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던 아이들은 사장나무 밑에 모여 떨고 있었다. 나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구레나룻이 까만 하사관 하나가 우리들 앞으로 걸어왔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는 문득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고, 세상이 온통 어질어질 기우뚱거렸다. 나를 질질 끌고 가서 논둑 밑에 꿇어앉히고 날카롭게 반짝거리는 뱀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혼겁한 채 떨었다. 하사관이 “너희 학교에 굴 있지? 사람들 숨는 굴 말이야.”하고 물었다.

굴(窟)

나는 학교 뒤뜰 변소 옆 언덕에 있던, 일제 때의 방공호를 떠올렸다. 그것은 언덕에 줄줄이 다섯 개가 깊이 뚫려 있었는데 검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광복되던 해(1945년) 4월 초에 입학한 나는 며칠 뒤 그 굴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교무실 창문 앞에 걸려 있는 종이 시끄럽게 울리자 한 선생이 “구시께이요.”하고 소리치며 아이들을 그 굴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방공훈련이었다. 그 해 5월 중순은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였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두 손을 크게 벌려, 엄지손가락으로는 귀를 막고 가운데 손가락으로는 눈을 누르라고 했다. 굴의 맨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눈과 귀를 막고 엎드려 있었다. 한참 뒤에 눈을 떠보니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굴들은 광복 이듬해, 내가 2학년 되던 늦은 봄에 모두 매워졌다. 여러 마을의 학부모들이 몰려나와 굴을 매우고 석축을 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구레나룻의 하사관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굴이 있기는 있었지만 광복 후에 메워 버렸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울음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로 인해 나는 겁이 났다. 학교에 있지 않은 굴을 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으므로 나는 거짓말을 한 셈인 것이었다. 겁을 먹은 채 ‘어흑어흑’ 울고만 있었다.

“그 굴 학교 뒤뜰 언덕에 있지? 좌익들 숨는 굴?” 하사관이 다짐하듯 물었다. 눈물로 인해 굴절된 하사관의 얼굴은 괴물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기만 했다.

“니 이름이 뭐냐?” 이름을 말해주지도 못한 채 울기만 하자 하사관은 내 머리에 알밤을 먹이고, 다른 아이를 불러 내 이름을 물어본 다음 다른 아이에게로 옮겨가 무슨 말인가를 물었다.

토벌대가 잰걸음으로 우리를 앞장서서 학교 쪽으로 갔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토벌대를 뒤따라 학교로 갔다. 나는 학교에 가는 일이 두려웠다. 나를 심문한 하사관은 선생님에게 학교 뒤뜰 언덕에 있는 좌익들이 숨어 사는 굴을 보여 달라고 할 것이고, 선생님은 굴을 이미 메워버렸다고 할 것이고, 그래 다툼이 일어나면 그 하사관은 내 이름을 대며, 그 아이가 분명이 굴이 있다고 했다고 따질 것 아닌가.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맨 뒤에 처진 채 갔다.

학교 교문에 이르렀을 때 학교 뒤뜰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댔고, 이어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학교 뒤뜰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나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내 겁을 먹은 채 앉아만 있었다. 한참 뒤 우르르 몰려나온 토벌대가 내 앞을 지나 장산마을 쪽으로 몰려갔다.

훗날 소문으로 들으니, 교감과 구레나룻 새까만 하사관이 다투었다고 했다. 그 하사관은 굴을 보여 달라고 하고 교감은 굴이 없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 군인이 교감의 발 앞 땅에다 총을 쏘았고, 교감이 ‘나를 죽여라’하고 대들었다는 것이었다.

악몽

밤이면 잠을 자다가 가위눌려 일어나 몸을 떨었다. 악몽에 시달렸다. 온몸에 열이 설설 끓었으므로 아버지 어머니가 번갈아 물수건을 내 이마에 올려놓았다. 비몽사몽의 어지러운 시공을 헤매다가 눈을 떠보면 방구석에서 석유등잔불이 일렁거렸는데, 그 등잔은 동그란 검은 그림자 하나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내 가슴 속을 아프게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떨면서 울었다.

