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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을 향한 순례와 대화7_프란치스코와 지장보살 김교각궁극의 진리는 지극한 고독과 고통의 저 끝자락에
라 베르나 수도원 전경.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라는 듯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다. 우리는 몬테 수바시오(Monte Subasio) 중턱 791미터에 있는 카르체리 은둔소(Eremo delle Carceri)를 향했다. 묵상하며 걸었다. 풀과 나무와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환희심이 가득한데 새소리는 귀를 간질이고, 이른 시간인지라 나무향기마저 허파 저 깊이 차곡차곡 쌓인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여기서 묵상하고 기도했다. 수도원 앞에는 우물이 있고, 입구 문 위쪽으로는 둥그런 방패에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뜻하는 상징이 조각돼 있다. 성인이 머물렀다는 동굴에는 돌침대와 탁자와 십자가만 조촐하게 놓여있다. 동굴의 출구에는 붉은 돌이 있고 그 가운데 구멍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유혹에 빠트리려다 실패한 악마가 그리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곳을 지나 약간 위쪽에 막달레나 경당이 보인다. 그 옆으로 소년이 잡은 산비둘기를 프란치스코 성인이 놓아주라고 설득하는 모습의 청동조각상이 있다. 이어 은둔소에 머물렀던 맛세오·루피노 등 복자들의 청동상이 눕기도 앉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우리는 길섶에 나란히 앉아 고바오로 신부의 귀중한 말씀을 들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행한 묵상을 헤아리는 것이다. …… 40일 동안 무엇을 했을까? ……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인 우주를 읽는 것은 거룩한 독서다.”

소년이 잡은 산비둘기를 프란치스코 성인이 놓아주라고 설득하는모습의 청동조각상.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괴리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말 때문에 내려오며 생각했다.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는 호모 데우스의 지위에 오른 현재도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그 시대에 신자가 두통을 호소하면 신부는 악마가 깃들었다며 기도를 하라고 처방했다. 더 후대로 내려가서 교회가 타락했을 때는 면죄부를 사라고 했고, 일부 신부는 악마가 나갈 수 있게 하자며 머리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당시 거의 절반에 달하는 유럽 사람들이 죽은 흑사병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한 광기와 공포로 무고한 유태인과 불쌍한 여인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그 공포 속에서 대중들은 차츰 경험과 사례를 통해 기도가 아니라 과학이 자신을 흑사병으로부터 구원함을 분명히 인식했다. 상하수도를 개선하고, 격리·검역을 실시한 도시는 흑사병 사망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고 정치집단도 차츰 과학적 대안을 받아들이면서 교회의 권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과 계몽사상, 산업화와 도시화, 보통교육, 금속인쇄와 출판의 대중화 등이 보태지면서 의식각성을 한 시민들이 교회 밖에서 시민사회를 구성했다. 

이후 과학은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1941~)와 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1954~)는 신학자들과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며 아직도 창조론을 믿는 미국 대중들을 계몽하는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는 “진화에는 목적이 없으며 생명의 창조와 진화에 신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생명체는 결함이 있다. 만약 설계자가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이 없어서 진화가 필요하지 않은 완벽한 생명을 만들었을 것이다. 생명체들의 진화는 눈먼 시계공이 고쳐보려 애쓰지만 늘 실패를 거듭하다 어쩌다 요행을 부려서 작동하는 것과 같다.(리차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우주의 창조와 운동도 마찬가지다. 138억 년 전에 플랑크 스케일(Planck scale)이라는 10⁻35미터 공간에서 플랑크 시간(Planck time)이라는 10⁻43초란 짧은 시간에 대폭발[Big Bang]이 일어났다. 이는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이라는 양자중력적 현상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우주에서 양자요동이 일어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기고 이것이 결합하면서 원소와 물질을 만들었다. 우주는 무(無)로부터 만들어졌다. (로렌스 크라우스, 〈무로부터의 우주〉)

