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전병준>

이른 봄의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중촌 건너편의 보리밭에서 혼자 김을 매고 북을 주고(흙 돋움) 있었다. 겨울을 견디며 자란 보리밭이었다. 바람이 건듯 불면 먼지가 보얗게 날았다.

‘아제’라고 부르던 머슴이 제 집으로 돌아간 다음 다른 머슴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집의 아기들도 다 자랐으므로 순이도 제 집으로 돌아갔다.

중촌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 수확에서 장원을 했다고 소문난 집 노모의 회갑잔치였다. 중촌마을 사람들은 술에 취하여 북장구를 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그 잔치에 가지 않았다.

중촌마을 회갑잔치

그 무렵 우리 집은 잔밥에 싸여 있었다. ‘잔밥’이란 말은 그만그만한 자잘한 아이들이 우글거리는 집안 풍경을 표현한 말이다. 산아제한이 없었고, 피임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다산을 하던 주부가 아이를 거듭 낳아 기를 때 집안에는 ‘잔밥’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세 살 터울로 낳아 하나도 실패하지 않고 키웠다. 밭일 논일 바닷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집안 살림살이를 해야 하므로 아이들 먹이는 일, 씻기는 일, 입히는 일, 집안 쓸고 닦는 일들이 늘 부실했고 지저분했다. 미처 설거지를 하지 않은 설거지통에는 식구들이 식후에 아무렇게나 담가놓은 밥그릇과 국그릇들이 수북해 파리가 와글거렸다. 집안에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싸우고 터뜨린 울음소리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어머니 옆으로 가서 앉아 있곤 했다. 어머니가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해가 지면 어머니와 같이 들어가려고 딴전을 피우며 버티었다. 어머니 옆에 앉아만 있어도 나는 포근해지고 좋았던 것이다.

중촌마을의 회갑잔치 마당에서 노래 소리가 밭에 까지 들려왔다.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내 청춘 다 늙어간다.”

그 노래를 들은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오기(惡氣) 들어 있는 듯싶은 구슬픈 목소리로 그 노래 한 대목을 흥얼거렸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가사를 비틀어 바꾼 것이었다.

“세월아 네월아 어서 어서 가거라.”

잠시 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을 때 어머니는 또 가사를 비틀어 바꾸어 흥얼거렸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발병도 안 나고 잘만 가더라.”

나는 기존의 가사와는 전혀 다르게 가사를 비틀어 바꾸어 부르는 어머니의 오기 들어 있는 듯싶은 흥얼거림에 깜짝 놀랐다. 나중에 내가 성장하여 다시 떠올려보니, 그건 ‘한(恨)’의 한 표현일 듯싶었다.

대개의 학자나 시인들이 우리 문학(소월의 시가 그 대표적)속에 들어 있는 한을 정한(情恨)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그것을 ‘우리민족의 흥’ 혹은 ‘생명력 속에 들어 있는 저항’ 혹은 ‘운명 극복의 의지’라고 푼다.

어머니의 가사 비틀어 부르기, 그것은 정서와 정조(情調)와 해학의 문제였고, 철학적인 문제였고, 의식구조의 문제였다. 어머니는 쑥뿌리처럼 생명력이 강했고, 늘 진보적이었다.

어머니는 여느 때 마을 사람들이 어떤 잔치에서 취한 채 이성을 잃거나 흥청거릴 때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어떤 과부가 서방질을 했다거나 도둑질을 했다고 흉보고 따돌려도 더불어 휩쓸려 비쭉거리며 입방아질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하고 가엾어 하며, 오히려 따돌림 당하는 사람 편에 서서 변호하고, 애옥해 하며 그에게 다가가곤 했다. 그를 집으로 불러 따뜻한 밥을 먹이며 다독여주곤 했다.

어머니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알아야[易地思之] 한다고 가르쳤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무슨 일로인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매를 맞았는데, 회초리를 맞은 내 종아리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나를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종아리를 들여다보고, 끌끌 혀를 차고, 멍든 자리를 만져주며 “뭔 에미란 년이 이렇게 독하게 회초리를 쳤다냐!”하고 짠해 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매 때리고 나서 때린 자리를 만져주면 새끼가 간을 봐서 안 된다고 했는디…….”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나에게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매 안 맞도록 미리 순하게 말 잘 들어야 한다잉.”

그때 나는 새삼스럽게 울었다. 어머니는 우는 나를 향해 타이르듯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악아, 어떤 사람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는 줄 아냐? 사실은 세상 사람들은 다 조금씩 모자라단다. 그런데, 자기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모자란 사람인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은 평생토록 나의 삶의 방향을 교정해주는 방향타 노릇을 한다. 나는 지금도 중대한 어떤 사고(思考)나 행동의 고비에서 “나 지금 모자란 생각, 모자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는가?”하고 성난 얼굴로 스스로를 들여다보곤 한다.

명창 임방울의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 기슭에서 한 청년의 카랑카랑하면서도 청승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디로 행하는가?”

밭에서 김을 매던 사람들은 모두 소리가 흘러내려오는 뒷산 기슭을 쳐다보았다. 자잘한 소나무 숲 사이로 진달래꽃 한 묶음이 산 위쪽으로 움직거리고 있었다. 미쳤다고 소문난 마을 청년이 들고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 슬픔으로 실성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아내의 무덤을 여러 가지 꽃나무로 장식하고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이날도 그는 꽃나무 하나를 캐가지고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꽃나무가 자잘한 소나무 숲 사이로 올라가는 그를 보고 혀를 끌끌 차고 나서 말했다.

