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 헤아리기 좋은 화두 같은 금언

고백합니다. 이번 호에는 일본 고전수필을 대표하는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도연초(徒然草)〉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꺼내 읽던 중에 ‘아차!’ 싶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주옥같은 글을 먼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인(當代人)의 삶은 아프고 뜨겁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땀땀이 남긴 선조들의 소중한 기록을 한낱 옛것이라고 저만치 밀쳐놓고 있었다니요.

겨레 얼 빛낸 거장들의 글 모음

이 따가운 죽비에 힘입어 서가에서 골라낸 책이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입니다. 이 책은 총 64편의 우리 고전수필을 7부로 나누어 수록해 놓았습니다. 필자는 총 40명.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부터 김부식(金富軾)·이규보(李奎報)·이제현(李齊賢)을 거쳐 서거정(徐居正)·김시습(金時習)·이황(李滉)·이이(李珥)·신흠(申欽)·허균(許筠)·박지원(朴趾源)·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겨레 얼을 빛낸 정신사의 거장들이 망라돼 있습니다. 책의 각 부에 달아놓은 제목을 나열하면 ‘생활의 예지’, ‘한가로움과 풍류’, ‘사랑과 고뇌 그리고 소망’, ‘오는 정 가는 정’, ‘사랑하는 사람들, 정다운 이웃들’, ‘인식과 비판의 칼’, ‘옛 법을 다시 쓰니’ 등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우리 고전문학 작품처럼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필자들의 미묘한 숨소리와 음색까지를 속속들이 감득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렇지만 원문에 충실하되 의고체(擬古體)를 지양한, 현대 어감에 맞는 번역으로 고전수필의 독특한 풍미와 의미를 새기는 데에는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나도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은 근심 걱정이 없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라서 자주 즐기지 못한다.

평해(平海)에 사는 나의 벗 이주도(李周道)는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달이 밝은 밤이면 가끔씩 소 잔등에 술동이를 싣고 명승지를 찾아 나선다. 평해는 원래부터 경치가 빼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이 군은 옛 사람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묘미까지 찾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묘미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되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보는 데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사물들은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자신의 비밀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볼 때 빨리 보게 되면 자세히 볼 수가 없는 법이다. 이 군이 말을 타지 않고 굳이 소를 타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말은 빠르고 소는 느리기 때문이다.

여말선초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권근(權近)의 수필 ‘소를 타고 다니는 즐거움’(원제, 기우설(騎牛說))의 앞부분입니다. 한 왕조가 스러지고 새 왕조가 들어서던 그 번다한 시절에도 자기만의 생활미학을 견지한 이주도란 분이 우선 눈에 띕니다.

요즘으로 치면 말은 자동차, 소는 자전거쯤 되겠지요. 짐작컨대 그 때 사람들도 ‘바쁘다, 바빠!’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텐데 천천히 걷는 소의 걸음에 자신의 시간을 맡기다니요. 그리고 그런 친구를 보면서 우주만물 속에 깃든 묘리(妙理)를 간파해 낸 필자의 안목 또한 새롭습니다. 사물을 보되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볼 때 사물들은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자신의 비밀까지 보여 준다지 않습니까? 한국인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낱말 가운데 하나로 ‘빨리 빨리’가 꼽힐 만큼 속도전에 골몰하는 요즘 사람들이 새겨 읽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럼, 눈 밝은 권근의 수필 ‘대머리의 변’(원제, 동두설김진양자호(童頭說金震陽自號))을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 필자 권근은 스스로 호를 ‘동두’ 즉 ‘대머리’라고 지은 김진양에게 그 까닭을 묻고 그의 대답을 길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사람 치고 부귀와 장수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생물을 창조한 것을 보면, 날카로운 이빨을 준 자에게는 굳센 뿔을 주지 않았고, 날개를 준 자에게는 네 다리를 주지 않았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에서 부귀와 장수를 겸한 사람은 많지 않은 법. 한때 잘 살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네. 그러니 굳이 부귀를 바라 무엇하겠는가? 다행히 나에게 초가가 있어 내 몸을 보호하기에 족하고, 거친 음식이지만 나의 굶주림을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나의 타고난 수명을 다할 생각이라네. 사람들이 나더러 대머리라 하고 내가 또한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네.”