우리는 신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소망한다. 신을 믿고 섬긴 만큼 신 또한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 개입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기적인 소망만이 아니라 선한 자들이 고통을 받고 핍박을 당할 때, 악한 권력에 의해 선량한 약자들이 죽음을 당할 때, ‘신은 과연 어디에 계시냐?’고 절규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행위는 신에 대한 모독이며, 아무 때나 신을 부르는 행동은 신을 개인의 의지처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신은 이 세계 안에서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신은 우주의 창조나 진화의 진행과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신을 믿거나 부정하는 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죽어야 할 것은 인간의 실존이나 초월과 별 관련이 없는 실체로서, 최고의 존재자로서, 내 기도의 응답자로서,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로서 신이다. 신은 우리가 느끼는 존재의 떨림·초월적 힘에 대한 감수성이며, 존재자로서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는 울림, 존재의 소리를 듣는 영적인 지평에 관계된 개념이다. 경주 남산의 아름다운 불상이 바위에 부처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바위 속의 부처를 드러낸 것이듯, 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한계가 많고 불안하고 고독한 인간이 무한으로 초월하고자 할 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체험하는 그 무엇이다.(신승환, 〈철학, 인간을 답하다〉를 참고·수정함)

프란치스코 성인을 유혹에 빠트리려다 실패한 악마가 빠져나갔다는 구멍. 카르체리 은둔소의 출구에 있다.

오상(五傷)을 받은 프란치스코 성인

우리는 아씨시를 떠나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로 갔다.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이 로마 병사 1만 6,000명을 몰살시킨 전장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순절(부활절 이전 40일 간)의 어느 수요일 페루지아 호숫가에 살며 성인을 충실히 따르던 어떤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하느님으로부터 “호수에 있는 섬에 들어가 사순절을 지내라.”는 영감을 받고 빵 두 개를 가지고 섬으로 들어갔다. 성인은 그 중 반쪽만 먹으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40주야의 대재를 지킨 것이다.(기경호,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찾아서〉)

우리는 일행 중 한 분이 한턱내는 바람에 식당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피인 듯 성인의 피인 듯 근사한 와인을 마셨다. 다음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박경준 교수의 지도를 따라 틱낫한 스님의 걷기명상을 했다. 우리는 호숫가에서 “지금 여기 도달했네. 나무-아미타불. 지금 여기 고향이네.”라고 말하며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집이나 고향’의 의미는 ‘깨달음, 열반, 극락’과 통한다. 숨쉬기 명상, 걷기 명상, 품어 안아주기 명상 등 마음챙김 수행의 궁극 목적은 고향과 집과 같이 모든 고통을 없애고 ‘지금 여기에서’ 지극히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까말돌리 수도원과 미켈란젤로의 생가를 거쳐 라 베르나(La Verna) 수도원으로 향했다. 해발 1,283미터의 라 베르나 산 정상아래 1,128미터 지점에 수도원이 있었다. 깎아지른 암벽 위에 돌로 지은 수도원이 날아갈 듯 얹혀 있고, 돌 사이에 풀과 나무와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졌는데 절벽 위의 한 쪽 끝에는 천연 그대로의 나무십자가가 우뚝 서 있었다. 필자가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수도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은 고독을, 바위들은 침묵을, 별다른 장식 없이 돌로 지은 벽과 지붕은 금욕을, 가공하지 않은 나무십자가는 청빈을 뜻하는 듯했다. 

성인은 마로코를 향해 가다가 몬테펠트로에 들렸다. 마침 인근 레오성에서 기사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1213년 5월 8일에 성인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오를란도 백작이 이 산을 선물로 바쳤다. 성인의 두 형제가 이 산을 답사하고 여기에 움막을 지었다.(기경호,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찾아서〉)

오를란도 백작은 그 자리에 조그만 경당을 지었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잠시 쉬느라 참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새떼가 날아와 노래를 부르며 날갯짓으로 인사했다. 성인은 공중에 걸쳐 있는 거대한 바위, 사쏘 스피코 아래서 기도했다. 튀어나온 바위가 침대였다. 하루는 천사가 와서 “우리가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연주하던 것을 여기서 들려주겠다.”라며 바이올린 현을 건드리자 프란치스코는 황홀감에 휩싸였고 모든 슬픔이 사라졌다. 성인은 형제들로부터 떠나 건너편 깊은 계곡에 움막을 짓고 기도했다.

