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평화가 다시금 중요한 화두(話頭)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평화가 화두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인종차별’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한 흑인 남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인종차별을 반대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위를 막는 정부의 무력진압 방법이 더 큰 시위를 불러오고 있어 갈등이 커지는 양상입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 매년 경찰의 총격·과잉진압 등으로 사망하는 미국인이 1,00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무력진압이 결코 평화상황을 불러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됩니다.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이런 저런 분규와 시위가 발생했고 이에 따른 무력진압이 있어왔지만, 그것은 진정한 평화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평화는 이렇듯 무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한 좋은 예화를 부처님 재세 당시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파세나디왕이 어느 날 성 밖 아름다운 교외의 풍경을 즐기고 있다가 문득 메다룬바라는 석가족의 마을에 머물고 계신 부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이어서 죽여야 될 자는 죽이고, 몰수해야 할 자는 몰수하고, 추방해야 될 자는 추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판에 임했을 때, 내 이야기를 방해하는 자가 있습니다. 내가 재판에 임했을 때에는 내 이야기를 방해하거나 지장을 주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제자들을 보건대, 부처님께서 수 백 명의 대중을 상대로 법을 설하실 때, 제자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수 백 명의 제자에게 법을 설하실 때, 한 비구가 기침 소리를 내자 다른 비구가 무릎으로 그 비구를 건드리며 ‘조용히 해. 우리 스승께서 이제 법을 설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도장(刀杖)을 쓰지 않고도 대중이 이렇게 통제될 수 있다니!’ 부처님이시여! 나는 이런 대중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파세나디왕은 이시닷타와 푸라나두 목수의 이름을 거론하고 “나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내 덕으로 명성을 떨쳤고 재산도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파세나디왕은 “나는 언젠가 전쟁에 나갔다가 그들을 데리고 어느 민가에서 함께 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붓다의 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잘 때가 되자 붓다가 계신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내가 있는 쪽으로 발을 뻗고 잤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는 터인데, 나를 존경하기보다 부처님을 훨씬 더 존경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도장을 쓰지 않고도 대중이 이렇게 통제될 수 있다니.”라는 파세나디왕의 말은 부처님이 대중에게 존경받는 이유와 연결돼 있습니다. 도장이란 칼과 곤장을 말합니다. 파세나디왕처럼 칼과 곤장을 쓰지 않고도 대중을 통제할 수 있는 부처님의 힘은 대중을 우러르는 존경심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질서 없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양을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떤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야단법석이란 부처님 재세 당시 숲과 들에서 수시로 법좌를 열었던 광경을 말하는 것으로 파세나디왕의 말처럼 수 백 수 천의 대중이 모였어도 질서정연하였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법문을 하나라도 허투루 듣지 않고 경청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광경은 수시로 펼쳐졌습니다. 어느 때 1,250명의 대중이 모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 즉 절대적 평화의 경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숙연함과 장관에 감복한 부처님의 제자 반기사는 그 광경을 시로 읊기도 했습니다. 이는 〈상응부경전〉 ‘천이상’에 나옵니다. 

이처럼 평화는 마음을 움직일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내고 욕심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조복받아 평정심을 찾는다면 평화는 영원히 유지될 수 있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진정한 평화란 도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님을 찾아와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역시 부처님에 대한 파세나디왕의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한 것이지 무력을 사용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평화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평화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지혜로운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시위와 관련해 던져보는 화두입니다. 세간에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평화의 가르침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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