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떠난 여름 숲에는 초록 佛心 ‘주렁주렁’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깃들여진 높이 40m의 낙화암 전경. 〈사진=부여군청〉

백제의 영광·최후 지켜본
솔향 가득한 숲길

백제 사비시대(泗沘時代, 538~660) 때 ‘부소산성(扶蘇山城)’은 왕궁의 배후산성이었다. 이 부소산성이 감싸고 있는 백마강 남쪽의 산이 바로 부소산(106m)이다. 부소산에는 아름다운 소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이 소나무숲은 백제 멸망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에는 군창터 및 백제시대 건물터와 삼충사·영일루·반월루·궁녀사·사자루·낙화암·고란사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유사시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사용되었겠지만, 평소에는 왕과 귀족들이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소나무숲을 만나려면 부소산문 매표소를 지나 언덕을 올라야 한다. 조금 오르다보면 위기로 치닫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백제의 세 충신을 모신 사당 ‘삼충사(三忠祠)’가 나온다. 백제 말엽 의자왕에게 직언하다 감옥에 갇혀서도 나라를 걱정했다는 성충(成忠, ?~656년), 성충과 함께 왕에게 충언하다 유배를 당한 흥수(興首, ?~?), 오천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계백(階伯, ?~660)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충사를 지나 소나무숲길을 조금 더 걸으면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 잡은 ‘영일루’가 보인다. 이곳은 백제의 왕이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랏일을 구상하고, 백성의 평안을 기원했다는 ‘영일대 터’로 전해진다. 1964년 조선시대 홍산현에 있던 관아의 정문 ‘집홍루’를 이곳으로 옮겨와 ‘영일루’라는 현판만 걸어놓았다. 멋진 풍광을 기대하며 이층 누각에 올랐지만, 계절 탓인지 무성하게 자란 나무에 시야가 가려 시원스럽지 않다.

위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부소산문, 삼충사, 고란사, 사자루. 

부소산 동쪽에 위치한 군창지는 낮은 울타리를 쳐놓아 들어갈 수는 없다. 1915년 불에 탄 쌀·보리·콩 등이 발견돼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였다는 게 알려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곡식은 조선시대 것으로 확인됐고, 건물터는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곡식을 불에 태운 이유는 적에게 군량을 내어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땅을 파서 만든 수혈주거지(竪穴住居地)를 지나 발걸음을 옮기면 1972년 세운 ‘반월루(半月樓)’에 도착한다. 반월루는 특별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누각에 오르면 백마강과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반월루는 ‘사비성이 둥글게 휘어진 반달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월루에서 내려와 낙화암으로 가는 길목에 ‘궁녀사(宮女祠)’가 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생을 마감한 삼천궁녀의 극락왕생을 기원해 세운 곳이다.

시원한 숲길과 유적지를 살피며 걷다 보면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泗疵樓)’에 도착한다. 원래 달맞이를 하던 송월대(送月臺) 터인데 1824년 세운 임천면 관아 정문인 ‘개산루’를 1919년 이곳으로 옮겨와 ‘사자루’라고 이름 붙였다. 정면에 걸린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글씨고, 백마강 쪽으로 걸린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다. 누각을 세우려고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백제 귀족이 죽은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 제196호)’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불상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자루 바로 아래가 높이 40m의 절벽인 ‘낙화암(落花巖)’이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로 유명하지만, 삼천궁녀는 3,000명의 궁녀가 죽었다기보다는 수많은 궁녀가 죽었다는 걸 의미하는 문학적인 수사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삼국사기〉에는 낙화암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데, 삼천궁녀가 처음 언급되는 건 조선 초기의 문신 김흔(1448~?)의 ‘낙화암’이란 시다. 다만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는 낙화암의 전설이 이같이 기록돼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과 접해 있다. 전하기를 의자왕이 여러 후궁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끌고 와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속설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 〈당사(唐史)〉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무엇이 사실이건 간에 낙화암은 적에게 능욕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백제 여인들의 드높은 절개가 서린 곳임에 분명하다.

‘백화정(百花亭)’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세운 정자다.

낙화암 정상에는 ‘백화정(百花亭)’이란 작은 정자가 있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扶風時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운 정자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소동파의 시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에서 따왔다. 백화정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1028년(고려 현종 19년)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고란사가 나온다.

강가로 조금 더 내려가면 ‘구드레나루터’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이다. 유람선을 타고 강 아래에서 바라보는 낙화암은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다른, 또 다른 풍광을 자아낸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낙화암(落花巖)’이란 붉은 글씨도 제대로 볼 수 있다.

현지 주민이 즐겨 찾는 산책로이기도 하다는 부소산 소나무숲을 취재차 방문한 날은 33도가 웃도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소나무 숲이 만들어준 그늘과 시원한 바람 덕분에 덥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쩌면 1,500년 전 백제로 떠나는 스펙터클한 시간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소산 소나무숲이 만들어준 그늘과 시원한 바람은 무더위를 잊게 해준다.
낙화암 정상에서 바라본 백마강과 황포돛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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