수도원 광장에서 영성춤을 추는 4대 종교 순례단.

성인이 묵상하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하던 어느 날 마음이 불꽃에 타고 있을 때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최상급 천사)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천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의 모습, 곧 예수님이었다. 예수께서 아주 가까이까지 그에게 오시고 그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실 때 그는 인자하신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뻤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뵈올 때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 놀라운 환시가 사라지자 육신에는 그리스도의 고통 자국이 생겼다. 예수님처럼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생겼고,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나타났다. 성인은 형제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도복에는 피가 묻어났다. 형제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이 프란치스코의 몸에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프란치스칸 선집〉/요하네스 예르겐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 후 성인은 포르찌운쿨라 경당으로 돌아와 선교를 했다. 그는 모두가 꺼리는 나환자에게 가서 몸을 씻겨주었다. 성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나병이 사라지고 새살이 돋았다. 나환자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치유돼 크게 울며 회개했다. 성인은 늙고 병들었어도 수행과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1226년 10월 3일 그는 포르찌운쿨라의 작은 움막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고는 선종했다.(〈프란치스칸 선집〉/요하네스 예르겐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오상 이전의 삶이 죄 중에 있던 삶이었다면, 이후는 회개의 삶이었다. 회개는 참회와 전환이다. 프란치스코에게 ‘회개(metànoia: ‘meta’는 ‘넘어서, 바뀌다’, ‘noia’는 ‘정신, 얼’이니, 이를 회개(悔改)로 번역하지만 원래 ‘사람의 정신이 전환함’을 뜻한다.)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된 본능적인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내어맡기는 삶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며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라고 말했다. “회개한다.”는 것은 새로운 실존의 은혜로운 시작으로 이는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회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이다. 회개의 자세란 영혼과 육신의 온갖 괴로움이나 고생, 갖가지 시련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마음의 순수성에 도달하고, 내적인 가난과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과 ‘참된 기쁨’으로 하느님을 관상하게 된다.(실베스트로 베얀, 〈성 프란치스코 및 작은 형제들의 삶 안에서의 수덕(修德)〉)

우리는 이 수도원에서 여러 달을 수도한 고바오로 신부 덕에 성인이 오상을 받은 그 자리, 오상경당에 섰다. 이 좁디 좁은 바위 틈새에서 어떤 경지의 고행과 수덕을 하였기에 성인은 오상을 받았을까. 그 거룩함에는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지만, 고독의 한 자락이나마 느껴보려 절벽 가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고바오로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하느님에 이르는 정신의 여정에는 몇 단계의 길이 있다고 한다. 성인은 로고스의 신비와 영혼의 신비를 관상하였고, 나아가 영혼을 통하여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초월적 신비를 관상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선(善)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라 베르나 수도원의 광장에서 박경미 목사의 지도를 받아 영성춤을 추는 것으로 성인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개신교·천주교·불교·원불교 신자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원무(圓舞)를 추고 몸 안의 영성을 손가락 끝에 모아 하늘로 보냈다. 거룩한 곳을 향하여 꽃송이로 피어오른 마흔 개의 손가락이 나무십자가와 조화를 이룬 모습은 눈물이 살짝 어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신비의 끝자락이나마 스치지는 않았을까?

