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마주하는 참회
자신과 화해하는 행위
작은 허물도 참회하자

어느 스님의 신도 중 이웃해 사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젊었을 때 자신의 과오로 남편과 헤어진 일을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큰 죄인으로 여겼고, 한 사람은 살아오면서 큰 죄를 지은 일이 없다며 사뭇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루는 스님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마당으로 나가서 이쪽 분은 큰 돌 하나를, 저쪽 분은 작은 돌 열 개를 가져오세요.” 돌을 가져오자 다시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돌을 원래 자리에 갖다놓고 오세요.”

큰 돌을 들고 왔던 이는 제자리에 쉽게 갖다놓았지만, 작은 돌 열 개를 주워왔던 이는 원래의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우리의 죄업도 이와 마찬가지다. 크고 무거운 돌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분명히 기억했듯이, 큰 허물은 쉽게 드러나 마음의 짐이 크고 참회도 따르기 쉽다. 그러나 작은 돌들의 원래 있던 자리를 알지 못했듯이, 소소하게 지어온 허물은 쉽게 잊고 마음의 짐도 참회도 없이 살아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회와 성찰이 없는 이의 기도는 모래 위에 짓는 집처럼 헛되고, 참회 없는 삶의 과보 또한 가볍지 않다. 이에 불교에서는 참된 기도란 ‘지극한 참회’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지심참회(至心懺悔)는 과거와 다생에 지은 죄업을 무조건 참회하는 것이며, 자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참회하는 마음이 가장 순수하기 때문이고, 참회는 자신과 마주하여 화해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기도에서 참회는 부처님과 만나기 위한 자기 정화(淨化)다. 천도재에서 관욕(灌浴)으로 영가의 업을 씻어준 뒤 부처님께 나아가게 하듯이, 스스로 올리는 기도에서 죄업을 참회하지 않고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를 바라기는 어렵다.

원효 스님은 일찍이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조화를 이룬 참회법을 일러주었다.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절과 염불로써 지은 죄를 참회하는 사참으로 시작하여, 죄업의 실상을 직시하는 이참으로 참회를 마치게했다. 죄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육정(六情)이 번뇌를 일으킨 데 불과하니, 이를 꿰뚫어 죄를 짓는 근본에 의지하여 참된 참회로 일어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회는 곧 ‘꿈을 깨는 노력’이라 보았다. 마음이 지어낸 육정이 꿈과 같은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자신의 것이라 고집하며, 그것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리가 아닌가. 해결의 실마리는 그 모든 것이 본래 나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부처님 앞에서 내가 지은 허물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그 죄의 실상이 본래 무상함을 관하니 그야말로 ‘참회삼매(懺悔三昧)’라 하겠다.

그러니 소소하게 지은 허물이라 한들 어찌 지심참회하지 않겠는가. 지극한 참회는 큰 돌도 작은 돌도 모두 제자리에 갖다놓는 일이다. “방일하여 뉘우침과 부끄러움도 없이 죄업의 실상을 능히 사유하지도 않는다면, 비록 죄업에 성품이 없다고 하여도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호랑이가 도리어 환술사를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 남긴 원효 스님의 말씀을 두고두고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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