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전 신비 간직한 지상 최대의 불교사원

유네스코는 교육·과학·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해 국가 간 협력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전문기구다. 이 기구는 1972년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에 근거해 인류를 위해 발굴 및 보호·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연이나 문화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등재된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은 869곳. 이 중 불교문화유산 중 일부를 선별해 소개한다. 

보로부두르의 전경.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유일하게 북서쪽 밖에 없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다. 자바(Java)섬은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 중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고 그 중심은 족자카르타이다. 자바섬은 내륙으로 갈수록 산이 높은 산악지대로 원시 밀림을 형성하고 있는데, 곳곳이 활화산이다. 이로 인해 지진과 화산재 분출이 잦아 심각한 재산·인명피해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자바섬에 1,200년 된 세계 최대 불교유적지 보로부두르 불교사원군(Borobudur Borobudur Temple Compounds)이 있다.

사일렌드라 왕국과 축조의 비밀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보로부두르는 힌두교 왕조인 산자야(Sanjaya) 왕조(732∼929) 마타람 왕국의 수도였던 족자카르타에서 불과 42km 떨어진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축조 시기는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790년경 착공해 850년경 완공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사원군을 세운 사일렌드라 왕국 여섯 왕의 재위기간이 모두 104년(752~856)에 불과하고, 가까운 곳에 힌두교 왕조가 흥성해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존재 자체로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거대한 사원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조성했는지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있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지만, 관련 사료가 거의 없고, 밝혀진 것이라곤 대승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만다라를 사원건축에 적용했으며, 사일렌드라 왕국이 조성했다는 정도다. 사일렌드라 왕국은 원래 마타람 왕국의 속국이었다가 해상 불교왕국인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대하던 중에 보로부두르를 완공할 수 있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윗부분이 사라진 탑 속의 석불.

이런 추정은 당시의 인근 세력 구도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일렌드라 왕국 주변국가 중에서 대승불교를 숭상하던 왕국은 모두 인접한 섬이나 동남아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가장 큰 세력은 지금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남부지역에 존재했던 대승불교국가 푸남(Funam, 扶南)과 수마트라 바탐방을 수도로 한 스리비자야였다. 이들은 모두 중계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해상국이기에 인도 불교문화를 일찍이 받아들였다. 

스리비자야와의 세력 다툼에서 힘을 잃은 푸남 왕국의 일부가 사일렌드라 왕국을 세웠으리란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푸남’이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사일렌드라’라는 국명은 ‘산의 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보로부두르의 명칭에서 ‘보로’는 산스크리트어의 승원을 뜻하는 ‘비하라’에서 유래했고, ‘부두르’는 팔리어로 위쪽을 상징하여 ‘높은 곳에 있는 승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사일렌드라 왕국 관련 비문이 해안에서 발견되면서 이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해상으로 눈을 돌려 베트남·중국과 교류했고, 이런 경제적 기반 아래 거대한 사원을 조성했으리란 추정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주관 기초로 만다라 상징화

앞서 언급했듯이 보로부두르가 대승불교의 우주관을 기초로 만다라를 상징화해 설계되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사원인지 스투파인지 아니면 영묘인지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인도불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조성됐지만 보로부두르는 인도나 스리랑카와 같은 초기불교유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특이한 점은 사각의 피라미드 형태와 그 위에 조성된 세 개의 원형단과 작은 탑, 그리고 가운데 중앙탑이 존재하는 건축형태이다. 미술사적으로 이런 형태의 사원은 캄보디아 앙코르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보로부두르는 이보다 200년이 앞선 시기에 조성됐다.

밀림 속 보로부두르에서는 일출시 항상 안개가 짙게 드리운다.

인도네시아 학자들에 의하면 피라미드 형태가 자바 산악지방에 존재하는 신전의 형태이기에 보로부두르는 자바 토속신전의 형태(사각피라미드)와 인도불교문화(원형의 스투파)의 형태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일렌드라 왕국의 산악사상과 자바 전통의 산악사상이 자연스럽게 습합해 새로운 형태로 탄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보로부두르는 산 정상에 건축돼 가까이 다가가면 그 크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워낙 거대해서 멀리서 보면 그냥 검정색의 산봉우리로 보이지만 다가갈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섬세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보다 가까이 접근해 처음 마주한 곳이 기단부다. 원래 기단부는 한 개 층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나 퇴적한 토사의 무게에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개 층을 덧대어 2개 층의 기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단부 한 변의 길이가 123m이고, 탑 전체 높이가 41.26m에 달하다보니, 인간의 눈높이로는 바로 앞에 세워진 1.50m와 2.14m의 두 개 층 기단벽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보로부두르는 크게 세 개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기단부와 피라미드 외벽과 난간 쪽에 새겨진 부조다. 이곳에는 1,460개의 면에 불교경전 내용을 연작으로 조각해 놓았는데 여백의 부조까지 계산한다면 그 두 배는 훨씬 넘는다. 이 부조들은 불교경전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도 많다.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한 부조로 모두 120면을 할애하고 있다. 높이 83cm 폭 185cm와 235cm 두 크기로 조성했는데 이곳의 조각수법이 유난히 뛰어나 설계초기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바 사람들의 생활상이다. 기단부에 조성된 자바의 생활상은 당시의 모습을 잘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여기에는 당시 직업과 관련한 부조부터 생활상과 민간신앙을 알 수 있는 나무·가옥·가축·꽃병·가축들의 모습과 마카라 장식을 한 배수구도 등장한다. 이 기단부 부조는 후에 조성된 기단으로 가려져 있어, 현재 극히 일부만 보이는데, 보수공사 시 촬영한 사진이 전한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과 생활상을 담은 부조를 모두 합하면 길이가 6km에 이르고 면적은 2,500㎢에 달한다. 긴 회랑에는 부조 외에도 작은 탑과 감실을 조성해 불상을 안치했는데, 동서남북 네 방위에 안치된 석불이 432기에 이른다.

