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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6_선비정신 담긴 정자의 다리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청암정과 석교. 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 권벌 선생이 건립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학문에 매진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집안은 물론 풍광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사색과 풍류를 즐겼다. 아울러 후학을 양성하는 학문의 전당으로도 활용했다. 모함을 받거나 죄를 지어 첩첩산중이나 제주도 같은 섬으로 유배된 이들도 정자를 지어 시인묵객과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 개울이나 연못을 건너 정자로 가는 길, 다리는 필수였다. ‘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 마지막 순서로 경남 거창 용원정(龍源亭) 쌀다리, 전남 완도군 보길도 세연정(洗然亭) 굴뚝다리(판석보, 板石洑), 경북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靑巖亭) 석교(石橋) 등 선비 정신이 담긴 정자의 다리 세 곳을 소개한다. 

백성 위해 놓은 거창 용원정 쌀다리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는 함양군 안의면과 경계를 이루는 기백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안의현에 속했다가 1914년에 거창군으로 편입됐다. 고학리는 병항·고신·고대·상촌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400여 년 전 병항마을에 해주(海州) 사람 구화공(九華公) 오수(吳守) 선생이 터를 잡은 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병항마을에는 오수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64년 건립한 ‘용원정(龍源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누각 형태의 용원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다. 용원정 앞에는 기백산에서 흘러내리는 용계(龍溪)가 흐른다. 용계라는 이름으로 보아 용(龍)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용계 위에는 260여 년 된 외나무다리 형태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한 개의 중심돌 위에 길쭉한 돌 두 개를 연결해 만든 이 돌다리의 길이는 11m가 조금 넘는다. 폭은 1m 25cm, 높이는 2m다.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긴 평교형 다리다. 다리 위로는 벚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는데, 벚꽃이 필 무렵에는 관광객과 사진작가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경남 거창 용원정 쌀다리. 조선시대 오성재·성화 형제가 행인들을 위해 백미 천 석을 내놓아 건립했다.

오수 선생의 후손 오성재·성화 형제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이곳에 다리가 없어 행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1758년 백미(白米) 천 석을 내놓아 다리를 건립했다. 오 씨 형제는 인근 안의 지역에서 큰 돌을 구해 사흘 동안 나무 받침을 이용해 끌고 왔고, 일꾼을 모아 돌 밑에 흙을 넣는 방법으로 이 다리를 완성했다고 전한다. 백미를 희사해 다리를 세웠다고 해서 ‘쌀다리’라고도 불린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뿐만 아니라 보부상들도 이 길을 지나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요즘도 다리가 중요한 교통로지만, 당시에 이 쌀다리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다리가 완성된 뒤 당시 안의현감 이성중이 방문해 오 씨 집안이 크게 번창할 수 있는 것은 남을 위해 베푸는 공덕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칭찬하고, 그 공덕을 기리는 ‘설교사적비(設橋事蹟碑)’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1917년 홍수 때 다리의 긴 돌 하나가 떠내려갔고, 1960년대 중반 후손들이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대부 모두가 백성들을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지는 않았다.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백성들을 착취한 탐관오리도 있었지만, 오 씨 형제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발휘해 사재를 털어 이 돌다리를 놓은 것이다. 이들 형제가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쌀다리를 놓은 것만으로도 선비가 해야 할 기본도리는 충분히 한 것 같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용계를 흐르는 우렁찬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복잡한 마음과 머릿속을 정화시켜 주는 듯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시금 선비정신을 일깨워주는 오 씨 형제의 일갈은 아닐런지.

다리의 아래를 받치고 있는 중심돌. 용계의 거친 물살을 견딜 수 있도록 두꺼운 돌을 사용했다.

선계의 관문, 보길도 세연정 굴뚝다리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선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가다가 완도 보길도에 정착했다.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지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말한다. 보길도 고산 유적지는 부용동 일대에 있는데, 윤선도 원림(명승 34호)으로 지정돼 있다. 고산은 이곳에서 유명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을 지었다. 

