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신앙 흡수·융합한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캄보디아를 떠올릴 때는 현대사의 비극으로 불리는 킬링필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폴 포트 정권은 1975년부터 4년간 약 200만 명의 국민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캄보디아는 수많은 지식인과 기술자를 잃어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퇴보해 인접국보다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하다.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시아를 지배했고, 그 강맹했던 선조들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앙코르 유적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95%가 불교 신자인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을 찾아간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지은 앙코르와트는 원래 힌두사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불교사원에서 힌두사원으로, 다시 불교사원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사료마다 기록이 다르지만,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내용은 동일하다. 팔리어로 쓰여진 〈마하방사〉(Mahāvamsa·大王通史)에는 ‘기원전 309년에 전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기원전 250년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 황제가 소나(Sona) 스님과 웃따라(Uttara) 스님을 해외로 파견했는데, 그곳이 미얀마가 아니라 캄보디아라는 설이다. 두 스님이 도착한 곳은 ‘수완나부미(Suvannabhumi)’, 즉 ‘황금의 나라’로 기록돼 있다.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도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불교 전성기 앙코르왕조

캄보디아 불교 전래설은 캄보디아 최초의 국가인 부남국(扶南國, A.C 86~550)의 건국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전래설은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곳을 지배하던 여인과 혼인해 불교국가인 부남국을 세웠고, 이후 불교가 왕실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에게까지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일찍이 국민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하다보니 기나긴 역사 속에서 불교 사원도 많이 건축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한 불교문화유산을 남긴 시기는 통일왕조를 이룬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이다.

앙코르와트 본당에 모셔져 있던 비쉬누상, 태국 신도들에 의해 중앙 성소에서 회랑으로 옮겨졌다.

부남국이 내분으로 쇠퇴할 때 첸라(Chenla·眞臘, 550~802)왕국은 부남국을 병합한다. 이후 250년 만에 다시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Ⅱ, 재위 802~834)가 통합해 지금의 쿨렌산(Kulen M)에 있는 마헨드라파르바타(Mahandraparvata)에서 새 왕조를 여는데, 바로 크메르 제국 앙코르왕조(802~1431)다. 건국 후 지금의 톤레삽 호수 인근으로 이전하지만, 889년에 즉위한 야소바르만 1세(Yaśovarman I, 재위 889~900)가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도시 야소다라뿌라(Yasodharapura)를 건설하면서 많은 사원을 세우는데, 이곳이 바로 앙코르 지역이다.

여러 왕들 중에서 1113년에 즉위한 수리야바르만 2세(Sūryavarman Ⅱ)는 최고 걸작으로 뽑히는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남겼고, 1181년에 즉위해 1218년까지 통치한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Ⅶ)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교사원을 건설했다고 말할 정도로 수많은 불교건축물을 남겼다.

앙코르 유적지에 가보면 검은 돌로 건축된 사원이 많은데, 힌두사원인지 불교사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자료들은 불교사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원 안에는 힌두적인 요소가 더 많다.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Linga)와 요니(Yoni)가 있고, 주변의 모든 조각장엄에도 역시 힌두조각이 있다. 이렇게 한 사원에 불교와 힌두교가 혼재된 이유는 당시 불교의 성격이 지금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캄보디아 불교는 밀교적 요소가 강한 산스크리트계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섞인 ‘힌두불교’였다. 또한 힌두교에서도 부처를 ‘비쉬누(Vishnu)’의 화신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사원은 힌두요소와 불교요소가 뒤섞이게 되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도 불교도와 힌두교도로 확실하게 구분된 것이 아니라 내세와 현세를 위한 두 개의 종교를 동시에 신봉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백성뿐만 아니라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왕이 즉위할 때면 사원을 건축했는데, 그의 통치이념과 종교에 따라 사원의 성격이 달라졌다.

