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 김기추

‘새말귀’ 수행론 정립·보급하며
보림회 결성, 거사 禪風 일으켜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 1908~1985) 거사는 1908년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했는데,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20세 때는 민족 단결과 조선해방에 뜻을 둔 청년동맹인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을 맡아 일제에 항거하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친동생인 김양추가 〈벽암록〉을 반입해줘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만기 출소 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끊이지 않자 만주로 건너가 사업을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되었다. 함께 구금됐던 사람들이 수시로 처형당하는 걸 보며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유치장 벽면에 ‘관세음보살’ 명호를 쓰기 시작했다. 5~6개월 정도 지나니 벽면 전체가 ‘관세음보살’ 글자로 뒤덮였다. 정말 관세음보살님의 돌보심이었을까, 불자 어머니를 둔 일본인 간수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그는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우면서 쓴 것 같아요. 안 외우면 그렇게 쓰질 못합니다. 여러분이 자비심을 발동시키면 바로 여러분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대행기관이 됩니다. 관세음보살과 여러분이 둘이 아니에요. 또 여러분은 마왕 파순이도 될 수도 있습니다. 모습놀이(형상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를 좋아하면, 그 몸 그대로 파순이 되는 겁니다.”

非心非佛’ 구절로 확철대오

만주의 감옥에서 구사일생 했지만, 백봉은 여전히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광복 후에는 동생 김양추와 함께 부산에서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후 정치 입문을 계기로 큰 시련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백봉은 중년(中年)을 훌쩍 넘겼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1962년 무렵, 절에 다니면서 참선공부를 하던 친구 신원경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절에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 찾아간 관악산의 한 사찰 주지스님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아 참선공부를 시작했다. 7개월 간 용맹정진을 하다가 함께 수행하던 도반과 함께 청주에 있던 심우사로 옮겨 보름여 용맹정진을 했다. 

1963년 1월 암자에서 수행을 하다가 몸에서 열이 나 선방 밖에 나와 바위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깊은 삼매에 들어간 그의 몸에서 방광(放光)이 일어났다. 놀라서 달려온 동네 사람들은 얼음장 같은 몸을 안아 방안에 눕혔고, 도반인 신원경은 언 몸을 주물러 녹였다. 그날 이후 백봉의 행동은 평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신원경은 김기추의 기색을 살핀 뒤 평소에 읽던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아무 곳이나 펼쳐 보여주었다.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란 구절을 본 백봉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뭔가 변화는 보였지만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신원경은 백봉의 안색을 살피면서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에 적힌 구절은 〈무문관〉 33칙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였다. 

이 구절을 본 백봉은 깜짝 놀라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또다시 방광이 일어나자 도반들은 백봉이 대오(大悟)한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도반이 〈금강경〉 한 구절을 들려주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백봉은 〈금강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얼마 후 백봉이 대오했다는 소식이 승가(僧伽)에 까지 전해졌다. ‘욕쟁이 도인’으로 유명한 춘성 선사는 백봉을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거사’라고 불렀고, 탄허 스님은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또 청담·대의 스님 등은 출가를 권유한 반면, 혜암 스님은 재가(在家)에 남아서 법을 펴라고 권했다. 이에 대해 백봉은 “불법은 머리를 깎고 깎지 않고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재가에서 법을 펴겠다고 말했다. 

1965년 재가수행단체인 ‘보림회(寶林會)’를 결성하자 주로 장·노년층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백봉거사는 그들에게 〈금강경〉을 강의했다. 69년 보림선원을 개창해 설법을 하자 대학생들까지 선원에 모여들었다. 이후 백봉거사는 20여 년 간 최상승 법문을 설하여 수많은 불자를 지도하고, 인가했다.

부산 영도 도서관에서 〈금강경〉을 강송하고 있는 백봉거사.

방황 끝에 백봉거사를 만나다

필자는 어릴 때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1964년경 국민학교 6학년 무렵,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일이 발생했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친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든 이후에는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즈음 과학시간에 우주에 대해 배웠는데, 막연히 끝없는 우주와 죽음 간에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제는 중·고등학교 내내 필자를 고민에 빠뜨렸다. 결국 천체학자가 되어 우주를 연구하자는 생각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막상 진학을 하고보니 대학에서 배우는 물리학으로는 필자가 고민하던 문제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한동안 방황이 이어졌다.  

