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떠난 여름 숲에는 초록 佛心 ‘주렁주렁’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해 걷기도 좋다.

왜구 막으려 세운 토성이자
혜장과 정약용 교유하던 숲길

강진 백련사는 신라시대 말기인 839년에 무염(無染) 선사가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강진만(康津灣)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사찰은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 스님이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하면서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나갔던 도량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다와 접해 있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조선 초 행호(行乎, ?~1446) 스님이 백련사를 중창할 때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절 앞에 토성을 쌓았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동백나무숲이다.

동백나무숲은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길이자 숲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1km 남짓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 야산에 동백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돼 있는 이 숲은 일 년 중 3월 중순부터 4월 초가 가장 아름답다. 백련사를 에워싸고 있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에서 선홍빛의 꽃송이가 떨어져 융단(絨緞)을 이루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구분하는데, 이곳 동백은 대부분이 봄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춘백이라고 볼 수 있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숲에는 동백나무 외에도 비자나무, 후박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는데, 특히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유배를 와 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자신이 거처하던 귤동 뒷산인 ‘다산(茶山)’의 이름을 그대로 따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하니 인근에 차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백련사 주변 5.2ha면적에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3월경에는 동백꽃이 만개해 바닥에 융단처럼 떨어진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정약용이 차에 심취하게 된 것은 이곳으로 유배를 오고 난 후다.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 1772~1811) 스님은 평소 정약용을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정작 그와 한나절이나 대화를 나누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헤어지고 나서야 선비가 정약용인 줄 알고는 헐레벌떡 쫓아가 몰라보았음을 사죄하고, 다시 자리를 청했다. 두 사람은 〈주역〉을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학식에 감탄했다. 서른넷의 혜장 스님과 마흔넷의 정약용은 그렇게 다우(茶友)가 됐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해남 대흥사에 있는 혜장선사의 탑비문인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에 나온다. 이 비명을 정약용이 지었다고 하니 서로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혜장 스님에게 경학을 가르쳤고, 혜장 스님은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치며 6년 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정약용은 차가 떨어지면 혜장 스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 내용이 담긴 서신이 ‘걸명소(乞茗疏)’다.

백련사에서 출발해 울창한 동백나무숲을 지나면 가파른 비탈길이 나오면서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대숲으로 이어진다. 동백나무숲과 대숲은 220여 년 전 정약용과 혜장 스님이 오가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 모를 초목 사이를 지나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이내 다산초당이 보인다. 다산초당은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된 정약용이 1801년 귀양을 와서 18년의 유배 생활 중 10년을 머물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학문에 몰두하며 〈목민심서〉를 비롯해 〈흠흠신서〉·〈경세유표〉 등 500여 권을 집필했다.

다산초당은 한낮에도 주변이 어두침침하다. 동백나무와 잡목이 그만큼 울창하기 때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방과 툇마루가 꽤 넓다. 유배객이 살던 집 같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이 집은 이름처럼 작고 초라한 초당이었지만, 폐가가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중건하면서 기와집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숲길. 동백나무와 소나무 뿌리가 핏줄처럼 드러나 있어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사진=강진군청〉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되돌아오면서 승려와 유학자로 만났던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흠모했을 지를 떠올렸다. 1811년 가을, 혜장 스님은 대흥사 북암에서 마흔의 젊은 나이로 입적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강진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지음(知音)을 잃은 슬픔을 두 편의 만시(輓詩)에 담았는데, 그 중 한 편이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墨名儒行世但驚 怊愴華嚴舊主盟
一部論語頻盥水 九家周易細硏精
凄凉破衲風吹去 零落殘灰雨酒平
帳下沙彌三四五 哭臨猶復喚先生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정약용은 다산초당 옆에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와 잉어를 길렀는데, 잉어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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