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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대석4_강창일 국회 정각회 명예회장
  • 글 조용주 기자 사진 정현선 기자
  • 승인 2020.07.1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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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해 법률을 제정하고 국정을 심의하는 일을 한다. 21대 국회의원은 총 300명인데, 그 수만큼 국회의원들의 종교도 다양하다. 종교마다 신행모임이 있는데, 불교를 신앙하는 국회의원 모임은 ‘국회 정각회’다. 강창일(68, 前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 정각회 명예회장은 2004년 17대 국회 때 정각회 부회장을 맡은 이후 19대 국회 하반기와 20대 국회 하반기 두 차례 정각회장을 역임한 대표적 불자 국회의원이다. 그를 만나 삶과 신행이야기를 들어봤다.

강창일 국회 정각회 명예회장

두 차례 정각회장
친불교 법안 발의 앞장
​“국회, 화쟁과 중도 필요”

국회 정각회는 1983년 4월 제11대 국회 때 69명의 불자 국회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한 단체다. 하지만 1998년 15대 국회 당시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회장 선출문제가 불거진 후 6년간 활동을 하지 못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강창일 명예회장은 개신교·천주교 신행모임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국회 정각회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멈춰 있는 정각회를 살리기 위해 불자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때마침 당시 안홍준 한나라당 의원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안 의원과 합심해 정각회를 재건했다. 강 회장은 17대 정각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20대 국회까지 16년여 동안 정각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21대 국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불교는 모태신앙, 출가 고민하기도

강 명예회장은 1952년 1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 덕에 태어나기 전부터 사찰에 다녔으니, 불교는 모태신앙이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따라 고산리 마을에 있는 월정사를 다녔다. 오현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형과 월정사에 방을 하나 빌려 한 달간 머물며 기도를 했고, 2학년 때는 사라봉 원명사에 주석하던 고은 시인을 만나 불교공부에 매진했다. 3학년 때는 제주 관음사 포교당 인근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매일 새벽예불에 동참했다. 이 시기 전국적인 학생 조직인 ‘룸비니학생회’ 창립에도 힘을 보탰다. 오현고등학교 시절에는 룸비니학생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무턱대고 절에 다녔지만, 불교에 매료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고은 선생님과의 인연이었습니다. 당시 스님이셨던 고은 선생님과 사라봉을 오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3학년 때는 매일 새벽 4시 종소리가 나면 절에 가서 예불에 참석하고, 등교 전까지 공부를 했어요. 얼마나 집중이 잘 되던지, 두세 시간만으로도 하루 공부가 충분했어요. 이때부터 열심히 불심을 키워나갔죠.”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9월 3선 개헌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정학 처분을 받고 기소돼 광주가정법원에서 재판도 받았다. 결국 광주소년원에 수감됐고, 재수를 하게 된다. 강 명예회장은 이 시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번민에 빠진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제주 보림사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생활하며 대중과 밥도 함께 먹고 대화도 많이 나눴다. 보림사는 산 중턱에 있는 절이라 주변에 무덤이 많았다. 그는 무덤가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며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상념에 빠지곤 했다. 보림사 위쪽에 있는 사라사에서 생활하는 젊은 스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며 답을 구해보기도 했다.

“보림사에서 생활하면서 ‘스님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당시 보림사가 공동묘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처녀귀신을 만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뻔한 일을 겪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드는 생각이 ‘귀신조차 이겨낼 수 없는 내가 과연 스님이 될 수 있을까?’였어요. 그래서 6개월 만에 생활을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가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강창일 명예회장이 2014년 7월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제19대 국회 정각회 후반기 회장 취임법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수련대회 때 민주화운동 투신 결심