중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가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친형의 영향을 받아 불교공부를 열심히 하던 친구였다. 1974년 어느 날 자신이 어느 도인에게 불교를 배우러 다니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친구를 따라간 곳이 바로 부산 사직동 보림선원이다. 당시 백봉거사는 부산에 선원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백봉거사를 처음 뵙고 들은 한 시간 가량의 설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백봉거사는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불교공부’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또 ‘우주를 알아야, 우주의 본체를 알아야 불교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봉거사의 확신에 찬 설법을 듣는 순간 ‘이 분은 이미 나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신 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매일 저녁 설법을 들으러 다녔고,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에 참석했다. 그리고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란 화두를 받았다. 

백봉거사는 이듬해부터 ‘새말귀’를 주제로 한 설법을 하기 시작했는데, ‘새말귀’는 기존의 화두 대신에 세속에 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새롭게 정립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말씀이다. 

“화두는 우리말로 말귀거든. 새로운 화두를 우리말로 ‘새말귀’라고 하는데. 본래의 성품 자리, 무정물인 몸뚱어리를 끌고 다니는 그 자리를 밝혀내는데 화두 또한 중요한 법이란 걸 우리는 알아야 해요. 그러나 이 화두는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해야 하거든.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이 화두의 방편을 바꿔야 해. 

이젠 내가 화두를 안 줄 작정입니다. 전부 새말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새말귀를 받으려면 서너 달은 설법을 들어야 해요. …… 한 오십 년 후에는 새말귀가 굉장히 퍼지리라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과학적으로 이전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개는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도리를 다 알게 되기 때문에 공부하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시집 장가 갈 때 다 가마 타고 갔지만 요새는 자동차 타고 가잖아요? 좌우간 시대가 다르니까 방편도 달라. 내가 꼭 말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이후 날마다 설법을 들었다. 2~3년 간 부산 보림선원 여름·겨울 철야정진에 참가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화두가 순일하게 들렸다. 1977년 여름 철야정진 때는 참선 시작 후 1~2분 만에 선방에 있는 시계소리 대신 화두만 들렸고, 어느 순간 화두마저 끊어지는 순간이 왔다. 그때의 심경을 비유한다면, 커다란 공장에서 엄청나게 큰 기계 소음에 말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는데, 갑자기 정전으로 기계가 딱 멈춰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돈 느낌이라고나 할까. 

생전 처음 생각을 쉬어 본 경험이었다. 그때 비로소 ‘모든 사람은 1초도 쉬지 않고 생각을 일으킨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동산수상행’ 화두를 떠올리니 답이 저절로 나왔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적었다. “예리한 칼을 들고 쫓고 쫓을 새, 갈 곳 없는 동산수상행이 내 집안 소식을 토하는구나.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할 일도 많았던 내 집안 일이 하나도 할 일 없는 그대로구나.”

적은 종이를 백봉거사께 보여 드렸더니 고개를 끄떡이고는 별말이 없으셨다. 그런데 설법시간이 되자 대중 앞에서 필자가 쓴 글을 읽으신 후 “전 군이 화두를 깼다.”고 말씀하셨다. 

1974년 5월 부산 금정사에서 설법하고 있는 백봉거사. 대의 스님과 주지 스님 등이 동참한 가운데 15일간 설법이 이어졌다.

백봉거사의 입적

부산 보림선원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매년 실시하는 일주일 철야정진에는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러다 1982년 동계철야정진 기간에 백봉거사께서 공겁인(空劫人, 허공의 주인공)에 대한 설법을 하셨는데 어느 때와 달리 나 자신이 바로 공겁인이라는 실감을 하게 됐다. 

백봉거사께서는 “여러분은 공겁인의 분상에서 공겁사를 굴린다는 이 도리만 안다면 앞으로 나흘 동안 더 할 것이 없어. 그대로 여기서 일은 끝났어. 춤추는 일밖에는 없어.”하고 대중에게 말씀하신 후 “전 군, 자네 공겁인 알겠지? 철두철미하게 느낌이 오지? 이걸 느낀다면 만사 다 끝났어. 춤밖에 출 것이 없어.”라고 말을 건네셨다. 그 순간 실감이 왔다. 

