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15년 키운 소년, 해양동물 친구 됐어요.”

멸종위기에 처한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제주도에서 온 돌고래라는 뜻)’는 2009년 5월 제주 서귀포시 신풍리 연안에서 우연히 그물에 걸려 이듬해 ‘돌고래 쇼’ 공연업체에 팔렸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좁은 수족관과 공연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재롱을 강요당했던 제돌이는 우여곡절 끝에 5년 2개월 만인 2013년 7월, 친구들이 있는 바다로 방류된다. 이번 호 ‘세상의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제돌이를 돌봤던 서울대공원 선주동(37) 사육사다.

간혹 일이 힘들고 고되다가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곤 한다. 바다사자 ‘꼬마’와 함께.

선주동 사육사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이다. 그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거북이를 키우게 됐다. 엄마는 집에서 동물을 키우는 걸 싫어해 “안 된다.”고 말했지만 거북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어린 선주동은 장(場)이 설 때마다 고무 대야에 담겨 있는 거북이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술시간에도 거북이만 그렸다. 결국 엄마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거북이 한 마리를 사주었다. 거북이는 그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15년을 함께 살았다. 그리고 군 입대를 앞두었을 무렵, 붕어가 많은 연못에 방생을 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했어요.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다니며 토끼와 꿩 등 다양한 동물을 가까이 하면서 자랐어요. 해가 뜨면 집을 나갔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오는 개구쟁이였대요. 집에 들어올 땐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는데, 개구리나 매미 따위를 잡아왔어요. 아버지한테 혼나서 손들고 서있는 벌도 많이 받았죠.”

선주동은 중·고등학교 때 수의사를 꿈꿨다. 하지만 수의대를 지원하기에는 성적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 그는 수의대를 가지 못하더라도 동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막연히 품고 있었다. 한림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는데, 처음에는 흥미가 생겨 박사과정까지 마칠까 생각도 했지만 동물과 식물을 넘어 미생물을 포괄하는 분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점차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됐고, 뚜렷한 목적의식도 희미해져 갔다.

다시 사육사를 꿈꾸다

사육사(飼育士)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시기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방안에 앉아 본격적으로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한 동물 관련 TV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사육사가 손을 번쩍 드는데 돌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엄청난 높이로 점프를 하는 장면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주동 씨는 대학교 2학년 때 TV프로그램을 보고난 후 사육사의 꿈을 키웠다. 돌고래 쇼를 진행하고 있는 선주동 사육사(오른쪽).

사육사가 되겠다며 다니고 있던 대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래도 4년제 대학은 나와야하지 않겠냐.”며 반대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동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었지만 지금껏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말씀은 한 번도 드려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사육사’라는 구체적인 진로를 제시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굳은 결심을 확인한 부모님은 응원을 해주기로 했다.

다니던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조련사를 양성하는 학과를 물색했다. 사육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동물관련학과를 나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육사를 지원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전공자 위주로 선발하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학교는 대경대학교에 신설된 동물조련이벤트과였다.

뒤늦게 신입생이 된 그는 사육사라는 구체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수영을 배우고 스킨스쿠버 자격증 등을 취득했다. 학교 선후배와 함께 동물 뮤지컬과 이동 동물원을 만들어 전국을 누비기도 했다.

“학과 동기들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과대표와 학회장을 맡으면서 학업에 임했어요. 또 자체 공연을 만들어 여러 동물과 가까이에서 교감하는 한편 선후배와 어울리면서 리더십을 키우기도 한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주동 사육사는 대학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2009년에 서울대공원 계약직으로 취업을 하게 됐고, 남다른 열정으로 1년 만에 정직원이 될 수 있었다.

5년 돌본 ‘제돌이’ 바다로 돌려보내

정직원이 된 후 선주동 사육사가 맡은 업무는 ‘돌고래 쇼’였다. 그가 돌본 ‘제돌이’는 2009년 5월 제주도 연안 정치망(定置網)에 걸린 후 공연업체에 팔렸다가 서울대공원 측이 바다사자 두 마리와 맞교환해 데려온 돌고래다.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제돌이는 비좁은 수족관, 강요된 재롱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바다사자와 맞교환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제돌이와 공연을 함께하기 위해 선행돼야 했던 일은 따뜻한 보살핌이었다. 돌고래는 아이큐가 80~90에 달할 정도로 영특한데, 그만큼 예민한 동물이다. 새까만 두 눈망울을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하는 듯 하기도했지만, 생전 처음 만난 돌고래와의 교감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계약직 때부터 무거운 스킨스쿠버 장비를 메고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니 손에는 습진이 생겨 지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다이빙을 많이 한 탓에 퇴근길에 코에서 물이 주룩 떨어지기 일쑤였다.