여순사건 이후로 마을 골목길의 담벼락에는 비라가 더 극성스러워졌다. 학교의 변소 문짝이나 벽에 그 비라 내용들을 누군가가 진한 연필로 써놓곤 했다. 나는 밤에 그것을 붙이거나 쓰고 다녔을 검은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그 비라가 우리 마을 아이들에게 어떤 힘인가를 주는 것인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나를 더욱 괴롭히고 따돌렸다.

그해 늦은 가을의 어느 날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세 살 위인 병출이가 나에게 잠깐 만나자고 했고, 나를 학교 뒷산의 동백나무 숲으로 데리고 갔다. 평소에 나의 실력이 가짜라고 주장하곤 한 아이였다. 학교 육성회에 출입하는 아버지 때문에 담임선생이 체육을 ‘미’로 평가했을 뿐, 나의 모든 과목을 ‘수’로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초등학생의 성적을 ‘수 우 미 양 가’ 5단계로 평가했었다.

병술은 나의 실력이 엉터리인 것을 까발려놓겠다고 아이들에게 선언하듯 말한 바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병술이야말로 진짜 실력자인데 담임선생한테 밉보여 제대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들 했다. 여순사건 뒤에 병술이의 기세는 노골적으로 거세져 있었는데, 그는 나의 엉터리 실력을 까발려놓을 시간을 바로 그날 한낮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자기들을 무산계급 좌익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지주 계급의 반동분자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지주 계급의 반동분자라고 규정하는 불합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논농사 열 마지기(한 마지기에 200평)에 밭농사 스무 마지기(한 마지기에 80평)이고, 마을의 여느 사람들이나 똑같이 바다의 김 양식업을 머슴 한 사람을 데리고 손수하며 살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폐교된 양영학교 교사를 10년 간 했는데 일제가 강제 폐교시키자, 몇 해 동안 어업협동조합 총대를 한 적이 한 번 있기는 하지만, 논밭을 누군가에게 소작으로 내주고 수를 받은 지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마을 아이들은 병술이가 시원한 복수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병술이가 나를 데리고, 학교 뒷동산의 동백숲으로 가자 아이들은 모두 뒤를 따라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병술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동백나무숲 위쪽의 칙칙한 소나무숲 속으로 들어갔고, 뒤따르는 나를 풀밭 서쪽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와 나를 빙 둘러쌌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집단폭행하지 않을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집단폭행

전체학생의 운동장조회 때 교장선생의 끔찍스러운 훈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일본인들은 대동아전쟁이라 칭함)이 한창일 때, 일본의 한 중학교 학생들 50여 명이 낙제한 학생을 산으로 끌고 가서 때려죽였다. 그 학생들은 각기 한 개씩의 돌멩이로 낙제한 학생의 머리를 한 차례씩 쳤는데, 그 학생은 죽고 말았다. 그 학생을 그렇게 쳐 죽이도록 선동한 것은 그 반의 반장이었다. “우리 천황폐하의 대일본제국이 성스러운 전쟁을 치름으로써 대동아 공영을 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여야 하는 이때에, 게을리 공부하여 낙제를 한 것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을 모독한 것이므로 당연이 벌을 받아야 한다.” 반장의 청에 따라 모든 학생은 돌멩이 한 개씩을 들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꿇어앉은 낙제학생의 머리를 한 번씩 찍은 것이었다.

그와 함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침마다 학교에 올 때 천도교당 옆 공동우물 가에 운집한 통학단 아이들이 지각한 한 학생의 머리에 책보자기를 씌우고 집단 구타하는 모습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둘러싼 아이들이 괴물들처럼 무서워졌고, 내 머리는 하얗게 텅 비어버렸고, 온몸에 맥이 빠졌다. 아이들 속에는 아이들의 대장도 있고, 나의 앞에 오줌 금을 그어놓고 박해를 가한 그 대장의 동생도 있었다.

마침내 병술이가 나를 향해 말했다. “너, ‘동무’와 ‘동모’가 어떻게 다른지 말해봐라.” 동무는 알 것 같은데 동모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둘러싼 아이들에게서 찬바람이 날아왔고 나는 숨이 막혔다. 병술이가 미리 준비한 듯 일사천리로 동무와 동모의 다른 점에 대하여 말했다.