“날카로운 이빨을 준 자에게는 굳센 뿔을 주지 않았고, 날개를 준 자에게는 네 다리를 주지 않았다.”는 대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말입니다. 하늘의 놀라운 셈법이라 생각합니다. 목숨 갖고 태어난 것들이 저마다 특기와 장점을 지니되 어느 한쪽의 지배력이 일방적으로 행사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온갖 생물들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이처럼 절묘한 장치를 해두었다니, 하늘의 천사만려(千思萬慮)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 그리고 참새·비둘기·까치 등을 거의 날마다 보면서도 생각이 이런 데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천연 그대로의 자연을 멀리하고 너나없이 온통 인위(人爲)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업보려니 하다가도 문득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약속하기를,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셔가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토록 하여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게 한다. 정기 모임 외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한턱내도록 한다.”

라고 규정했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기록하고 그 제목을 붙이기를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 했다. 그리한 것은 그 모임이 대부분 우리 집인 죽란사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의 실학을 계승해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원제, 죽란시사서첩(竹欄詩社書帖))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참 멋있지 않습니까? 근엄한 선비이자 학자요, 경세가로 잘 알려진 정약용에게 이런 풍류와 낭만 그리고 이런 격조와 아취(雅趣)가 있었습니다. 도포자락에 감춰진 가슴속에 이처럼 살갑고 도타운 인정이 굽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도 서로 뜻이 잘 맞는 사람끼리 이러한 규약을 정하고 모임을 꾸려가도 좋지 싶습니다.

모임의 주제를 문학이나 예술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를 읊조리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저마다의 관심 분야나 방향에 맞춰 모임을 주선하면 될 일입니다. 날마다 생성되는 지구촌의 정보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 화제야 무궁무진할 테니까요. 이른바 인공지능이 갈수록 고도화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런 모임 하나쯤 갖고 있으면 시나브로 시심의 움이 트고 선비정신 또한 저절로 길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도 덩달아 좀 더 맑아지고 명랑해지겠지요.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명문장

책을 읽으며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글은 따로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신흠이 쓴 ‘숨어사는 선비의 즐거움’(원제, 야언(野言))이 그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전에 적어 두었던 글들을 뒤적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기에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엮고 그 속에 나의 뜻을 붙여 ‘야언’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라고 신흠 스스로 밝힌 이 글은 금언·격언·경구·잠언이라 풀이되는 아포리즘의 보고(寶庫)입니다.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들을 이어 붙여 놓았는데 구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400여 년 전의 문장인데도 새롭게 읽힙니다.

소탈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됨을 깨뜨릴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고루함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인품이 높은 친구를 만나면 나의 타락한 속기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경망스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는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지려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일은 어느 정도 마음에 흡족하다고 생각할 때 그만둘 줄 알아야 하고, 말은 자기 마음에 흡족하다고 생각할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허물과 후회가 자연히 적어질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또한 무궁할 것이다.

뜻을 다 표현한 다음에 말을 마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말을 마쳐도 뜻은 다함이 없어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화려한 꽃은 향기가 적고 향기로운 꽃은 색이 화려하지 못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귀를 자랑하는 자는 인품의 향기가 없고, 인품의 향기를 뽐내는 자는 쓸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군자는 백세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시대의 아름다운 자태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후덕하게 하느냐 아니면 야박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장단(長短)의 열쇠가 되고, 겸손하게 하느냐 아니면 교만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화복(禍福)의 열쇠가 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냐 아니면 사치하고 게으르냐의 여부가 빈부의 열쇠가 되며, 양생(養生)을 하느냐 아니면 욕심대로 사느냐의 여부가 사람으로 남느냐 귀신으로 돌아가느냐의 갈림길이 된다.

어떻습니까? 한 구절 한 구절 읽는 이에게 자신의 인생관을 돌아보게 하는 문장이지 않습니까? 특히 “말을 마쳐도 뜻은 다함이 없어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고 설파한, 언어 운용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은 물론 후세에도 변치 않을 금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에 수록된 신흠의 수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야언’이 전하는 빼어난 한시(漢詩) 한 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 고전수필의 세계와도 썩 잘 어울리거니와 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화두 삼아 곰곰 헤아리기에 딱 좋을 시입니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天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을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치 않으며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윤효

시인. 본명은 창식(昶植). 1956년 논산에서 태어나 1984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얼음새꽃〉·〈참말〉·〈배꼽〉 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이 있다. 제16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제7회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제1회 풀꽃문학상, 제31회 동국문학상, 제13회 충남시협상을 받았다. 현재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