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다 여기지 마세요 우린 사람의 영원한 친구예요!”

중국 송나라 때 선사인 무문혜개 스님의 책 〈무문관〉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지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없습니다(無).”

보통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들으면 ‘어? 모든 생명체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없다고 하니, 그럼 뭐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라고 궁금해 합니다. 사실 조주 스님의 ‘없다(無)’라는 대답은 ‘있다(有)’의 상대적인 차원에서 ‘없다(無)’를 말하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 개의 입장에서는 이 공안을 들을 때마다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하필 개에게서 불성을 찾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돼지도 있고, 소도 있고, 염소와 양도 있고, 고양이도 있는데 말이지요. 숭고한 불성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존재는 천박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흔한 동물이어서 그저 무작위로 꼽을 때 제일 먼저 예로 들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만큼 우리 개가 인간에게 친숙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우리 개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아마 당신은 틀림없이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럴 때면 분명 ‘개한테 불성이 있건 말건 뭐가 중요해? 이렇게 정을 주는데…….’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미국 저널리스트 스티븐 코틀러는 자신의 책 〈인간은 개를 모른다〉에서 ‘쓰리 독 나잇(Three dog night)’이란 말을 소개하는데, 개 세 마리의 체온이 있어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추운 밤을 비유한 내용입니다. 우리 개들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 곁에서 온기를 나눠줘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책에는 1997년 미국 UCLA 생물학자 카를레스 빌라의 말도 실려 있지요. 인간과 개의 동거생활이 부각된 시기를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0만여 년 전으로 추정했다는 주장인데 대단하지요? 이렇게 오래됐다는 건 이미 인간의 진화과정에 우리 개란 존재를 떼려야 뗄 수 없고, 개의 진화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우리 개들은 이렇게 언제나 인간과 함께 지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개라 할지라도 늘 곁에서 3년을 듣다보면 흉내는 내게 된다는 뜻인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에 나옵니다.

옛날 어느 절에 밤낮으로 경을 외우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 한 마리가 스님의 평상 밑에 지내면서 경을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찌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지 밥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내다 죽었는데 다음 생에 코살라국 수도 슈라바스티에서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이 여자는 스님이 걸식하러오면 기쁜 마음으로 밥을 가지고 달려가서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스님을 따라가서 출가를 했고, 비구니가 된 이후 열심히 수도한 끝에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새삼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네요. ‘스님을 따라가서’라는 말입니다. ‘개가 언제나 주인을 따라가듯이.’ 이렇게 연상된다고 고백하면 그 스님을 비하했다고 꾸짖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그만큼 친밀하다는 뜻입니다. 외출한 주인이 돌아오면 우리는 마치 수십 년 학수고대한 님을 만나는 것 마냥 기쁨이 온몸에 넘쳐나고 뛰쳐나가 주인에게 안깁니다.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주인 곁에 머물고 주인을 향해 꼬리를 칩니다. 이런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곱지 않게 비춰졌나봅니다. 그래서 누군가 권력자의 입 안의 혀처럼 비굴하게 굴면 늘 개에 빗대며 조롱했지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개를 줏대도 없이 먹이 주는 주인 비위만 맞추는 동물이라고 여겼나본데,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개를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복종해야 하는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곁에서 늘 함께 지내며 체온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는 친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친구를 지켜주려고 제 몸을 던지고, 소식 끊긴 친구를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태국 한 사찰의 야외 불상 옆에 개 한 마리가 한가로이 앉아 있다.

