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나’라는 것에는 실체가 없어 무아(無我)라고 하지만 일반 사물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법(法, dhamma)은 존재한다.”고 본다. 반면에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아(我)도 공하고 법(法)도 공하다.”고 본다. 즉 일체가 공(空, ..nya)하다고 본다. 현대물리학자들의 견해는 대승불교 쪽에 더 가깝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 )는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물질이 소립자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어떤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사건들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도 사건들이 만드는 어떤 프로세스다.” 
공의 일차적인 의미는 ‘없음’이다. 대승불교는 없음을 말하면서도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물에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고 한다면 이 공한 것을 기술하는 물리법칙은 공하지 않을까? 또 진공묘유라면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진공(眞空)도 무슨 작용을 할까? 만일 진공에도 어떤 작용이 있고 법칙마저 공하다면 그야말로 진공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빛은 정해진 법칙이 있어 두 점 사이의 직선거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빛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경로를 따라 빛알이 지나갈 가능성을 합쳐놓으면 빛알은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   법칙 없는 법칙

물리학은 그것이 고전역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자연현상이 어떤 간단한 물리법칙에 의해 운행된다고 본다. 날아가는 야구공이나 하늘에서 움직이는 천체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운동에 관해서 중력이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할 때도 모든 물체는 운동의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평면 위에서 공을 굴리면 이 공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빛도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빛이 최단거리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법은 없다.

고전역학에서 물리학자들은 ‘액션(Action, 작용)’이라고 부르는 어떤 물리량이 최소값을 갖는다는 단순한 원리로부터 물체의 운동방정식을 쉽게 구한다. 그런데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입장에서 보면 입자가 ‘최소 작용의 원리’에 맞는 어떤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원자나 소립자들은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서로 다른 두 곳에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100개가 넘는 곳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빛은 어떤 주어진 법칙이 있어 두 점사이의 직선거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빛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측정 전의 빛은 관찰자가 빛알[光子, photon]을 관찰할 수 있는 확률을 말해주는 확률파이기 때문에 어느 한 경로만을 따라 움직일 리 없기 때문이다. ‘빛알’이란 빛이 입자로서 행동할 때 빛의 알갱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확률파는 빛이 지나갈 수 있는 모든 경로에 존재한다. 빛알이 하나만 있더라도 이 하나의 빛알은 두 점 사이의 직선거리 뿐 만아니라 모든 경로를 따라 지나갈 확률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경로를 따라 빛알이 지나갈 가능성을 합쳐놓으면 빛알은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에서 말하는 빛에 관한 법칙이다. 빛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가 다 그렇게 움직인다. 빛이나 입자가 어느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닌데도 거시적으로 보면 일정한 법칙을 따라 정해진 경로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거시적으로 보면 어김없는 법칙을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양자역학의 기본방정식들도 ‘파동함수’가 액션을 최소화하는 조건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데, 양자역학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에서는 ‘장[파동함수]’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합쳐서 액션을 구한다. 이렇게 구한 액션을 화인만(R. Feynman, 1918~1988)의 ‘경로적분(path integral)’이라고 하는데 이 경로적분이 양자장론의 기본법칙으로서, 양자장론은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기가 막힐 정도로 바르게 기술한다. 장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값을 합친다는 것은 장이 특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리학자 휠러(John A. Wheeler, 1911~2008)는 이것을 가리켜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진정한 법칙”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물도 공하고 법칙도 공하다면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진공’이라고 말하는 진공은 어떨까?

우주의 급팽창 이론을 주창한 앨런 구스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주야말로 공짜다. 법칙이랄 것이 없는 데서 법칙이 나오고 텅 빈 것으로 보이는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한다니 진공묘유는 빈 말이 아니다.

|   양자진공

양자장론에서는 기본적인 물리량으로 ‘장(場, field)’을 택하는데, 장은 원래 고전물리학적 개념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달하는 물리적 공간을 각각 전기장과 자기장이라고 부르는데,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전기와 자기는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자기장’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전기와 자기현상을 통합 기술한다. 이 전자기장의 개념을 모방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을 중력장을 통해 기술한다. 따라서 고전물리학에서는 ‘입자’와 ‘장’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 개념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양자장론에서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파동함수를 ‘장’으로 택하고 입자란 이 ‘장’이 들 뜬 상태라고 봄으로써 ‘장’이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입자를 포함시킨다. 비유하자면 현악기의 줄 하나가 장에 해당하고 이 줄이 튕겨져서 들뜨게 되면 도·레·미·파 등 음높이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장이 들떠서 어떤 특정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그것이 입자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입자의 경우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가 입자 하나, 그 다음 높은 에너지 상태는 입자 두 개가 된다고 본다. 이렇게 전자나 다른 소립자들이 어떤 장의 들뜬 상태라고 본다면 전자기장이나 중력장의 들뜬 상태도 입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기장의 들 뜬 상태가 바로 ‘빛알(photon)’이다. 중력장의 들뜬 상태에 해당하는 입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중력자(graviton)’라고 부른다. 

양자장론의 수학적 구조는 스프링(spring)의 양자역학적 표현과 꼭 같다. 양자역학적으로 스프링을 기술하면 스프링은 진동하지 않고 정지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속도]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 때문이다. 스프링이 일정한 길이에서 진동하지 않고 있다면 그 스프링 끝에 달린 입자가 정해진 위치에서 정지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불가능하다.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입자가 정지해 있다는 것은 그 위치와 속도가 다 정해진 값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확정성 원리를 위배한다. 따라서 스프링은 그 에너지가 최소가 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약하게 진동하고 있어야 된다. 전기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공상태를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정한다면 “장(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뜻일 것이다. 전자기장을 예로 들면 진공이란 전자기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것은 전공간의 각 점에서 전자기장의 측정값이 정확히 ‘영(零)’이라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전자기장을 영의 값으로 정확히 결정하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전자기장의 변화율이 크게 변하여 전자기장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스프링의 길이를 정확하게 결정하면 스프링이 진동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주전체에서 전기적 스위치를 껐다고 하자. 그래도 전공간의 각 점에서 전자기장의 값이 ‘0’으로 경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기장의 평균치는 영의 값을 가질지라도 전자기장은 이곳에서는 ‘+’부호의 값, 저곳에서는 ‘-’부호의 값을 갖는 식으로 전자기장은 진동하고 있다. 그 결과 진공은 에너지를 얻게 되고 무엇인가로 차 있게 된다. 

이렇게 무엇인가로 차 있는 물리적 진공에서는 우주도 탄생할 수 있다. 우주의 급팽창 이론(Inflation theory)을 주창한 앨런 구스(Alan Harvey Guth, 1947~)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주야말로 공짜다. 법칙이랄 것이 없는 데서 법칙이 나오고 텅 빈 것으로 보이는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한다니 진공묘유는 빈 말이 아니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1946년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소립자 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퇴직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상남도 함양에 약천사를 창건했다. 이곳에 불교과학아카데미를 개설,2014부터 매월 불교와 현대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현대물리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천태사상으로 풀이한 현대과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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