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콘텐츠 ‘무궁무진’ 재미·감동·쉬운 불교 필요하죠”

윤청광(77) 대한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은 50여 년간 방송·출판 분야에 몸담아왔다. BBS불교방송 개국과 함께 소설 ‘고승열전’(전 25권) 시리즈가 방송돼 7년여 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불교를 알면 평생이 즐겁다>·<회색 고무신> 등 다양한 불교서적을 저술했다. 불교언론사에 칼럼과 논설을 쓰는 등 불교 언론 발전에도 힘써 왔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연말, 조계종 제31회 포교대상(대중매체/문화부문)을 수상했다. 윤청광 이사장을 만나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고교 시절 박완일 강연 큰 인연

“초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이런 원력 덕분에 포교대상이라는 큰 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팔십에 가까워져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감동을 주는 불교를 만들기 위해 더욱 앞장서겠습니다.”

윤청광 이사장은 1942년 전남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 돈독한 불자였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찰을 다녔다. 자주 다닌 사찰은 그가 살던 마을 해변가 절벽 위 ‘축성암’이라는 암자였다. 집에서 15리(약 6km) 정도 떨어진 이 암자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불교와의 인연은 중·고등학교 때도 계속 이어졌다.

“목포 문태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작고하신 박완일 선생님이 당시 동국대 불교대학 학생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전국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지방 순회강연을 했어요. 우리 학교에도 찾아와서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대중강연을 했는데, 그때 제대로 된 불교 강연을 처음 접하게 됐어요. 그날 강연이 인연이 돼 동국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됐어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항상 문예반 활동을 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던 그는 1959년 동국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는 필수다. 〈성경〉을 읽다보니 고등학교 때 들었던 불교 강연이 떠올랐다. 그 후 불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전공과목인 영문학보다 불교학에 더 빠져들게 됐다. 동국대 학보사 1기 기자로 활동하면서 학교 스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불교적인 학교 분위기 덕분에 불교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3학년 때 동국대 학보사 편집장을 맡았는데, 학교 부조리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고 있었어요. 5·16군사정변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후였는데 대학 총장실에 계엄사령관이 권총을 차고 들어와 ‘데모하는 학생들은 무조건 퇴학을 시켜라. 모조리 총살을 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어요. 참다못해 ‘계엄사령관 일행, 공갈협박차 래교(來校)’라는 제하의 기사를 썼지요. 그런데 신문을 배포하기 직전에 누군가 밀고를 해서 인쇄한 신문은 전부 보일러실에서 불태워졌어요. 이 사건으로 주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됐죠.”

그는 이후 여기저기 끌려가 배후에 대한 신문(訊問)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는다. 이어 동국대 인도철학과 서경수 교수가 잡지 〈사상계〉에 관련 내용을 글로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대학을 떠나게 된다.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로웠지만, 상대적으로 군사독재에 대한 복수심은 커져만 갔다. 폭탄이라도 있으면 터뜨리고 싶었을 만큼 강한 적개심이 쌓이고 있었다.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분개해 있던 그를 일깨워준 것은 우연히 접한 〈법구경〉 한 권이었다.

논리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를 일깨워준 한 구절은 ‘원한으로써 원한을 갚는다면(不可怨以怨) 끝내 멈추고 그치게 하는 것이 불가하다(終以得休息).’라는 내용이었다. 이 한 문장을 읽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 화염병을 들고 날뛰다가 어딘가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거나, 맞아죽었을 것이다.

〈법구경〉은 예전에도 몇 차례 읽은 책이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다시 읽은 한 구절 한 구절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그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혔다. 이후 불교공부에 본격 나섰다. 닥치는 대로 불교경전을 읽으며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했던 마음을 달랬고, 마음을 다잡았다.

1992년 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24차 국제출판협회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윤청광 이사장.

‘삼행일치’ 실천한 법정 스님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인연 깊은 스님은 법정(1932~2010) 스님이다. 학보사 편집장 시절의 사건으로 대학에서 자퇴를 해야했던 그는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동서문화원이란 출판사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다.(43년 뒤 명예졸업) 어느 날, 그 사건과 관련해 대학을 떠났던 서경수 교수가 법정 스님과 함께 찾아와 ‘그때의 겁 없는 청년이 바로 이 친구’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1994년 가을 무렵 이해인 수녀의 수도원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법정 스님과 윤청광 이사장.

몇 년이 흘러 법정 스님이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첫 수상집 〈영혼의 모음〉을 펴내게 됐을 때, 그가 편집을 맡았다. 그때가 1973년인데, 제목이 어려웠던 탓인지 흥행을 하지는 못했다. 3년 뒤 범우사에서 〈무소유〉란 이름으로 재출간했을 때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다. 그리고 1993년 우연히 법정 스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스님은 “내 나이가 점점 드는데 밥값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맑고 향기롭게 사회 활동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을 계기로 △욕심 줄이기 △풀 한 포기 가꾸며 살기 △양보하며 살기 등 9가지 덕목을 만들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캠페인을 전개했고, 1994년 1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정식으로 선포하게 됐다. 윤 이사장은 이후 ‘맑고 향기롭게’ 본부장을 맡아 17년 동안 활동하게 된다.