“아이고, 사랑이 뭣인디 저렇게 정신까지 놔 버렸다냐.”

뒷산 청년의 소리는 앞산 골짜기에 메아리를 일으키고 있었고, 그것은 내 가슴에 아릿한 아픔 같은 금을 긋고 있었다. 전율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나는 그 한 맺힌 청승스러운 소리 ‘앞산도 첩첩하고’가 명창 임방울이 부른 ‘추억’이라는 것이고, 축음기를 통해 전국에 퍼졌었다는 것을 알았다.

임방울의 소리는 한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른이 되어 나는 임방울 판소리에 홀려 미친 듯이 듣곤 했고, 그의 소리 인생을 소설로 썼다. 〈사랑아 피를 토하라〉가 그것이다.

모든 음악은 음식과 같아서 어린 시절부터 그 감성적인 향기와 맛이 길들여진다.

산중에서 나고 자란 한 영화감독은 자기는 생선회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민물장어국이나 붕어찜·매기찜만 먹다가 어른이 된 다음 생선회를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충청북도 제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한 소설가는 여름철에 참치횟집에서 회를 먹다가 생뚱스런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이런 참치회의 진짜 맛을 몰라요. …… 따뜻한 밥보다는 식은 밥을 좋아해요. 여름철에 밥을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꺼내서 상추에 된장하고 풋고추 토막 하나 넣고 싸서 먹으면 진짜로 맛있는데.”

나는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겨자 풀어 넣은 간장에 찍어 먹지 않고, 반드시 된장이나 고추장에다가 찍어 먹는다. 어린 시절에 된장이나 고추장에 묻혀 먹던 입맛의 타성 때문이다.

임방울의 판소리가 미치도록 좋은 것은,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죽은 아내 때문에 미쳐버린 청년의 ‘앞산도 첩첩하고’로 인해 길들여진 소리의 향과 맛 때문이었을 터이다.

<삽화=전병준>

등굣길 도깨비장난 같은 비라

아침에 학교를 가다보면 골목길 담벼락에 비라(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봄으로 기억한다. 등사기로 등사한 비라였다. 글자 주변에 검은 얼룩들이 묻어 있었다. ‘이승만 괴뢰도당 물러가라’, ‘민주주의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만세.’

아침이면 천도교당 옆 우물 주변에 삼십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열을 지어 행진하듯이 등교를 하곤 했는데, 그 우물가에서는 아침마다 놀이 아닌 놀이가 무섭게 벌어지곤 했다. 4학년 이상의 학생 중에, 맨 뒤에 나타남으로써 다른 아이들을 기다리게 한 아이에게 무자비한 몰매를 가하는 일이었다. 힘이 센 한 아이가 가장 늦게 온 아이 머리에 책보자기를 덮어씌우면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책보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몰매를 때리면서 “야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보자기 속에 든 아이는 두들겨 맞고 코피를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2학년인 나는 늘 꾸물거리다가 늦게 가곤 했다. 나보다 두 학년이 위인 누님은 진즉 뒷등 길을 이용해 학교에 가고 없었다. 한 학년이 위인 형은 꾸물거리는 나를 기다리느라고 뒤늦게 가곤 했다. 꾸물거리는 이유는 책보자기 챙기기와 뒷간에서의 ‘응가’ 때문이었다. 형은 책보자기를 등허리에 짊어진 채 뒷간 앞에 서서 “이 느림보 거북아, 얼른 나오너라, 오늘도 지각하겄다.”하고 재촉해댔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나는 나의 볼 일을 다 보고 나서야 책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형은 느린 나를 앞장세우고 뛰어가라고 재촉하며, 나의 등을 세차게 떠 밀쳤다. 그 떠 밀침으로 인해 넘어질 뻔하곤 했다. 우리 형제는 늘 달음박질을 쳐 골목길을 내려가곤 했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가 천도교당 옆의 우물에 이르렀을 때는 열을 지어 등교하는 학생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느림보야, 지각이다! 싸게 달려라.”

형은 나의 뒤에서 씨알거리며 내 등을 걷어 밀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나의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수업이 시작된 뒤였다. 나는 말없이 나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 자리는 교실의 남쪽 맨 가장자리 줄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하얗게 번쩍거리는 햇볕이 책상 위를 점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바야흐로 구구법을 이용한 곱셈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게 창밖에 있었다. 텅 빈 운동장 바깥 구석에 회전그네가 혼자 멈추어 있었고, 그 너머로 펼쳐진 짙푸른 바다에는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자잘한 해의 조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탁 트인 바다 수면에 수천수만의 물고기들이 떠올라 퍼덕거리고 있는 듯싶었다. 그 번쩍거리는 것들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 찬란한 바다와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해 있었다. 바다 멀리에는 군함 같은 섬들이 떠 일렁이고 있고, 포구에서 출발한 배는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그 배를 하얀 갈매기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보다는 바다에서 말 없는 말을 듣고 있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바다로 가고 싶었다. 흰 모래밭에서 놀고 싶었다. 작은 집 아기업개였던 순이 누나가 그리웠다. 순이와 함께 파도와 놀고 싶고, 모래밭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싶었다. ‘새야, 새야 물 길어라. 꿩아, 꿩아 집 지어라.’ 하고 노래하며 두꺼비집을 짓고, 은색 달랑게를 잡아 소 놀이를 하고 싶었다.

나는 반짝거리는 바다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날도 나의 학교생활은 바다로 인해 황홀했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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