재수를 하고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강 명예회장은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73년 12월 유신체재로 인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등교를 할 수 없었던 불교학생회는 삼보사찰 중 하나인 순천 송광사로 수련대회를 떠났다. 당시 송광사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법정 스님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서울 봉은사에서 불일암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강 명예회장은 일주일 동안 당시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과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듣고, 철야정진을 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마침내 ‘한목숨 연연하지 말고 올바르게 살자.’라는 뜻을 굳히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됐다. 수련대회 기간 중에 평생의 반려가 된 부인 장용선 씨도 만났다. 수련대회 후 그를 비롯한 13명의 회원은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구례 화엄사·하동 쌍계사·사천 다솔사 등 전남·경남 지역 사찰을 순례했다. 특히 다솔사에서는 국회의원을 역임한 효당(1904~1979, 최범술) 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효당 스님은 1948년 재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던 분이에요. 스님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스님은 저의 고민에 대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스님과의 차담을 통해 송광사에서 결심한 마음을 더 굳건히 다 잡았죠. 이날 효당 스님에게 ‘도행(道行)’이라는 법명을 받았죠.”

서울로 올라온 강 명예회장은 ROTC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ROTC 신분이기 때문에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고문과 매질을 견뎌야 했다. 고등군법회의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순천교도소에 수감됐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항소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라고 하지만 그 악법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독재정권의 사법부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은 강 명예회장이 몸담고 있던 불교학생회도 가만 두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있지도 않은 조직도를 그려놓고 불교학생회가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다고 조작해 죄 없는 후배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중앙회장을 맡고 있던 전재성(현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등의 후배들이 3개월 동안 고초를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후배들은 무사히 석방됐지만, 강 명예회장의 수감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인가 대학시절 인연을 맺었던 효당 스님이 면회를 와서 책과 함께 영치금을 넣어준 적도 있다. 하지만 책은 압수당해 어떤 책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효당 스님과의 인연은 석방 후에도 계속돼 스님 입적 전까지 서울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다.

일 년 후 다행히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선배였던 고준환 경기대 명예교수와 故 여익구 前 민중불교연합회장, 고은 시인, 황석영 작가 등과 함께 민중불교운동을 펼쳤다. 가끔 대강백으로 잘 알려진 탄허 스님(1913~1983)이 서울 대원암에 오실 때면 부인 장용선 여사와 함께 찾아가 〈화엄경〉 공부도 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동료들과 불교전문출판사를 창립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을 경계하며 민주화를 요구했던 ‘명동 YMCA 위장결혼식 사건’을 계기로 재야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강 명예회장도 다니던 직장(아세아문화사)을 그만두고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불교전문출판사를 만들려고 한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동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제 침략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이와 함께 제주 4·3연구소장과 동아시아평화·인권한국위원회 운영위원장, 광주 5·18기념재단 이사도 역임했다.

강창일 명예회장에게 불교란 모태신앙으로 대표적인 불자 국회의원이었다.

낙선 없는 4전 4승 정치인

“강단에 있으면서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각종 의문사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및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줄기차게 질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거 때만 되면 주변에서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어요. 그들은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를 추켜세웠죠.”

사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정학과 함께 수감됐고, 대학 때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으니 그에게 정치는 항상 따라 다닌 꼬리표였다. 많은 사람들이 ‘강창일은 언젠가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제주도 야권 인사들이 당시 20대였던 강 명예회장을 찾아와 정계 입문을 권유하기도 했다. 또 14대 총선부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영입 1순위로 연락을 받았다. 그때마다 “정치를 하기 위해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을 한 게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또 자유가 억압당하니 심신이 괴로워 내가 살기 위해 운동에 뛰어든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던 2002년 1월, 서울대 국사학과 후배인 정동영 국회의원(당시 새천년민주당)에게 연락 한 통이 왔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던 정 의원은 강 명예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정동영 후보를 돕기 위해 제주 경선에 깊이 관여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사람들은 제주도 경선에서 보여준 정동영 후보(120여 표 획득)의 돌풍을 강창일의 정치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사실 정동영 후보에게 연락이 오기 전에 김근태 후보 측에서도 도움 요청을 했어요. 평소 운동권 선배로서 존경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하고, 제주신문에 추천사를 써줬죠. 자칫하면 정동영·김근태 양쪽에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었어요. 바로 김근태 의원 쪽에 ‘정동영은 나 때문에 학생운동에 연루돼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후 친형제처럼 살아왔으니 돕지 않을 수 없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죠. 다행히 김근태 의원 쪽에서 이해를 해줬어요. 아마 이때가 정치를 시작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강 명예회장은 민주당의 끊임없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학회 발표를 핑계 삼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던 2003년 8월, 정동영 의원이 새롭게 창당하는 열린우리당 창당발기인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또 1970년대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선배들도 ‘민주주의 완결을 위해 정치판을 바꾸자.’라며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려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다. 고민 끝에 학계 대표로 참여하는 조건 아래 수락했고, 2004년 1월 중순 열린우리당 제주도당 창단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진행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제주도 제주시·북제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한나라당 현경대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이후 2008년 18대·2012년 19대·2016년 20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며 4선 고지에 올랐다. 강 명예회장은 단 한 번의 낙선도 없었고, 탈당 없이 무려 4전 4승을 기록해 제주도에서는 최초로 4연속 당선 기록을 썼다.

