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 구제 없이 천국과 열반은 없다

산 다미아노 성당 내부.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에서 기도할 때 중앙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산 위에 집을 지은 까닭

이탈리아 농촌마을을 보면서 가장 낯설게 느껴진 풍경은 산 위에 지어진 집이었다. 성 뿐만 아니라 주택의 대다수도 산이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U.C. 버클리 대학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LA에서 버클리로 이동할 때도 산마루나 능선을 따라 도미노처럼 세워진 고급 주택들이 낯설고 신기했다. 당시 동행한 교수는 미국에선 전망을 주택의 중요한 지표로 삼기 때문에 시야의 방해를 받지 않는 산등성이에 고급주택을 짓고, 우리의 옥탑층을 펜트하우스(Penthouse)라고 부르며 그 아래층보다 비싼 고급주택으로 여긴다고 설명해 준 바 있다. 이탈리아도 그와 같은지 고바오로 신부에게 물었더니, 도시나 마을끼리 약탈이 다반사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하다가 적이 침입해오면 산위로 올라가 싸우려는 목적이라고 답해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저 높은 산 위에서 내려와 밭을 갈고 다시 올라가는 행위를 떠올리면 참 고역일 듯싶었다.

아씨시에서 까말돌리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서 본 이태리 농촌 풍경. 푸른 초원 사이로 S자로 굽은 길과 이를 감싸며 늘어선 싸이프러스 나무,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평화로운 주거문화와 비교가 되었다. 대영박물관에 처음 한국관을 개설해 한옥을 지었을 때다. 영국 큐레이터가 한지 창호문을 보고는 “한국은 얼마나 적이나 도둑이 없으면 손가락으로도 뚫리는 문을 만들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예전에 〈뉴욕타임즈〉는 우리나라를 달걀판에 비유한 바 있다. 국토의 80%가 화강암이고, 이것이 30억 년 동안 불·물·바람으로 다듬어져 곳곳에 아름다운 분지를 이룬 탓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은 냇물이나 강에서 물을 잘 끌어올 수 있으면서도 홍수는 피할 수 있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의 기슭에 형성되었다. 분지가 만든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두레와 품앗이를 했고, 동신제(洞神祭)나 마을굿을 함께 지내며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 탓에 도둑이나 강도는 거의 없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은 1970년대까지 서울에서도 이어졌다. 필자가 영등포 신길동에 살 때 집 마당에 펌프가 있었는데, 24시간 대문을 열어 놓았다. 사람들은 언제든 와서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목욕도 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계단에 있는 부조.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환시(오른쪽)를 보고 놀라는 장면을 조각해 놓았다.

당시 한국 농민들의 삶 또한 고통스럽기는 매 한 가지였다. 이탈리아나 한국의 농민 모두 지배층에게 수탈과 착취를 당한 탓이다. 훌륭한 임금이나 교황이 나올 때는 살만 했지만, 가렴주구가 심하거나 흉년이 들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고, 전염병까지 나돌면 수십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곤고(困苦)하고 신산(辛酸)한 삶에 종교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에 있는 경당. 중앙의 아치에 걸려 있는 것이 바로 다미아노 십자가다.

종교, 인민의 아편이자 구원자

지금도 인류 최대의 화두는 불평등이다. 영화 ‘기생충’이 숱한 상을 받은 첫째 이유도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 문제를 정면에서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언제 어떻게 기원했을까? 작년 11월에 에이미 보가드 등 국제연구팀은 고대 연구에 한 획을 그을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유라시아의 고고학 유적지 150곳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니계수를 매긴 후 “농업이 정착된 지 8,000년이 지난 기원전 4,000년경을 기점으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주요 요인은 소가 끄는 쟁기농법에 있었다.”고 밝혔다. 소에게 쟁기를 걸어 밭을 가는 농부는 그렇지 않은 농부보다 10배를 더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Amy Bogaard 외, 〈Comparing ancient inequalities : the challenges of comparability, bias and precision〉) 필자는 이들이 기술결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쟁기농법 이외에도 기후변동·인구증가 등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인간은 평등한 공동체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4,000년 전 쟁기농법을 도입한 후 10배의 생산성 차이가 나면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본격화했다는 것이다.

