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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그땐그랬지9_개근상과 반동자
  • 글 한승원 삽화 전병준
  • 승인 2020.05.1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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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을 한 날, 나는 선생님의 출석부에 결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출석 점호를 하는 때에 나는 막 운동장에 들어서고 있었고, 뒤늦게 교실로 들어왔지만 선생은 나의 결석을 지각으로 표시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곤 했다. 나는 네 시간 수업을 빠짐없이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 날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와 같은 일이 늘 반복되었으므로 학년말에 성적표를 받아보면 결석이 다섯 개쯤 되어서 개근상도 정근상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공책검사

매 학년 말에 나는 항상 우등상은 받았지만 개근상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형과 작은 누님은 개근상만 받을 뿐, 단 한 번도 우등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개근상 못 받은 나를 코가 빠지도록 꾸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곤 하는데 왜 그렇게 결석이 많으냐는 것이었다.

일제 때 마을 앞의 사립 양영학교(독립운동가 김재계 선생이 설립한 2년제 영재 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는 아버지가 중시하는 것은 개근상이었다. 개근상은 그 사람의 근면성실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여기셨다. 아무리 영리하고 공부를 잘해도 근면성실함을 인정받지 못하면 장차 좋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왜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좋다는 말인가? 결석으로 인해 개근상을 못 받은 것이 아니고, 지각을 했을 뿐인데. 지각을 결석으로 처리한 것은 선생님의 불성실인데.

훗날 어른이 된 나는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좋다.’는 아버지의 말에 반발하는 삶을 살았다. 근면성실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단 한 번의 인간적인 실수도 하지 않고 받는 개근상은 자유로운 사유와 창의력의 고갈을 가져올 수도 있는, 융통성 없는 삶일 수도 있다고 여기면서.

아버지는 가끔 형과 나의 책보자기를 펼치고, 공책검사를 하곤 했다. 공책을 보면 그 학생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형은 칭찬을 받았고 나는 꾸중을 들었다. 형은 공책을 아주 깨끗하게 정리했다. 선생님이 판서해준 것을 공책에 반듯반듯 정서를 한 것이었다. 반면에 나의 공책은 낙서장(落書張)처럼 산만했다. 모든 글씨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괴발개발 쓰여 있었고, 바르게 정리된 것은 없었다.

“생긴 것은 말끔하게 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어지럽게 사냐? 이것을 글씨라고 쓰냐? 지렁이도 이렇게는 안 기어 댕긴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이럴까? 느그 형 공책 보고 좀 배워라.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깨끗하냐. 느그 형 공책을 들여다보면 내 정신이 다 환해진다.”

그러한 꾸중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이어졌다. 읍내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는 편지로 용돈을 청구하곤 했는데 방학 때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나의 편지 글씨를 문제 삼았다.

“이 사람아, 어른한테 편지 쓸 때는 글씨 좀 반듯반듯하게 써라. 한 글자도 알아먹을 수가 없는데 돈 얼마 보내달라는 글자만 잘 알아먹게 썼더라.”

아버지는 말했다.

“예로부터 남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풍채(드러난 몸과 얼굴 등 겉모양)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말을 논리정연하게 해야 하고, 셋째는 글씨를 잘 써야 하고, 넷째는 그 인품에 대한 평판이 좋아야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반발했다.

“저는 글씨로 먹고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내부에서 곰곰이 나의 먼 미래를 만들고 있었다.

외할머니와 여순 사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사랑방에서 잠을 자다가 누군가의 자지러지는 기침소리에 자주 깨곤 했다. 안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는 외할머니의 해수기침(가래가 나오는 기침)소리였다. 관산 죽청마을에 살던 외할머니는 그 무렵, 완도의 깊은 섬들과 육지를 오가며 미역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당신의 둘째 딸인 우리 어머니의 손을 빌어 미역다발을 마을 사람들에게 먹이고, 그 대신 김을 받아 장에 내다 팔아 남긴 이문으로 광주 형무소에 갇혀 있는 막내아들의 면회를 다니고 있었다. 보성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광주까지 간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허리가 ‘ㄱ’자로 굽어 있었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해수기침을 심하게 하곤 했다. 겨울이면 해수기침이 더욱 심해졌는데, 한 번 터지면 주저앉아 ‘꼬르륵’ 하고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기까지 콜록 소리를 연발했다.