자야바르만 7세의 사원 건축

많은 왕들은 힌두 신을 신봉했다. 그들은 힌두사원만 건축한 것이 아니라 불교사원도 많이 건축했다. 반대로 불교를 신봉하는 왕들도 불교사원뿐만 아니라 힌두사원을 건축했다. 당시 사원의 형태는 거의 같았지만, 중앙신전에 어떤 신의 상징물을 안치하고 장엄하는지에 따라 사원의 성격이 정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즉위하는 왕들이 새로 사원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앙사원에 자신이 신봉하는 신을 모시면서 어떤 때는 힌두사원이 불교사원으로 되기도 했고, 왕이 바뀌면 그 반대가 되기도 했다. 이럴 때 주위의 종교적 성격이 강해 보이는 조각은 긁어내고 다시 조성하는 일도 빈번했는데, 그렇다보니 더욱 구분이 힘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가 백성들을 위해 세운 병원 겸 사원인 따 프롬 겔.

앙코르 지역에서 불교사원을 가장 많이 지어 봉헌한 왕은 자야바르만 7세다. 현재 앙코르 지역에 남아있는 불교사원 대부분이 그가 건설한 사원이다. 그가 즉위하기 이전에 건설된 불교사원은 따 네이(Ta Nei) 사원과 밧 춤(Bat Chum) 사원 등 몇몇에 불과하다.

자야바르만 7세는 즉위 후 제국의 수도이자 권력의 중심지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중심에 바이욘 사원을 세웠다. 또 어머니를 위해 사원 따 프롬(Ta Prohm)을, 아버지를 위해 프레아 칸(Preah Khan)을, 백성들을 위해 사원 닉 포안(Neak Pean)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는 대승불교 신봉자였고, 스스로를 ‘크메르왕국의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는 보살(Bodhisattva)’이라 생각하고 전국에 불교사원을 건축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건설한 프레아 칸. 중앙성소에는 탑이 안치돼 있다.

이런 자야바르만 7세의 종교관은 많은 석문에 남아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나의 가장 큰 고통은 백성들이 아파하는 것이다.”라며 백성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 겸 사원인 따 프롬 겔(Ta Prohm Kel)을 전국에 세웠다. 아울러 ‘생존의 바다에 빠져있는 모든 존재들을 선행으로 구해내고자 한다.’는 뜻을 담아 모든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보기 위해 바이욘(Bayon) 사원을 건설했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앙사원이자 앙코르 왕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기에 그 상징성이 더욱 크다.

바이욘 사원은 기존의 사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사원의 중앙신전 주변에 54개의 탑을 세웠고, 그 탑에는 미소를 머금은 200구의 보살상을 조성했다. 보살상은 사면불의 형태인데, 이는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이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항상 백성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상징적 의미는 1층 회랑의 벽화와도 연결된다. 이 벽화의 길이는 1.2㎞가 넘고, 1만 1,000점이 넘는 백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 참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승리한 장면과 백성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사면관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핀다는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이념이 잘 드러나 있다. 바이욘의 사면관음은 앙코르 톰 네 개의 출입구를 비롯해 그가 건설한 모든 사원의 출입구에 조각돼 있다.

프레아 칸 상인방에는 좌불상이 조성돼 있었는데, 자야바르만 7세 사후 힌두교도들이 파냈다.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자야바르만 7세가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 지역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통일된 국토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를 건설했고, 중요 지점에 백성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로 주변에 수많은 불교사원을 건설했다. 도로의 남쪽 끝 70㎞ 지점에는 꼼퐁 스바이 프레아 칸(Kompong Svay Preah Khan)을, 북쪽 100km 지점에는 반테이 츠마르(Banteay Chhmar) 사원을 건립해 장장 170km에 이르는 불교순례길을 조성했다.

남북 횡단도로의 시작과 끝에 있는 두 사원은 정사각형으로 조성됐다. 외벽의 길이는 5㎞에 이르고 해자까지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변방에 있는 사원까지도 많은 공력을 기울여 건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건축한 따 프롬.