전호에서 언급한 대로, 이미 1만 2,000년 전에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 대형의 석조신전을 세웠지만, 종교는 농경사회에 와서 번성했고, 마침내 성인들이 출현하는 기축시대(Axial Age)에 이르러 석가모니는 중생을 교화하다가 열반하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내려왔다가 부활하고, 공자는 수레를 타고 중원을 돌아다녔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전했다.

종교는 불평등과 연관해볼 때 ‘인민의 아편’과 ‘구원자’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제집단은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민중 수탈을 정당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넓은 땅과 커다란 교회를 소유하며 권력과 향락을 누렸다. 민중을 속여 면죄부를 팔면서까지 재산을 탐했고, 흑사병이 번질 때는 신도들에게 교회에 모여 기도할 것을 강요하고 채찍질고행단(Flagellation, 일명 십자가형제단)은 마을을 순례하며 전염을 확산시켰다. 이 모든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수십만의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런 와중에도 몇몇 사제들은 민중의 편에 서서 지배층을 비판하고 민중의 고통을 보듬고 하느님처럼 섬기면서 이들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가난과 결혼한 성 프란치스코

막스 쉘러(Max Scheler)는 “서구 역사 안에서 프란치스코와 같은 공감과 보편적 감성의 힘을 지닌 인물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폴 루트,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

순례단은 아씨시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가를 찾았다. 고바오로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발굴 당시 흙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을 파내고 복원했는데, 아치벽은 새로 만들었지만 그 옆의 벽들은 옛 모습 그대로다. 아씨시의 골목길에서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계단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조가 있었다. 성인이 양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환시를 보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형상으로 나타나고 이를 본 성인이 두 팔을 벌리며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양이 고개를 들고 이를 쳐다보고 있다. 예수님의 몸은 매끄럽게 처리한데 반해 성인은 거친 터치로 질감을 처리하여 청빈한 성인의 기품을 잘 드러냈다. 아래로 내려가니 다미아노 십자가 아래 아치형의 작은 경당이 나왔다. 그 아래로 다시 계단을 내려가니 성인이 갇혔던 어둡고 습한 창고다.

성인은 1181년이나 1182년에 이곳에서 부유한 상인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데 불레몽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회와 축제에 몸을 내던졌고, 말타기와 칼싸움 놀이와 춤을 좋아했으며, 온갖 종류의 유흥을 즐겼다. 친구들의 물주 노릇을 하며 돈을 물 쓰듯이 해서 ‘젊은이의 왕자’라고도 불렸다. 그는 페루자 군대와 맞싸우는 전투에 참여했는데, 원정 첫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후 친구들이 예전처럼 여인과 놀며 환락을 즐기자고 유혹하자 “나는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부인인 가난과 결혼했노라.”고 선언했다.(헤르만 헤세,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나병 환자를 만나자 처음에는 두려움이 일어 피했다. 그러나 곧바로 회개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환자에게 다가가 옷을 벗어 주고 악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인은 후에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한다.(프란치스코, 〈유언〉 / 폴 루트,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한 이후 특별한 사랑이 몸 안에 가득 찼다. 그는 회개로 가치관의 대전환을 한 후 주변의 약자들을 자신처럼 보듬었다. 나병 환우를 찾아 간호했고, 로마를 순례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성 베드로 성당에 봉헌했다. 성당 문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함께 먹고 잠을 잤다. 그러면서 그는 참다운 가난을 체험했다.(헤르만 헤세,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그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체험하면서 더욱 고독해졌다. 아씨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열정을 다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때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렸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내 집이 거의 무너지고 있구나.” 이에 성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내다 팔아 성당의 수리비로 내놓았다. 부친 피에트로는 아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화를 내고 때리고 지하 창고에 가두었지만, 성인의 마음은 굳건했다. 부친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공인받기 위한 재판을 열었다. 재판정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돈을 아버지 발밑에 놓고 옷까지 홀딱 벗은 후 “지금 저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과 옷을 다 돌려드립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아버지로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요하네스 예르겐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후 많은 사제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라 청빈을 계율로 삼으며 가난한 이들의 사목이 되었다. 무소유를 주장하며 탁발하는 사제집단도 생겼다. 요한 22세 교황은 위협을 느껴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투옥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막달라 마리아 경당 앞의 성 프란치스코 동상. 성인이 나병에 걸린 소년을 씻기는 모습이다.