카르체리 은둔소 전경

왕자에서 지장보살이 된 김교각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실재한 왕 가운데 전륜성왕의 정법정치에 가장 근접한 왕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이다. 성덕왕은 ‘무기를 녹여서 보습으로’를 실천하고, ‘가축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교서를 내렸다. 또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8세기에 이미 기본소득과 복지정책을 행했다. 효소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첫 아들인 중경(重慶, 밝혀진 이름은 金守忠, 696∼794)은 24세에 당나라에서 출가해 ‘교각(喬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는 석실에서 눈을 감고 수행했으며 그 옆에 다리가 부러진 솥에는 흰 흙과 소량의 쌀 뿐이니, 그것을 익혀 먹고 있었다. 여름에는 흙에 섞어먹고 겨울에는 옷으로 불을 아끼고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밭을 일구고 땔나무를 캐어 자급했다.”(비경관(費冠卿) 찬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김진무, 〈중국 지장 신앙의 연원과 김지장〉)

스님은 아미산·보타락가산·오대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교 성산(聖山)인 안휘성의 구화산(九華山, 1,342m)에 자리를 잡고 고행을 하며 수행했다. 석실에서 눈을 감은 채 좌선을 행하고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낡은 솥에 흙과 섞인 쌀로 밥을 지어 먹고 겨울에는 옷으로 대충 보온을 했다. 스님의 고행이 어찌나 지극한 지 여러 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돈을 받기를 청했고, 남방에서는 마르고 또 마른 사람들이란 뜻으로 ‘고고중(枯槁衆)’으로 불렀다고 한다. 

교각 스님이 청빈·금욕·침묵·노동을 행한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과 유사하다. 그렇게 75년을 수행하고 99세에 열반했다. 794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시신을 함 속에 앉히고 3년이 되어 탑에 넣으려고 열었더니 안색이 살아있는 듯했다. 옮길 때 골절이 움직여 쇠사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남대(南臺)에 작은 부도를 세웠으니 이곳이 지장대사가 연좌한 곳이다.”(찬녕(贊寧) 찬 〈송고승전(宋高僧傳)〉/김진무, 위의 글)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이라고 확신해 그의 육신에 금을 입히고 3층 석탑을 세웠다. 그러자 탑에서 빛을 발하여 원광(圓光)을 이루었으며, 이후 구름떼처럼 대중과 스님들이 몰려들어 경배했고 보시하는 재물마다 과보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 교각 스님은 지옥이 빌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이 되었고, 그로 인해 중국에 지장신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구화산은 대중들의 염원과 황제의 명에 따라 중국의 4대 불교성산이 되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 아미산에 보현보살, 보타락가산에 관음보살이 상주하지만 오직 구화산에만 실존인물인 김교각 스님이 머물고 있다. 중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장보살만큼 인간을 위해 큰 희생을 행하는 보살도 없다. 지옥에 간 가장 나쁜 사람까지도 자비심을 갖고 구제하는 자이자, 지옥이 빌 수는 없는 것이므로 지장보살도 끝내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니 가장 높은 자가 되었음에도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존재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한 암굴 경당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인 나병환자에게 섬김과 사랑을 베풀었고, 교각 스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악한 이들에게 동체대비심을 낸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대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와 향락을 버리고 금욕과 청빈으로 수덕을 쌓아 오상을 받아 예수님 다음 자리의 성인이 되었다면, 김교각 스님은 왕자로 태어나 부귀영화와 권력을 떠나서 75년에 이르는 고행과 좌선을 하여 보살이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신비를 체험하고, 궁극적 진리, 해탈에 다다를까? 이는 절대 고독과 지극한 고통의 저 아득한 끝자리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프란치스코 성인과 교각 스님처럼 절대고독 속에서 청빈과 금욕을 행하며 가없는 고통에 빠질 때, 그리고 그 고통의 극단에서도 고통을 피하지 않고 관상하면서 기도나 염불을 하고 수행을 추호도 게을리 하지 않고 모든 번뇌와 망상을 씻어낼 때 불현듯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라 베르나 수도원 안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은곳에 오상경당이 자리한다.그 경당의 돌창으로 보이는산 아래 마을 풍경.
가운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건물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마지막으로 머문 포르찌운쿨라 경당. 이 작은 경당을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이어미새처럼 둘러싸고 있다.
라 베르나 수도원 절벽 위에 널찍하게 난 도로를 관광객들이 걸어가고 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한국시가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글·사진 이도흠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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