일주일 철야정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직장을 다니는데, 마침 백봉거사께서 삼보법회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초청법회를 열게 되었다. 필자는 백봉거사를 모시고 법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다음해 정릉 보림사에서 일주일 철야정진을 개최할 때도 모든 준비를 앞장서 하게 됐다. 그 후 6개월 이상 보림사에서 한 달 중 보름은 〈선문염송〉 설법을 하고, 부산에 내려가곤 했다. 

결국 필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백봉거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 보림선원 근처에 새 직장을 잡고 선원생활을 병행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에 참석하고, 퇴근 후에도 선원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낮에 직장을 다녀도 공부의 연속이었고, 선원의 모든 일에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백봉거사 곁에 머물다보니 가르침도 많이 받았다. 

“공부하는 사람의 공부 수준은 아내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는 법이야. 하지만 대도(大道)를 이루려면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거나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지옥에도 가는 법이야.”와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또 한 번은 “너의 생사문제 해결하는 게 몇 푼어치나 되노. 다른 사람의 생사문제를 해결해야지.”라고도 하셨다.

1984년 가을, 백봉거사께서 염원하시던 산청 도량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직장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채 철야정진에만 참가했다. 1985년 여름 철야정진에도 참가했으나 일주일 휴가를 내지는 못해 몇몇 참가자와 함께 이틀을 남겨두고 부산으로 돌아가게 됐다. 인사를 드리자 부축을 받고 선원 마당까지 나오신 백봉거사께서는 필자를 쳐다보며 “내가 요즘 유마탑 앞을 가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잘 걷지를 못하시는 백봉거사를 후배 도반과 함께 업어서 유마탑까지 모셨더니 대뜸 “전 군 자네가 여기 들어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예, 들어오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부산으로 내려와 이틀이 지났을 때 입적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985년 7월 28일 산청 보림선원에서 열린 제23회 철야정진에서입제법문을 하는 백봉거사. 거사는 회향 직후인 8월 2일 입적했다.

일주일 철야정진 주관하며 
보림선원의 명맥을 잇다

백봉거사께서 갑자기 입적하시자 평소 거사님을 대신해 설법을 하던 수제자도, 선배 도반들도 누구 한 명 선뜻 나서서 법회를 잇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10년 이상, 일 년에 두 차례씩 해오던 일주일 철야정진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보림선원 총무라는 직책을 내세워 철야정진을 준비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도반들이 젊어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산청까지 와서 철야정진을 하기 어려웠다. 어렵게 해운대에 있는 대자선원을 빌려 겨울 철야정진을 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자연스레 필자가 철야정진을 주관하게 되었고, 다행히 매년 빠지지 않고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백봉거사께서 생전에 전 15권 중 9권까지 출간했던 〈선문염송〉 원고를 산청에서 가져와 완간했다.

그러나 필자는 백봉거사를 모시고 공부하면서 몇 번 실감은 하였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공부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봉거사께서 산청에 들어오라고 하셨던 것이 죽을 각오로 공부에 전념하여 대도를 이루라는 뜻이었다는 사실도 차차 알게 되었다. 따라서 언젠가는 산청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동생 사업에 보증을 선 게 잘못돼 필자의 사업마저 부도가 나는 일이 발생했다. 서울로 올라와 선배도반 묵산 스님이 계신 보림사를 찾아갔더니 선뜻 방을 내주셔서 재가선방을 열고 서울지역 도반들과 함께 철야정진을 이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지인의 소개로 서울 길상사 사무장 소임을 맡아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다가 예순이 넘어서 산청에 내려오게 되었다. 필자는 현재 스승인 백봉거사의 뜻을 이어받아 방치되었던 산청 보림선원을 수리·정비한 후 도반들과 매주 토요일 철야정진과 여름·겨울 일주일 철야정진, 봄·가을 철야정진을 통해 대중포교에 노력하고 있다. 

1983년 제18회 동계 철야정진 중 스승 백봉거사님과 함께.
1985년 1월 1일 유마탑 낙성식.

전근홍
백봉 김기추의 제자로 현재 산청 보림선원장을 맡고 있다. 보림선원에서 매 주말 철야정진, 여름·겨울 휴가에 맞춰 실시하는 일주일 용맹정진, 스승의 유고(遺稿) 출간 작업을 40여 년 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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