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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손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딸에게서 어머니를 보셨습니까? - 금아 피천득 선생께

선생님 가신지 어언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전히 저희들 곁에 계십니다.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은 출판사가 샘터에서 민음사로 옮겨진 뒤에도 서점의 가판대에 올려 있는 베스트셀러입니다. 선생님은 독자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문학의 불멸성을 누리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사셨던 서울 서초구는 선생님이 생전에 즐겨 걸었던 길을 ‘금아 피천득의 길’로 명명했습니다. 고속터미널에서 이수교차로에 이르는 그 길에 가면 선생님의 좌상과 선생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문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금아 피천득 선생 기념회’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올해도 선생님 댁이 있던 반포에서 ‘피천득 다시 읽기’가 열렸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하고 문인들이 재해석하는 조촐한 행사였지요. 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 행사의 사회를 맡아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다시 한 번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봉직하셨던 서울사대를 다녔지만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어과 교수셨고, 저는 불어과 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졸업하기 1년 전, 정년을 한 해 앞두고 퇴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로 시작하는 명문을 쓴 유명 교수를 복도에서 얼핏 뵌 것이 선생님과의 인연의 전부입니다.

연 5주 동안 계속됐던 ‘피천득 다시 읽기’의 셋째 날, ‘피천득 문학의 이야기성’에 대한 송하춘 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을 때 한 참석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질문은 선생님의 유명한 딸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질문 요지는 “왜 따님만 그렇게 사랑했었는가? 사모님과의 관계는 어땠는가?”였습니다.

송 교수가 자신은 피 선생의 사생활은 잘 모른다며 선생님의 서울사대 영어과 직계 제자인 정정호 중앙대 명예교수에게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정 교수는 피 선생은 따님도 사랑하셨지만 부부 간의 금슬도 좋았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충 답변에 나섰었지요.
1910년생인 금아 선생은 옛날 분이십니다. 부인은 아내로서 사랑했겠지요. 그러나 피 선생께 딸 서영이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선생님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지니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의 수필에는 ‘엄마’라고 부르며 그 그리움이 절절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딸 서영이가 태어납니다. 서영이는 어머니에게는 손녀가 됩니다.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은 아이인 것입니다. 또 격세유전이라고 해서 손주는 조부모를 많이 닮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딸 서영이에게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오매불방 한시도 잊지 못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딸에게서 보았을 때 그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그와 유사한 체험을 한 바 있습니다. 저는 스물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는 마흔여섯 살이었지요. 피 선생님의 경우보다는 덜했겠습니다만 제게도 고생만 하시다 일찍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아들이 손자를 어르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아들 녀석의 뺨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즉 어머니의 옆모습과 흡사한 모습을 아들의 뺨에서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아들은 어머니의 친손자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놀라움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홀로 감탄을 금하지 못했었지요. 어릴 때는 예쁘고 귀엽기만 하더니 자라면서 이런 일 저런 일로 속도 썩여 가끔 밉기도 하던 자식이었는데, 이렇듯 제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갖고 있다니··…·. 저는 어머니가 손자를 보러 오신 듯한 반가움에 젖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그러하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외아들이라 좀 덜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따님을 얻으셨으니,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 딸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오죽했겠습니까? 선생님의 글에도 그 감정이 드러나고, 남들에게는 지나친 딸바보로 비쳤을 것입니다.
따님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선생님은 서영이가 두고 간 인형을 서영이 동생이라며 철철이 옷을 갈아입히셨다지요. 그런 것도 저는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서영이는 딸이면서, 어머니의 환생이기도 했던 것이니까요. 

선생님의 아름다운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그것은 그리운 어머니와의 동행입니다. 선생님은 딸을 얻음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유자효

시인. KBS파리특파원*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아직〉,동시화집〈스마트 아기〉,빛나는 시 100인선〈어디일까요〉,시집 해설서〈시 읽어주는 남자〉,산문집〈나는 희망을 보았다〉등을 출간했다. 현재 지용회장• 구상선생 기념사업회장• ‘시와시학’주간•(사)대한언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글·유자효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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