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읽고 부처님께 바쳐라” 후학에 강조

백성욱 박사

소사 백성목장과 〈금강경〉 법회

백성욱(1897~1981) 박사님은 말년의 대부분을 소사 백성목장에서 보내셨다. 타계하시기 얼마 전 거처를 한강변 반도아파트로 옮기시고 거기서 열반하셨다. 나는 2019년 9월 소사 백성목장 옛터를 도반들과 함께 방문하고 박사님의 사리탑에 참배했다. 백성목장은 내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온 곳이기도 하다.

현재 그곳에는 선생님이 기거하시던 건물은 없어졌고, 선생님의 사리탑과 동국대학교에서 세운 비석만 남아있다. 원래 경기도 장흥 대승사에 모셨는데 어느 해 큰 홍수로 유실되기 직전에 이선우 도반 등이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다. 이곳은 부천시의 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인근 부천문화원에는 ‘부천의 독립운동가 백성욱’이라는 주제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님은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교의 전신)을 다니실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연락을 받고 3·1독립만세운동을 하신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났다. 그 후 유럽에서 유학하며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불교순전철학(Buddhistische Metaphysik)’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귀국 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금강산에서 10년 이상 수행을 하셨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자 이승만 박사를 도와 건국운동을 하셨고,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재직(1953~1961)하면서 대학의 기틀을 잡으셨다.

내가 소사 백성목장에서 백성욱 박사님을 처음 친견한 시기는 1972년 가을 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조계사에서 윤영흠 법사(관음회 소속)가 〈금강경〉 법회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개를 받아서였다. 모임의 살림을 맡고 있던 김정호 씨와 회원이던 김웅태·이경숙·정정자 씨, 나 그렇게 7~8명이 동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신 것은 1962년 5·16 군사정변 이후 새로 정해진 교수 정년에 해당되어 동국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하고, 당시 주소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1리 윗소재 산 66번지에 백성목장을 세우시고 소사 본당을 지어 수행을 하고 계셨다.

이마의 백호가 뚜렷하고 부처님 상호를 닮은 선생님의 신상(身相)과 독특한 스타일과 내용을 담은 〈금강경〉 법문은 첫 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던 가난한 고학생이었는데, 그런 나에게 희망을 심어주셨다.

선생님은 방석 위에 정좌하고 앉은 채 우리들이 절을 하면 마주 합장하면서 원(願)을 세워주셨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해서 부처님께 복 많이 짓기를 발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법문의 핵심은 부처님 경전 중 〈금강경〉의 위치와 〈금강경〉의 핵심 내용 그리고 이 경전을 읽고 안팎으로 부딪혀 오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일대기에서 〈금강경〉은 21년간 설하신 〈반야경〉의 핵심으로서 정오에 해당하는 가장 밝은 경전이다. 그러니 〈금강경〉 속에 등장하는 1,250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으면 한국과 인도 사이의 공간과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부처님의 밝은 정신과 교류하는 것이므로, 재앙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의 말씀처럼 변화를 느꼈다. 우선 얼굴이 전보다 밝아지는 것 같았고, 마음도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정재락 씨가 합류해 네 사람이 선생님을 매주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선생님의 법문 중에서 나를 감명시킨 말씀은 또 있었다.

나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더욱 오늘날과 같이 사악(邪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는 길은 불교에 의한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인으로서 사회를 정화하는데 이바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의 고견이 기대되었으나 선생님께서는 대뜸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려고 하는구나.”하시면서 “한마음이 깨끗하면 여러 마음이 깨끗하고, 여러 마음이 깨끗하면 팔만사천 다라니 문이 다 깨끗하다.”는 〈원각경〉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처음에는 무안했지만 사회를 정화하기에 앞서 자기가 먼저 밝아지는 것이 우선이라는 진리를 깨우쳐 주신데 대해 감사하게 되었다.

백성목장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당시의 필자 부부.

신혼여행과 교수 부인

선생님을 찾아뵙는 일은 우리들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빼고는 거의 매주 소사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선생님은 만나뵐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깨우침과 자극을 주셨다. 선생님은 각자의 마음씀씀이[用心]를 환하게 보고 계셨다.

선생님은 세계 역사, 세계 지리에 관한 법문도 해주셨다. 율곡 선생님 등과 같은 이인(異人) 들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시고, 곤륜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강줄기와 보석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선생님은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고 평소에는 보고 듣고 마음속에 올라오는 모든 것을 ‘미륵존여래불’하고 부처님 명호를 불러서 부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미륵부처님의 명호는 풀네임이 ‘미륵존여래불’이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

얼마 후 함께 공부하던 이경숙·정재락 씨가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었다. 나도 함께 공부하던 정정자 씨와 삼청동 칠보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소사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 저희 오늘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왔습니다. 머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거절하시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했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해 주셨다.

“그래 저기 위에 우사에 방이 몇 개 있으니 그곳에서 지내려무나. 여기서 공부하는 게 궁금해서 핑계 삼아 온 게로구나. 녀석들, 참.”