돌고래 쇼를 하기 위해서는 동물과의 교감 외에 능숙한 말재주도 필요했다. 관람객에게 돌고래 생태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재치 있는 몸짓과 위트도 곁들여야 했다. 그는 공휴일마다 대학로에 나가 연극을 관람하고,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재미있는 동작을 따라했다. 쉬는 날도 반납해가며 여러 기술을 몸으로 익혔다. 이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2011년 4월, 돌고래 쇼에 데뷔했다.

하지만 제돌이와의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돌이가 불법포획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2013년 서울시가 돌고래 방류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후 더 이상 제돌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야생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인간과 나눴던 정을 떼는 게 반드시 필요했다.

제돌이가 서울대공원에서 나와 제주도 바다로 가기 위해 이송통에 들어가 차에 실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돌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라는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걱정이 앞섰습니다. 사람 손에 의지해 살던 돌고래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방류가 결정된 후 제주 김녕 앞바다에 설치된 방류 훈련지(가두리)에서 적응기간을 보내는데, 활어를 잘 사냥하지 못했어요. 마음을 무척 졸였지만, 오래지않아 거친 파도를 타며 활어 사냥에 성공했어요. 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제돌이를 보니 조금 남아 있던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제주 성산항 인근의 가두리양식장에서 야생적응훈련을 하던 제돌이가 선주동 사육사와 눈을 맞추고 있다.

선주동 사육사는 이후 201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곱 마리의 돌고래를 방류하는데 참여했다. 제돌이를 비롯해 춘삼이·삼팔이·복순이·태산이 등을 바다로 돌려보냈지만, 사육사에게는 그리운 마음을 추스를 시간조차 없다.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동물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은 조금 이른 편이다. 그는 보통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동물원에 나온다. 9시 개장시간에 맞춰 관람객을 맞으려면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특히 해양관은 시설 청소가 중요하다. 오전에는 스케줄에 따라 사료조리, 동물건강관리, 진료팀 미팅, 지시사항 전달 등을 진행한다. 오후에는 행동풍부화 훈련, 긍정강화 훈련, 생태설명회 진행 등 동물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동물관리와 연관된 문서를 작성한다.

동물들의 질병 예방과 건강관리를 위해 대기 온도와 수질 측정을 하고 있다.

“업무를 나열하다보니 굉장히 바빠 보이지만, 제가 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은 없어요. 어쩌다 일이 고되고 힘들다가도 제가 관리하는 동물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모습을 보면 자연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재작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멸종위기 야생동물이자 천연기념물인 점박이물범 번식에 성공했는데 그 탄생의 순간에 함께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올라요.”

사육사라는 직업은 수많은 동물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기쁜 일도 많지만 슬픈 일도 많을 수밖에 없다.

2013년 구조돼 울산 장생포 고래연구소에서 지내던 물개 ‘마음이’가 해양동물전문 구조치료기관인 서울대공원으로 오게 됐을 때다. 마음이는 구조 당시 한쪽 눈이 함몰돼 있었고, 다른 한쪽 눈도 상처로 뒤덮여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는 마음이가 물개 무리 속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밤잠을 설쳐가며 돌봤다. 그가 쏟은 사랑을 느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실토실 살이 올랐고, 행동도 대담해지면서 다른 물개 무리에 잘 적응해나갔다.

물개 ‘마음이’는 임연수어와 고등어를 가장 좋아한다. 마음이는 2013년 구조 당시 한쪽 눈이 함몰되고, 다른 한쪽 눈도 상처로 뒤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행동도 대담해졌다.

구인사·문수사 다니며 불교 심취

그는 사람과 동물 간에 신뢰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육사 간의 팀워크가 틀어질 경우에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동물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여러 명이 함께 협업하는 근무형태가 많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까지 팀원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선주동 사육사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동물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매순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선주동 사육사가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항상 기도정진하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30년 전부터 양양 문수사를 다니는 독실한 천태종 불자다. 신심으로 재무와 홍보부장 등 주요직책을 고루 맡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구인사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했다. 주말이 더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밥에 얹어 먹었던 구인사 배추김치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선주동 사육사는 대학을 다닐 때 과제준비를 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인생그래프를 그려본 적이 있다. 당시 그가 세운 설계는 20대에 돌고래 조련사에 입문하고, 30대에 돌고래 조련사로 이름을 알리고, 40대에 사육사와 관련된 책을 출간하고, 50대에 강의를 통해 제자를 양성하고, 60대에 구조치료센터장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인생그래프와 비슷하게 지나온 듯 보이는데,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잘 흘러가지 않더라도, 그래서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하더라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려고 해요. 부딪히고 넘어지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결국에는 완주하지 않겠어요?”

어느 덧 10년 차 베테랑 사육사가 된 선주동 씨. 그는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사육사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오늘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선주동 사육사는 동물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다. 돌고래 쇼를 함께 하던 바다사자 ‘꼬마’에게 고등어를 주며 행동 훈련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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