2019년 12월 서울 인사동에서 진행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팥죽 나눔 행사에서 천태종 총무원장 문덕 스님과 함께 강창일 명예회장이 시민들에게 팥죽을 나눠주고 있다.

국회 혁신·쇄신은 인적구성부터

앞에서 언급했듯이 강 명예회장은 국회에 입성한 후 활동이 중단됐던 정각회를 재건했다. 이후 불교계와 적극 소통하면서 개발제한구역 내 전통사찰 시설 개보수에 관한 법률 개정과 10·27 법난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을 비롯해 불교와 관련된 각종 법령을 개선했다. 또 전통문화 관련 예산과 템플스테이 예산 확보 등에도 앞장섰다. 2018년 6월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외교통일위원회에 소속됐던 강 명예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국회 본관 지하 2층에 1995년 23평 규모로 조성된 정각선원의 공간이 협소하고, 노후화되자 2015년 3월에 본관 지하 1층에 35평 규모로 이전·개원하기도 했다. 또 그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사당 내에 봉축탑을 밝혔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국회에 성탄 트리가 설치됐는데 저는 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세워지지 않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각회가 앞장서 부처님오신날에 봉축탑 점등을 하자고 주장했죠. 처음 봉축탑이 불을 밝힐 때 정말 기뻤습니다. 덕분에 이후부터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봉축탑이 국회의사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강 명예회장은 그간 활동의 공로로 2016년 제28회 포교대상 공로상(총무원장상)을, 2019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공로패를 각각 수상했다. 또 2020년 부처님오신날에는 불자대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그는 지난 1월 제주도에서 열린 의정보고회에서 “21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더 큰 정치를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 중앙정치부터 물갈이가 돼야 한다.”고 소신을 밝히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주변에서는 ‘힘 있는 다선의원이 필요하다.’며 만류했지만, 강 명예회장은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로 평가받는 20대 국회를 돌아보며 자괴감과 중진의원으로써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강 명예회장은 국회의 인적구성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5G 시대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20~40대가 지금 국회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국회의 쇄신·혁신은 인적구성의 혁신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1대 국회 개원 후 강 명예회장은 불교계와 정치권의 가교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 조계종립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맡아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 한·일의원연맹 명예회장·(사)제주와미래 고문을 맡아 한일관계 회복과 제주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 명예회장은 국회의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국회의원직은 국민의 머슴이고, 민원을 해결해주는 자리”라며 “의원직을 명예와 권력으로 생각하지 말고, 철저히 국민을 상대로 희생·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음 수양이 덜 된 사람들은 국회의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온 강창일 명예회장.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심’·‘화쟁’과 함께 ‘중도’사상을 잘 배운다면 국회는 싸움만 하는 비생산적인 곳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정신이 여의도를 비롯한 대한민국 전역에 활활 타오르길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2015년 3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예방한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함께한 강창일 명예회장. 〈사진=조계종 홍보국〉
강창일 명예회장은 그간 활동의 공로로 2020년 부처님오신날 불자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5월 30일 서울 조계사 봉축법요식에서 진행된 불자대상 시상식 모습.

글 조용주 기자 사진 정현선 기자  smcom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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