당시 이십대 초반인 막내 외삼촌은 해방 직후 테러사건에 가담했다가 잡혀 들어갔는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내려오자 어디론가 실려가 처형을 당했다. 그 막내아들의 살아있음이 늙은 외할머니의 삶의 끈을 이어주었는데, 그 아들의 죽음을 안 외할머니는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부음이 왔을 때 어머니가 울며 내뱉던 말은 지금 내 귀에 생생하다.

“우리 어메가 미역 다발 해의 다발 등에 짊어지고 다닌 길바닥이란 길바닥의 굽이굽이에는 우리 어머니 지팡이 자국이 찍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어머니〉 라는 소설로 썼다.

4학년 가을 어느 날 밤, 할아버지 방에서 잠을 자다가 천지를 진동하게 하는 총소리에 경악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상(床)장수, 형과 나, 뒷방의 아버지는 집 모퉁이로 가서 총소리 나는 곳을 어림해보았다. 총소리는 어둠에 잠긴 아랫마을 사장(射場) 근처에서 나는 듯싶었다. 빨간 불덩이들이 튕겨 날고 있었고, 그것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거쳐 뒷산 중턱 상수리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얼핏 우리를 향해 날아올 듯싶어 겁이 났다. 뒷간 입구에 서서 어둠 속을 내려다보고 있던 상장수는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개처럼 기어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총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함성이 터졌다. 학교에 가다가 본 골목길 담벼락에 붙어 있던 비라의 말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만세!”, “역적의 이승만을 때려죽이자.”,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

얼마쯤 뒤 총소리와 남자들의 함성은 한재고개를 넘어갔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서, 동무들이 간밤에 총을 쏘아댄 사람들에 대해 아는 체했다. 그들은 큰댁의 작은 당숙 ‘널팬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갯마을 김씨 집안의 청년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해 전에 여수에 창설된 국방군 14연대에 지원해 들어갔는데, 그 부대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기에서 이탈하여 온 두 사람이 총을 쏘며 회진 파출소로 갔을 때 순경들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따돌림

학교가 파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마을 아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했다. 아이들 마음이 전혀 예상 못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이들은 여순반란사건의 실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갔고, 나는 그들을 뒤따라가며 들었는데, 한 아이가 느닷없이 나를 향해 “야, 반동자(反動者) 새끼 너는 저리 가!”하고 말했다.

같은 학급 학생인 우리 마을 아이들은 모두 열 한 명이었는데, 여느 때처럼 한데 어울려 뒷등 길을 타고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머지않아 좌익 세상이 올 거라고 의기양양해 있었고, 무슨 새 소식인가를 들으려고 우리 마을의 최고로 나이 많은 아이(나보다 여섯 살 위) 주위로 몰려들었다.

우리 작은 누님하고 동갑인 그는 진즉에 5학년이나 6학년으로 월반을 했어야 마땅한데, 여섯 살 아래인 나와 같이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학급에 나와 동갑내기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한두 살이나 서너 살씩 위였다. 그들 중에서 여섯 살 위인 그 아이가 대장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광복 전, 일제 때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시험을 거쳐 들어갔으므로, 적령을 넘긴 아이들이 많이 적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그 적체되어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온 것이었다.