마카라로 만든 배수구. 인도풍의 모습으로 표현된 흔치않은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세 개의 원형단이다. 이 위에 복련과 앙련으로 조성된 대좌가 있고, 그 위에 작은 종형 불탑과 그 안에 불상을 안치했다. 맨 아랫단에는 32기, 가운데 단에는 24기, 맨 위에는 16기의  탑이 중앙탑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탑 안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안치했다. 탑신에는 방형의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만들어 안치된 석가여래좌상을 예배할 수 있게 한 게 특징이다. 

세 번째 부분은 보로부두르 맨 중앙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18.39m의 중앙탑이다. 중앙탑은 탑신 하단의 지름이 13m이나 되는 거대한 종형이다. 탑의 하대부분에는 여러 층의 곡선으로 된 띠 줄을 돌렸고, 상대에는 커튼 무늬로 장엄을 했다. 그 위에는 사각의 노반(露盤)과 무늬 없는 팔각뿔 형태로 상륜부를 구성했다. 이런 형태는 인도 산치 대탑과 동일하지만 이곳의 탑은 반구형이 아니라 종형이라는 점, 상륜부에 화려한 장식이 없이 단순하게 마무리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인도의 스투파가 화려하다면 보로부두르의 스투파는 장엄하다고 할 수 있다. 

1,000년 만에 걷어낸 화산재

이러한 건축구조는 철저하게 만다라적 불교세계관의 ‘삼계사상’으로 설계된 것이다. 측면에서 보면 맨 아랫부분의 기단은 욕계(欲界), 피라미드는 색계(色界), 그리고 원형의 탑은 무색계(無色界)로 구분된다. 평면적으로 보아도 사각은 욕계, 가운데 원형기단은 색계, 중앙 탑은 무색계로 상징된다. 즉 인간세상에서 점차 열반의 세계로 오르고 있음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이 사원에서 제대로 된 종교의식이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워낙 조성기간이 길어서 왕조의 수명과 시작과 끝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일렌드라 왕조가 세력을 잃은 후 이 지역이 다시 힌두의 영향권 안에 들었다가 이슬람 세력권에 들면서 대승불교는 위축되었고 보로부두르도 버려지게 된다. 더욱이 인근 화산활동으로 화산재에 묻히면서 보로부두르는 잊힌 전설의 사원으로 남아 구전(口傳)하게 되었다.

전설로 전하던 보로부두르를 세상 밖으로 드러낸 사람은 1814년 당시 자바를 점령한 영국의 총독 토머스 스텐퍼드 래플즈(Thomas Stamford Raffles)다. 그는 보로부두르를 재발견하고 바로 코넬리우스(H.C. Cornelius)를 단장으로 한 2,000여 명으로 조직된 조사단을 파견해 천년동안 묻혀 있던 사원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이 사원은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1873년에 리만스(C. Leemanns)가 학술보고서를 작성했고, 1885년에는 이제르만(J.W. Ijzerman)이 현재의 기단 안에 감추어졌던 최초의 기단을 발견했다.

1895년 올덴버그(D. Oldenburg)가 부조를 중심으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지진으로 인해 붕괴가 염려되면서 1907부터 5년간 네덜란드 공병대가 복원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네스코의 주도로 1974년부터 1983년까지 긴 복원작업 끝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됐지만 이후에도 잦은 지진과 화산폭발로 화산재가 쌓여 부분복원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둔탁해 보이는 기단부분은 토목 공사 때 쌓아올린 토사가 장력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덧대어 쌓았다.

현재의 보로부두르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인도네시아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특히 일출과 일몰을 보려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곳에서는 그 어떤 불교의식도 열리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민의 90%가 무슬림이다 보니 불교문화유산이 아니라 단순히 세계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가이드조차도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부조의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일 뿐, 종교의식이 열리지 않는 종교대상물 보로부두르의 민낯은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보다 크게 나을 바가 없어 보였다.

난간부분을 벽면처럼 만들어 외부에서 보면 감실의 석불들이 줄지어 있는 듯 보인다
부조의 좌측 상단에 ‘추한 얼굴’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조성 당시 새겨야할 주제를 메모한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은 서로 험담하는 모습이다.
사문유관 중 태자가 동문 밖에서 노인을 만나 늙어감의 고통을 알게 되는 장면. 
마야부인이 태몽을 꾸는 장면.
암산대결을 마친 후 태자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장면(상).
석가의 깨달음 이후 지나가던 상인 형제가 우유죽을 보시하는 장면.
태자가 출가를 위해 마부 찬타카, 애마 칸타카와 마주한 장면.
태자와 사천왕의 모습.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사천왕이 말의 네 발에 연꽃을 받치고 있다.

김 성 철

사진작가. 대학에서 사진을, 대학원에서 문화재를 전공했다. 문화재전문작가이자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화재 관련 책에 사진을 찍었다. 현재 문화재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49’와 해외유적도시 전문출판사인 ‘두르가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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