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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탁발의 추억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 승인 2020.08.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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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향 탁발에서
양방향 순환 전환은
탁발의 참뜻 깃들어

스님이 대문에 들어서서 염불하면, 부엌에서 곡식 종발을 들고 염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는 주부들이 많았다. 어느 노스님이 들려주신 50년 전 탁발을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자신의 집이 잘 되도록 축원하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온전히 듣고 싶은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부터 탁발은 재가자의 재보시(財布施)와 출자가의 법보시(法布施)가 오가며 공덕을 쌓아온 현장이었다.

남방불교국가에서 지금도 탁발을 이어가는 데 비해, 북방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찰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자급자족의 생산불교가 자리 잡았다. 탁발은 자율적으로 열어두었으나, 현대에 와서 다종교사회와 맞지 않고 출가자의 위의를 해치는 일이 생겨남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탁발이 금지된 뒤에도 마을에서는 탁발전통이 한동안 이어졌다. 1970년대까지 선방스님 수십 인이 맨발로 마을에 내려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탁발하는가하면, 지금도 학인스님들이 매년 한차례 통과의례처럼 탁발을 지속하는 사찰도 있다. 모두 초기승단의 탁발정신을 새기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이다.

그런데 사찰도 스님도 빈한했던 시절에, 탁발은 자비량(自費糧)을 만드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선방수좌와 강원학인은 자신의 양식과 이불을 각자 지참해야 했고, 갓 행자생활을 마친 새내기 스님들도 은사스님이 넉넉지 못할 경우 탁발로 곡식을 마련해 학비를 댔다. “은사스님이 강원을 안 보내줘서 내려갈 차비와 학비를 탁발로 마련했다. 나는 절실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시장 가게마다 반야심경을 하며 다녔는데,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따라나선 도반 두 명은 전봇대 뒤에 숨어서 울었다.” 어느 비구니스님은 설익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 모두 수행의 소중한 디딤돌이었다고 말했다.

운문사 아랫마을에서는 2월 초하룻날 스님들에게 떡을 보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 스님들이 구역을 나누어 마을을 돌며 한두 개씩 ‘떡 탁발’을 받아오면 모든 대중이 먹고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떡 탁발은 사라졌지만, 그 풍습이 남아 지금까지 매년 2월 초하루면 4학년 학인들이 조를 짜서 탁발을 다닌다. 그렇게 하루 탁발한 것을 모아 이웃을 돕는 일에 쓰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스님들이 탁발한 곡식으로 죽을 끓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 이주노동자를 돕기 위한 탁발마라톤을 이어가는 등 이전과 다른 개념의 탁발이 확산되고 있다. 재가자에게 걸식하는 일방향의 탁발에서, 다시 중생에게 환원되는 양방향의 순환이야말로 탁발의 참뜻을 품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중시한 데는 잉여를 경계하고 물질에 대한 탐착을 떨치도록 하려는 뜻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불교 세시풍속에, 설날이면 스님들이 절에서 만든 떡을 가져와 하나씩 나눠주며 속가의 떡 두 개와 바꾸어갔다고 한다. 스님이 주는 떡을 승병(僧餠)이라 한다. 출가자와 재가자 간에 오가는 떡에는 묘한 이치가 깃들어 있다. 우선 재가자가 주는 것이 많아야 승단의 운영이 가능하다. 출가자가 둘 모두를 갖지 않고 하나를 다시 주는 것은 잉여를 비축하지 않음이요, 중생에게 공덕을 환원하는 탁발의 순환이치라 할 만하다.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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