나이 어리고,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한 나는 나이 많고 힘세고 덩치 큰 그들의 손 맞잡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했다.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이유는 담임선생이 예쁘고 귀엽게 보고 성적을 터무니없이 높이 평가해주므로 학년말이면 늘 일이삼등을 번갈아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담임선생이 나의 성적을 높이 평가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 성적은 중간에도 못갈 거라는 것이었다.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의 동생(나보다 세 살 위)은 “○○새끼! 너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하고 나서 고추를 꺼내, 넓이가 1미터쯤의 좁은 밭둑길에 가로로 오줌을 갈겼다. “이 오줌 금을 넘어 오는 새끼는 내 아들이다.”하고 선언한 다음 버티고 선 채 말을 이었다.

“이 오줌 금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여기까지 그어지는 것이니까, 길을 버리고 밭으로 내려서서 빙 돌아 넘어와도 그 금을 넘어오는 셈이야.”

나는 오줌 금을 넘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앞장서 가는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나를 구해주려 하지 않고 그 대장을 옹위하고 마을 쪽으로 갔다. 대장의 동생은, 내가 자기의 오줌 금 앞에 서 있는 것을 감시하다가 말했다.

“내가 이랬다는 말 느네 아부지한테 일러바치면 그때는 너 진짜로 죽는 줄 알아. 동네 아이들이 돌멩이 하나씩 들고 한 번씩만 때리면 너는 죽는 거야. 아니, 일러 바쳐도 반동자 느네 아부지 하나도 안 무섭다.”

말을 마친 그는 내 발 앞에 침을 뱉고 나서 다른 아이들의 뒤를 좇아가다가, 가끔 뒤돌아서서 나를 감시하곤 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버렸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반동자’라는 것이 무엇인데 아이들이 나한테 이리하는 것일까?

토벌대의 몽둥이질

그 다음 월요일부터 한 주일 동안, 우리 학급은 오후에 수업을 받는 오후반이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려고 골목길을 나와 사장 마당에 이르렀는데, 갯마을 쪽에서 군인들 한 무리가 질풍처럼 몰려왔다. 쑥색 옷을 입고 철모 쓰고 M1총이나 기관단총을 든 군인들 30여 명, 그들은 토벌대였다. 그들 중 20여 명이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나머지 군인들이 아이들을 사장 마당 한쪽 구석에 모아놓고 ‘꼼짝 마라’고 명했다.

잠시 뒤 마을의 욈소리 하는(주민에 말을 전하는) 사람이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장 마당에 모이라고 외쳤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사장 마당으로 몰려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순이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토벌대장이 느티나무의 밑동에 쌓아올린 대에 올라가서, 먼저 널팬이 당숙의 호적명을 대고, 그 가족들을 모두 나오라고 명했다. 널팬이 당숙과 함께 총을 들고 설친 갯마을의 반란군 이름을 대고 그 집 가족들도 나오라고 말했다. 하사관 둘이 두 마을의 이장에게 그 가족을 불러내라고 명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두 이장이 앞에 나와 사람들 속에 앉아 있는 그들의 가족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얼른 나오시오.”하고 말했다.

큰댁 할아버지와 갯마을의 김한수 아버지가 앞으로 나왔다. 가족들도 따라 나왔다. 하사관 둘이 그들을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모로 거꾸러지면서 울부짖었다.

“아이고오! 나는 그 새끼 낳아준 죄밖에는 없소.”

갯마을의 김한수 아버지는

“아이고 나 죽네.”하고 소리쳤다. 하사관들은 꿇어앉힌 두 사람에게 “느그 자식들 어디 있냐!”하고 물었다. 큰댁 할아버지가 울부짖었다.

“두 발 달린 그 새끼가 어디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 것이요?”

하사관들은 분풀이를 하듯이 그들을 두들겨 팼다.

다른 하사관들은 사람들 속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는 젊은 남자들을 끌어냈다. 그들을 꿇어앉히고 손에 든 몽둥이로 팼다. 두들겨 맞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하고 소리쳤다. 하사관들은 울부짖으면서 두 손을 비벼대는 그들에게 물었다.

“바른대로 불어 이 새끼야!”

“너 반란군 따라가 파출소 습격했지?”

“김일성 스탈린 만세 불렀지?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 불렀지?”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한승원 삽화 전병준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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