 라자(Kampung Raja), 또 남쪽에는 카메론 하일랜드의 첫 마을인 링렛(Ringlet)이 있다. 또 대규모 농업지역인 키 팜(Kea Farm), 보티(BOH Tea)농장을 비롯해 딸기농장·장미정원·나비정원 등으로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브린창(Brinchang)도 인근에 있다.

필자가 카메론 하일랜드 ‘BOH’ 차밭을 걷고 있다.

홍차 사랑이 유별난 영국인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된 카메론 하일랜드가 홍차의 산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다른 말로 하일 티(High Tea)를 즐기는 영국인들의 특성상, 비옥한 고원지대에 녹차를 심고, 품질 좋은 녹차나 홍차를 만드는 티 플랜테이션(Tea Plantation)을 시작하기에 카메론 하일랜드처럼 좋은 곳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카메론 하일랜드는 유명세를 떨쳤을 것이다. 차밭 대신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하게 딸기가 생산되는 특산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카메론 하일랜드에는 라벤더·옥수수·선인장 등 말레이시아에서 보기 힘든 작물을 직접 보고 경험해 볼 수 있는 체험시설이 많다. 만약 말레이시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카메론 하일랜드에 가서 녹차·홍차 등 품질 좋은 차뿐만 아니라, 라벤더로 만든 각종 제품, 딸기가 들어간 음료나 디저트, 옥수수로 만든 특산품도 만나보길 권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보(BOH) 차 농장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태우기 위해 농장에 들어서는 스쿨버스, 차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숙소, 카메론 하일랜드의 딸기하우스, 한 차 농장 입구에 위치한 시장과 게스트하우스.

이주혁 EBS FM 모닝스페셜 영어 작가. 말레이시아에 4년 간 거주하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말레이시아 지역 전문가, 말레이시아 전문 작가 및 인플루언서(influencer)로 활동했다. EBS FM 라디오 프로그램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 DJ로 활약했고, EBS 세계테마기행 ‘오지 말레이 반도’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