“‘동무’는 같은 또래의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뜻하지만 우리 남로당에서는 혁명이념을 똑같이 가지고 살아가는 동지들을 동무라고 하는 거야. 혁명이념이 같기만 하면 선생님과 제자 사이도 동무이고, 선배와 후배 사이도 동무이고, 주인과 머슴 사이도 동무인 거야. 혁명이념만 같으면 남자와 여자 사이도 동무이고, 무당이나 백정하고도 동무란 말이여. 그런데, ‘동모’는 어떤 일인가를 함께 하기 위해 은밀하게 함께 도모하여온 사람을 말하는 거야. 만일에 우리 마을 통학단 소년들이 미국의 앞잡이인 자본주의 팟쇼도당과 한 패인 반동자 새끼들이 설 자리를 빼앗고 그들이 숙청되도록 도모한다면 우리들은 모두가 동모인 거야. 그런데 승원이 너는 우리하고 동무도 동모도 될 수가 없다. 앞으로 조심해, 선생한테 받은 신용 믿고 까불면 칵 밟아버릴 거야.”

그가 ‘우리 남로당에서는’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진저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규정지은 ‘반동자 새끼’이므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의 편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병술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이 중구난방으로 빈정거렸다. “저런 것한테, 국어에 ‘수’를 주다니, 선생이 순 엉터리다!” “아나, 2등!”

우리 반에서는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우리 마을의 대장이 항상 일등을 했고, 내가 2등을 하곤 했다. 아이들은 그것을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그날 아이들에게 따돌려 뒤쳐진 채 집으로 돌아가면서 처참하게 유린당한 반동자 새끼의 외롭고 가엾은 모습을 나 스스로에게서 발견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오직 내가 속한 4학년만 ‘갑(甲)반’과 ‘을(乙)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갑반에 들어 있었다. 우리 집과 사립을 마주한 이웃집 기호는 ‘을’반이었으므로, 내가 따돌림을 받은 이후에도 나하고 함께 땔나무를 하러 다니고 장기를 두고 딱지를 쳤다. 기호가 혹시 우리 마을의 갑반 아이들로부터 나에 대한 말을 듣고 그들처럼 나를 따돌릴까 두려워졌다. 나는 그가 변심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제사를 지내면 어머니 몰래 떡을 훔쳐다주고, 할아버지의 밥에 넣을 쌀을 담아 놓은 작은 독 속에서 쌀을 퍼 호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가서 주곤 했고, 아버지의 궤상 속에서 앨범 사진을 찢어 가위로 잘라 딱지로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다.

기호는 우리 ‘갑’반에 자기와 동갑내기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소통을 할 터이지만, 다행히도 나에게 한 번도 반동자 새끼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따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침 묻은 성적표

다음해, 2월 하순의 어느 날, 4학년 말 성적표를 받았는데, 모든 과목이 성적은 ‘수’였고, 석차 란에 2등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내가 2등 했다는 것을 자랑할 사람이 둘이었다. 어머니와 작은 누님이었다. 아버지는 1등 하지 못한 것과 개근상 못 받은 것을 꾸짖었고, 자기 반에서 늘 중위권에 속한 형은 내가 어른들에게 성적표를 내놓는 것 자체를 기분 나빠했다.

그날 나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운동장에 혼자 남아 회전 그네를 타고 놀았다. 우리 마을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 혼자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랜 동안 놀다가 뒷등 길에 들어섰을 때 보리밭둑 길에서 제기차기를 하고 있던 마을 아이들이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병술이 내 앞에 손을 내밀며 성적표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거부할 수 없어, 책보자기 속에서 성적표를 꺼내 주었다. 병술은 내 성적표를 대장에게 넘겨주고, 대장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옆의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내 성적표는 모든 아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너다녔다. 맨 나중에 받아 든 아이는 대장의 동생이었다. 그는 성적표 한가운데에 침을 탁 뱉고 나서 보리밭으로 던져버렸다. “더러운 엉터리 2등!”

대장이 마을 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를 따라갔다. 바람이 불어왔고, 성적표는 얼마쯤 날아가다가 보리 이파리들 사이에 끼어 떨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성적표를 집어 들고 거기에 묻어 있는 침을 보리 잎사귀로 닦았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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