화려하고 섬세한 앙코르 건축

자야바르만 7세가 조성한 사원들은 표면적으로 인도의 사원건축 방식을 따랐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의 토속신앙을 흡수·융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캄보디아 불교만의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 앙코르 건축, 앙코르 유적을 상징하는 부분이 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조각이다. 사원의 조각들은 건축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성방식과 그 활용은 인도보다 오히려 세련되면서도 실용적으로 나타났다. 벽면에 압사라(Apsara)의 조각을 연속적으로 등장시켜 율동성을 나타나게 했고, 토속신앙의 하나인 나가(Naga)를 사원 안으로 흡수해 세련되면서도 종교적 신성함을 넘어 석조건축에 실용성을 더한 난간 역할까지 하도록 했다.

앙코르 왕조의 중심이자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이념이 담긴 바이욘 사원.

초반에는 벽돌로 건축하고 외부에 스투코(Stucco)를 칠해 조각했는데, 중반을 넘어가면서 사암을 마야아치(Corbelled Arch)로 건축하고 외부를 직접 조각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때부터 앙코르 조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가장 발달한 곳이 출입문의 ‘린텔(Lintel)’ 부분이다. 원래 린텔은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인방(上引枋)인데, 돌로 건축하다보니 무게를 버틸 수 있게 넓은 면적의 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넓은 면에 중요한 신화의 한 장면을 조각했는데,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앙코르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당시 조성된 사원을 살펴보면 앙코르 지역의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 구분돼 사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앙코르는 농업국가여서 왕들은 물 관리로 왕권을 유지하고 권위를 보여주었다. 이런 방식은 중요한 통치방식이었으며, 백성 입장에서는 왕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대였다. 물을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힌두교도 왕과 불교도 왕은 차이가 있었다.

탑에 조성된 사면석불.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이라는 설도 있다.

초기 힌두교를 신봉하는 왕들은 힌두신전을 건립할 때, 사각의 피라미드 기단을 세워 높이고 그 위에 메루산을 상징하는 신전을 조성해 신성성과 왕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별도의 대형 저수지를 조성해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불교를 신봉하는 왕들은 신전을 건립하면서 피라미드 기단 대신 평지에 사원을 조성했다. 대신 사원을 둘러싸는 해자와 사원의 입구 정면에 별도의 커다란 저수지를 만들어 단순한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신전의 신성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런 방식은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신성한 사원을 통과한 물로 농사를 짓는 영광을 얻게 했고, 종교적으로는 사원의 모습이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형상으로 보이게 해 종교적 신성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별도의 저수지를 조성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더위에 지친 백성에게 휴식공간도 제공하는 등 다양한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성된 앙코르의 유적은 힌두와 불교, 외래문화와 전통문화가 융합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앙코르 조각에서 화려함과 권위를 동시에 나타내주는 프론톤과 린텔.

크메르 제국은 자야바르만 7세 이후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잦은 침입으로 힘이 약화되면서 1434년 수도를 남부지역 차투 무카(Catur Mukha, 프놈펜)로 옮겨가게 됐다. 이로 인해 앙코르왕조 630여 년 중 절반의 역사가 축적된 앙코르 유적은 태국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태국 불교신도들은 이곳에서 신행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대승불교가 아니라 지금의 상좌부불교(Theravāda)를 신봉했다. 태국 상좌부불교도들이 앙코르 지역에 들어왔을 때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상좌부불교가 퍼져 있었다. 그렇다보니 밀교적 대승불교와 힌두신앙은 차츰 소멸돼 갔고, 앙코르 유적도 상좌부불교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밀림 속에 방치되고 일부 사원만 상좌부불교 사원으로 유지되다가 18세기에 서구 탐험가들에 의해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화려했던 앙코르의 수많은 사원들은 이후 점점 관광지로 변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바이욘 사원 회랑의 조각.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으로, 서커스단이 묘기를 부리고 있는 장면이다.

김성철
사진작가. 대학에서 사진을, 대학원에서 문화재를 전공했다. 문화재전문작가이자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화재 관련 책에 사진을 찍었다. 현재 문화재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49’와 해외유적도시 전문출판사인 ‘두르가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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