민중과 함께 한 신라의 동령승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 시대라고 해서 모든 승려가 지배계층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승정(僧政)을 담당한 스님들은 국통(國統)이나 도유나(都維那), 그 아래로 주통(州統), 도통(都統) 등에 이르는 직위를 받아 왕을 보좌하고, 사전(賜田, 임금이 내려준 논밭)을 받아 부와 권력을 누렸다. 반면 동령승(動鈴僧)은 이름 그대로 이 집 저 집 찾아가 방울을 흔들어 탁발하고, 수행과 포교를 했다. ‘동령’이란 단어는 나중에 ‘동냥’이 된다. 이들은 귀족과 동급인 승려였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양인(良人)과 다름없는 생을 영위했고, 별다른 명예나 권세 없이 마을을 다니며 대중의 구제에 나섰다.(이도흠,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삼국유사〉는 혜숙과 혜공, 대안 스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동냥승의 서사를 기술하고 있다. 원효 스님도 이 무리에 속했기에 박을 두드리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서민의 집들을 다니며 중생구제행을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또 한 명의 동냥승, 정수 스님의 절절한 이야기를 전한다.

신라 애장왕(哀莊王, 801~810) 때다. 눈이 내려 수북이 쌓인 밤이었다. 황룡사의 정수 스님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삼랑사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천엄사(天嚴寺) 문 앞을 지나는데 한 구걸하는 여인이 아기를 낳고는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시고 있었고, 온몸은 얼음장이었다. 정수 스님은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치고는 여인을 안아주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여인의 볼에 생기가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 여인을 안고 있는 것은 색욕인 듯싶었다. 스님은 가사장삼을 벗어 여인을 덮어주었다. 하지만 겨울바람이 너무 시렸다. 그것만으로는 여인의 몸이 다시 얼 것만 같았다. 스님은 속곳까지 벗어 여인을 덮어 주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에었다. 스님은 뛰어서 절로 돌아왔다. 하늘마저 꽁꽁 얼었는데 별은 유난히도 맑았다.(일연, 〈삼국유사〉의 ‘정수사가 추위에 언 여인을 구하다’조를 풀어씀)

성인이 가장 사랑한 성당인 포르치운꼴라의 장미정원에 세워진 프란치스코의 동상.

중생을 구제하는 순간 성불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이들이 불교를 개인적 치유와 해탈의 종교로 간주한다. 그동안 사성제(四聖諦)의 고(苦)를 개인의 고에 국한해 해석했다. 하지만 〈장아함경〉을 보면, 전륜성왕은 도둑을 잡자 빈궁이 있은 끝에 비로소 강도가 생긴다고 말하며 그에게 오히려 창고의 물품을 내준다. 전륜성왕은 이어 보당(寶幢)을 부수어 사문·바라문과 나라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른다. 이로 볼 때, 불교는 개인의 고(苦)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苦)에도 관심을 두었다. 열반은 개인의 수행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보시를 종합해 이뤄지는 것이다. 개인의 마음과 사회구조, 개인의 업[別業]과 공동의 업[共業],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 윤리는 서로 의존하며 작용한다.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병(金甁)으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라고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아프고 가난한 중생에게로 가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이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는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無明)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한 부처가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계승한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자를 위한 편애적 선택’을 강조했다. 환경파괴와 기후변동으로 무수한 생명이 집단적으로 죽어가고 불평등이 극심해져 수십 억 명이 굶주리는 현 상황에서는 ‘가난한 생명을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이 필요하다.

“불교는 …… 자비가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사회, 가장 작은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을 공정과 배려와 사랑으로 대하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한 세계에 있으면서도 평화와 조화로운 삶이 가장 높고 고결한 목표인 궁극적인 진리, 니르바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테레사 수녀는 “나환자를 씻어줄 때 하느님을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길 때 부처님(하느님)은 없다고 말하지만, 실은 부처님(하느님)께서 가장 아프고 고통 받는 자로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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