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282호)

불기 2564년 경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매년 새해 벽두가 되면 사람들은 “소원 성취하세요.”라는 덕담을 서로 간에 건넵니다. 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묵은해의 시련을 뒤로 하고 새로운 꿈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모두의 계획이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성공이라는 꿈을 위한 도전은 아름답습니다. 온몸을 불사를 정도의 치열한 도전, 백척간두에 서서 한발을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와 노력은 분명히 성패를 떠나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할 때 한 가지를 더해야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흔히 기도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신의 가피를 입어서 개인적 소원을 성취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기도는 이런 기도와는 구별됩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와 다른 우주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로 알면 올 한해 소원을 성취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설법하기를 결심하고 “그대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낡은 믿음을 버려라.”(〈증일아함경〉 10권 ‘권청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강조한 ‘낡은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당시 인도 사회는 대개의 종교가 그렇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설명할 때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숙명론(宿命論)’, 전능한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의론(神意論)’, 모든 것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우연론(偶然論)’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기존의 관념과 인식을 배격하는 것으로 불교의 출발을 삼았습니다. 불자라면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불교의 기도법에 접근해야 합니다. 불교의 기도는 그 방법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웃종교와 많이 다릅니다. 숙명론·신의론·우연론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반면, 단순히 불보살의 명호를 반복해서 부르는 단조로운 기도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의론’에 의존하는 이웃종교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소원한 바를 이루려면 먼저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씨앗’을 뿌리라고 강조합니다. 근거를 마련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씨앗’과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걸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먼저 마음을 내야 몸이 움직이고 행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소원을 빌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번잡해지곤 합니다. 몸은 절에 와 있지만 마음은 세속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게 됩니다. 

하지만 한마음으로 불보살님의 명호를 꾸준히 반복해 부르다보면 심상(心想)이 무잡(無雜)해져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안심(安心)이라고 말합니다. 안심을 성취할 때 비로소 기도의 최고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기도보다 정진이란 말을 더 많이 쓰는 이유입니다. 또 기도에 앞서 중요한 것은 신심(信心)입니다. 깊은 믿음 없이 기도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신심이란 종교적 신념을 말합니다. 불교에서의 신심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힘에 의해 증장되는 것입니다. 

경자년 새해를 맞아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신심을 내야 합니다. 그 신심이 작복(作福)이 되고 정진이 되어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어야 좋은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목표를 향한 쉼 없는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신심은 뿌리를 심는 것과 같고, 쉼 없는 나아감은 그 위에 더해지는 물과 양분입니다. 경자년 새해, 모든 사람들이 소원성취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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