선생님을 오래 모시고 있던 이병수 씨가 법당 위로 조금 올라가 우사 옆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주어 거기서 〈금강경〉을 읽으며 신혼의 밤을 보냈다. 새벽 4시가 되어 세수하고 법당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했다. 법회에는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강대관·김정섭·신금화·이병수 씨 등과 함께 삼칠일 기도를 위해 와 있던 강신원 씨가 참여했다. 새벽 법회는 그대로 부처님 회상을 방불케 했다. 각자가 공부하면서 의문이 생긴 점을 말씀드리면, 이에 대해 선생님이 법문해 주시는 형태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현대에 오시면 저와 같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부부는 사흘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선생님께 다닌 지 3년이 못되어 고학을 하던 나는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느 토요일 학과 교수님 중 명강의로 유명한 하버드대 출신 교수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국제정치담당 특보로 가게 되었는데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니 정 군이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와 상의한 후 월요일에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 후 어느 때 선생님은 느닷없이 아내를 가리키시면서 “네가 이제 교수 부인이 되겠구나.” 하셨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대학원 공부를 쉬고 있었는데 의외의 말씀이셨다. 마음에 집히는 바가 있어 특별보좌관을 맡고 있던 교수님께 말씀을 드려서 직장에 다니면서 짬을 내어 두 과목 정도 남은 학점을 마저 이수했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논문을 써서 학교에 제출했다. 그 결과 1982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79년에는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그 후 교수님은 UN대사로 나가셨기 때문에 나도 무언가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로 원(願)을 세웠다.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1983년 나의 아내는 선생님이 예언하신대로 교수 부인이 되었다. 나는 인천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다가 1998년에는 영산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총장직을 마친 다음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다가 정년퇴임 후에도 근 8년 정도 서울디지털대학교 법무행정학과 석좌교수로 강의했다. 선생님께서 미리 정해주신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평생직장이었던 것이다.

필자(오른쪽)와 백성욱연구원 임원들이 지난 2월 설을 맞아 부천 소사에 있는 백성목장 내 박사님의 탑과 비석을 참배했다.

백성욱 박사님의 열반과 그 후

선생님은 1981년 음력 8월 19일, 당신이 태어난 바로 그날 열반에 드셨다. 그날 새벽 사모님께서 ‘선생님이 열반하셨다.’고 연락을 주셨다. 아내와 함께 급히 한강변 반도아파트로 갔다. 막 열반하신 백성욱 박사님의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선생님이 안 계시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여쭈어볼 곳도 없게 되었다. 나는 인천대학교에 근무할 때 입사동기인 송재운 교수와 함께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많아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백성욱 총장님 당시 학보사 기자였기 때문에 백 선생님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불교사상(佛敎思想)〉이라는 월간지가 만들어졌는데 송재운 교수가 주간이 되었다. 한 번은 송 교수가 〈불교사상〉에 실을 원고를 청탁해왔다.

나는 백 선생님에게 들은 법문을 기억해 내어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백성욱 박사를 통한 불교신앙’라는 주제로 기고를 했다. 〈불교사상〉 1985년 3월호 및 5월호에 글이 실렸다. 백성욱 박사님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바로 작은 책자로 출판됐는데, 김양경 사장(동성어페럴 대표) 같은 열렬한 신봉자는 책을 들고 전국 사찰을 돌면서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소사에서 백 선생님께 수학한 사람들 간의 연락이 빈번해져 1986년에는 ‘금강경독송회 중앙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회장은 내가 맡고 김재웅 법사가 지도법사를 맡았다. 2년이 지나 정관대로 신임회장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그 후 중앙회는 사실상 활동이 중지됐고, 이후 백성욱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들이 저마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왜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서로 따로 활동을 하는가?’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섞여서 다투기보다 각자 따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셨다. 부동주(不同住)가 그것인데, 부파불교가 번성하여 불교의 외연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선생님 제자들의 출신배경과 성격은 무척 다양했다. 나 같은 대학교수·총장 출신들이 있는가 하면 장관·국회의원, 4성 장군 출신도 있는 등 여러 분야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릇이 큰 분이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셨다. 선생님이 펼치신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부동주가 오히려 법을 펼치는데 더 유효할 수 있다고 본다.

2018년 만해학회에서 ‘백성욱과 만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나는 원고를 청탁받아 ‘백성욱의 불교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때 참석한 선생님 제자 중에서 “우리도 이제 백 선생님의 철학·사상·일생을 학문적으로 조명할 연구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윤근향 보살과 김양경 거사가 기본출연금을 내고, 송재운 교수·이선우 거사·고영화 교수 그리고 내가 동참하여 비영리연구단체인 ‘백성욱연구원’을 만들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송석구 동국대 전 총장이 원장을 맡았다. 그로부터 백성욱 박사 관련 강연회·세미나·책자 발간 등의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976년 부천 소사본당에서 수행하던 백성욱 박사와 도반들. 왼쪽부터 이선우, 백성욱 박사, 남창우, 김동규 도반.
백성욱연구원이 지난해 5월 ‘백성욱 박사의 금강경 독송’이란 주제로 개최한 강연회. 이날 류종민 중앙대 명예교수가 강연했다.

정천구
현 백성욱연구원 이사장.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영산대학교 총장, 서울디지털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금강경 공부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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