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단상

나에게는 오래된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적당함’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증세가 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게임 엔딩(Game Ending)을 보려고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친구와 한 내기 때문에 새벽에 학교 교무실에 침투(?)한 적도 있다. 이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게 중간이 없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적당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부분은 인간관계였다. 나의 과한 행동을 사람들은 불편해 했고, 그렇다보니 선생님은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해도 크게 혼을 냈다. 내 의도와 달리 타인에게 상처를 주다보니, 스스로도 문제를 인식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적당함’은 온도계나 체중계처럼 눈에 보이는 표시가 없어서 그 위치를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주변 사람의 반응으로 적당함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는데, 이마저도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답답하다.”, “왜 이렇게 소극적이냐.”는 말을 듣게 됐다. 처음에는 과해서 문제였는데, 나중에는 부족해서 문제가 됐다.

어느 날, 외할머니를 따라 사찰에 갔다가 한 비구니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적당함’의 기준을 모르겠다는 말에 스님은 차를 한 잔 따라 주셨다. 그리고는 “이 차는 네가 마시기에 적당한 온도니?”하고 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는 겉보기에도 뜨거워보였다. “마시기에는 뜨거울 것 같은데요.” 대답하고 한 모금을 마셨는데, 역시나 뜨거웠다. 그런데 스님은 당신 앞에 따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에게는 이 온도가 참 적당하구나.”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 ‘적당함’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온도가 나에게는 적당할 수 있고, 나에게 적당한 온도가 타인에게는 뜨거울 수 있다는 사실. 적당함은 사람마다 동일할 수 없음을.  

여전히 나는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당함’을 찾아가는 중이다. 적당함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를 기준으로 정해보려 노력 중이다. 아직도 ‘이게 적당한가?’하는 생각이 들고 고민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 나에게 알맞은 ‘적당한 온도’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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