비구니 스님의 전생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의지를 동물 여섯 마리에 비유하고 있는 〈상윳따 니까야〉(‘여섯 동물 비유 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제각각 욕망에 이끌린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은 마치 기둥에 묶인 여섯 동물이 저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고 날뛰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 여섯 마리 동물 가운데 개가 등장합니다. 개는 어디로 가고 싶어 할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마을로 가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물은 숲으로, 산으로, 무덤으로 가려는데 굳이 개는 마을로 가려고 한다는 경의 내용을 보노라면, 우리 개가 얼마나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동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의 고향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개에게 있어 사람은 친구이고, 사람에게 개 역시 아주 오랜 시간 친구였습니다. 그 오랜 친구를 따라가는 심정으로 탁발승을 따라 출가했을 여성, 바로 위 이야기의 주인공인 비구니 스님의 전생을 개로 설명한 것이 썩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쟈타카〉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전생에 개로 태어난 적이 있다고 나옵니다. 어느 왕궁에서 가죽으로 만든 마구(馬具)들이 비가 오던 날 밤 모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딱딱한 가죽제품들이 밤새 비를 머금어 말랑해지니 분명 동네 개들이 하수구를 타고 들어와서 먹어치운 게 분명하다고 추리한 신하들은 개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간언했습니다. 그리하여 개들의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 잘 훈련받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 지내는 일종의 ‘애완견’들은 단 한 마리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늘 굶주려 지내는 떠돌이 개들에게만 화가 미쳤지요. 간신히 살아남은 개들은 우두머리 개가 살고 있는 공동묘지로 달려가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우두머리 개는 진짜 범인이 가엾은 떠돌이 개가 아니라 왕궁의 애완견임을 알고 왕궁으로 달려갔지요. 그리고 왕에게 물었습니다.

“저 떠돌이 개들이 폐하의 마구를 먹어치우는 걸 보셨습니까?”

왕은 보지 못했다고 고백하였지요.

“모든 개를 죽이라고 했는데 왕궁의 개들은 그냥 살려두셨군요. 왕의 명령은 저울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폐하는 결국 ‘약한 자를 죽이라.’고 명을 내린 셈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버터기름 조금과 닷바풀을 섞어서 왕궁에서 잘 지내고 있는 개들에게 먹여보십시오. 그러면 가죽 마구를 먹어치운 범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버터기름과 풀이 섞인 것을 먹은 왕궁의 개들은 즉시 토하기 시작했고, 그 토사물에서 마구의 흔적을 발견한 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왕실에서 쓰는 하얀 일산(日傘)까지 주면서 사과했지만, 우두머리 개는 “정의를 실천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주십시오.”하고 당부하면서 선물을 거절하고 떠납니다.

왕은 그날 이후 모든 개들에게 자신이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을 제공하면서 우두머리 개가 당부한 내용을 충실히 실천하며 지냈다는 뒷이야기입니다. 정작 잘못을 저질러도 진위를 밝혀내려 하지 않고 무조건 약한 자에게 죄인의 멍에를 씌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개의 눈으로 지적하고 있지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생각에 씁쓸해집니다. 우두머리 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라고 하지요.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당삼목구(唐三目狗)’. 30×45cm. 경전에는 눈이 세 개 달린 삼목구가 지옥문을 관장하는 삼목대왕의 환생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삼목구는 액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상징이다.

경전에서 개는 현자의 모습, 구도자의 전생으로만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탐욕과 어리석음에 절어 있는 인간을 개에 빗대는 구절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인 〈맛지마 니까야〉의 ‘뽀딸리야경’에서는 “굶주린 개에게 살점도 힘줄도 하나 없는 뼈다귀를 던져주면 개는 미친 듯이 뼈를 씹고 핥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개의 허기는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하여, 탐욕에 이성을 잃고 계속 욕망에 자신을 내던지는 중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경록〉에서는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좇아간다고 말하지요.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하는데 가리키는 손가락을 좇아가는 행동, 즉 진리 그 자체를 보려하지 않고 문자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은 행동을 한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우리 개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우리 오랜 친구인 사람이 그런 비유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지혜를 품고 마음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대웅전에서 목탁 소리가 들립니다.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스님 홀로 외로이 예불을 모시니까요. 친구가 되어드려야지요. 그리고 나도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을 되뇌며 성불의 인연을 맺어야 하니까요.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 북 칼럼니스트이다. 현재 BBS불교방송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많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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