“법정 스님은 정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스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같기가 힘든데 스님은 말과 행동과 함께 글(文)까지 세 가지가 모두 일치해요. 스님은 30대에 미리 유언을 썼는데 입적하신 후 그대로 장례를 치르셨어요. 어느 날 일흔이 넘은 스님이 혼자 생활하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 시자 스님을 한 명 두라고 궜했어요. 그게 힘들다면 손상좌라도 곁에 두시라고 했죠. 그때 스님은 ‘인류의 스승이 되겠다고 집안도 버리고, 부모형제도 버리고 산에 들어온 젊은이한테 늙은이 뒤치다꺼리를 시켜서야 되겠느냐? 그건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거절을 하셨죠. 나중에 몇몇 스님을 상좌로 들이시긴 했는데, 상좌 스님들에게 방 청소나 빨래 같은 개인적인 일은 일절 시키지 않으셨어요.”

불교방송 ‘고승열전’ 큰 인기 끌어

1995년 4월 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승열전〉 출판기념회 모습. 왼쪽부터 공종원 前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종규 前 천태종 중앙신도회장, 윤청광 이사장, 조계종 원로의원 현호 스님, 송석구 前 동국대학교 총장, 조계종 前 총무원장 설정 스님, 김낙준 대한출판문화협회 고문, 성우 구민.

윤 이사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학을 자퇴하고 몇 년 간 주간신문사와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1965년 문화방송(MBC) 보도국 작가로 입사하면서 동서문화원 편집장을 병행했다. 시사풍자·만평 프로그램인 ‘오발탄’과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된 ‘전설 따라 삼천리’의 작가로도 오랫동안 활약했다. 하지만 시련이 한 차례 더 찾아왔다.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강제로 언론통폐합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오발탄’이 폐방되면서 그도 문화방송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 주로 불교와 관련된 전설들을 소재로 삼았던 그였기에 ‘불교 소재가 이렇게 무궁무진한데 만약 불교방송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낸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됐다. 그리고 몇 년 후 BBS불교방송이 개국을 한다.

“문화방송에서 작가생활을 하기 전에 불교잡지 〈법륜〉에 고승일대기를 3년 정도 연재했죠. 원고지 30매 분량으로 연재를 한 고승일대기는 제가 보기에도 무척 드라마틱하고, 재미가 있었어요. 이 재미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1980년대 후반 BBS불교방송이 개국을 추진하더군요.”

그는 불교방송 설립 초기부터 초대 장상문 사장과 당시 상무이사 정휴 스님 등을 만나 고승을 주제로 연속극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이디어가 채택돼 편성된 프로그램이 바로 ‘고승열전’이다. 윤 이사장은 일주일에 사흘을 밤새울 정도로 이 일에 힘을 쏟았다. 운도 따라주었다. ‘고승열전’의 연출을 박용기 선생이 맡았다. 그분은 KBS 성우 1기 출신으로, 연기자로도 성공을 거둔 분이었다. 이런 분이 연출을 맡았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성우들이 총동원돼 방송에 참여해주었다. 원고도 원고지만 ‘고승열전’이 큰 성공을 거둔 건 그 덕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승열전’의 인기는 대단했다. 한 청취자는 방송을 놓쳤다고 직접 불교방송에 찾아와 테이프에 녹음을 해갔고, 방송을 듣다가 화장실 갈 때 라디오를 들고 갔다는 불자도 있었다. 또 청취자들이 집으로 초대를 해 식사를 대접해 준 일도 부지기수였다. 원고 쓸 시간도, 자료조사 할 시간도 부족했던 그에게 이런 초대는 행복한 고민이었다.

2019년 12월 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전통공연장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으로부터 제31회 포교대상 대상을 수상 받고 있는 윤청광 이사장.

옛 포교방법, 시대 맞게 바꿔야

현재 동국출판사를 운영 중인 윤청광 이사장은 BBS불교방송 TV의 유튜브 콘텐츠인 애니메이션 〈고승열전–경허 스님〉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미디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포교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직도 라디오를 선호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원하고 있어요. 이런 추세에 따라 ‘고승열전’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자는 의견이 나와 도와주고 있어요. 들어보니 평이 좋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여러 고승과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방영할 수 있게 도울 계획입니다.”

불교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문학·예술·출판 분야의 활동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한 그는 책과 만화, 영화나 드라마 등 작품 하나로 수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만큼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포교방법의 고민’을 강조했다. 그는 끝으로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옛날 사고방식으로는 포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아직도 다수의 스님들은 한문으로 쓰인 부처님 말씀이 최고라고 여깁니다. 이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디지털시대에 맞춰 불교의 포교활동도 제 평생 서원인 알기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남은 여생 이런 불교 포교를 위해 더욱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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