부용동 원림에는 담양 소쇄원, 양양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세연정(洗然亭)이 있다. ‘세연’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고산은 둑(판석보)을 만들고 연못(세연지)을 조성했다. 그리고 물을 끌어들여 사각형의 인공 연못(회수담)을 만든 뒤, 두 연못 사이에 세연정을 세웠다. 

‘판석보(板石洑)’는 보의 기능과 다리의 기능을 겸한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우리나라 정원에서는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로 불린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폭우가 내리면 폭포가 되도록 고안됐다. 고산의 뛰어난 안목을 짐작케 하는 이 다리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 물이 새지 않게 한 뒤, 그 위에 매끈한 판석을 덮어 완성했다. 폭은 1m~1.5m, 길이는 12~13m 가량이다. 전체적으로 살짝 굽어있다. 세연정이 있는 곳이 신선의 세계라면, 굴뚝다리는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관광객들이 보길도 윤선도 원림 내 세연정 굴뚝다리 위를 걷고 있다.

세연정 입구에는 굴뚝다리 외에도 돌다리가 하나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길도지〉에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 …… 정자 서쪽·제방 동쪽 겨우 한 칸 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고,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樓)에 오른다.’고 기록돼 있다. 이 다리를 ‘비홍교(飛虹橋)’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方壇)이 연결돼 있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고산 윤선도는 세속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부용동에서 그 꿈을 이룬 듯하다. 그는 조정에 등용됐다가 파직되어 낙향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일생의 대부분을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유배지에서 보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정 때문에 그랬을 터. 그의 꼿꼿한 선비정신은 세속을 등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려고 했던 굳건한 의지의 밑바탕이 아닐까 싶다.

배려와 孝 깃든 봉화 청암정 석교

충재(沖齋) 권벌(權., 1478~1548) 선생은 조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를 주축으로 추진한 개혁 정치에 안동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사림의 도학정치를 주장한 문신이자 학자다.

본가와 청암정을 잇는 석교. 한쪽은 거북바위, 한쪽은 3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닿아 있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했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한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파직당한 뒤 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마을(酉谷, 닭실마을)에 자리 잡고 15년 간 은거했다. 선생은 1539년 종계변무(宗系辨誣,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한 일)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사후인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大明會典, 중국 명나라의 여러 법령을 집대성한 종합적인 행정법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정정되도록 한 공을 인정받아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됐다가 다시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됐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됐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도학(道學) 연구에 몰두하던 충재 선생은 1526년(중종 21)에 신탄 상류 약 500m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고,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바로 청암정(靑巖亭)이다. 선생은 청암정을 선계(仙界)로 여기고, 이곳에서 도를 닦는데 전념했다고 한다. 청암정은 음주가무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충재 선생이 학문을 갈고 닦았던 곳이며, 후대에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강당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현재 사유지인 청암정 일원은 명승 제60호로 지정돼 있다.
연못 위에는 본가와 청암정을 잇는 아담하면서도 운치 있는 석교(石橋)가 있다. 다리의 이름은 없다. 일자형의 장대석 두 개를 이어 놓았는데, 길이는 8m 정도다. 입구 쪽 끝부분은 반듯하게 다듬은 3단으로 된 직사각형의 돌 위에, 청암정 쪽 끝부분은 거북바위에 맞닿아 있다. 다리의 폭은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데, 충재 선생이 자신만의 세상을 오가는 길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충재 선생은 다리에 특별한 장치를 해놓았다. 장대석이 이어지는 부분 아래 다리의 날개로 불리는 받침이 그것이다. 

청암정 출입을 금하는 표지판. 주인이 청암정과 주변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다.

다리의 날개는 장식적인 측면에서도 수려하지만, 그 속에는 ‘배려’와 ‘효’라는 고결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청암정 안주인인 권재정 씨에 따르면 충재 선생이 이 다리를 건립할 때, 청암정으로 향하는 연로한 아버지와 동네 어르신들이 다리를 편안하게 건널 수 있도록 부축하기 위해 다리의 날개를 만들었다. 

청암정은 많은 사진가들이 찾는 사진 명소로도 알려져 있는데, 입구에 ‘기념 촬영은 가능하지만, 작품사진은 사절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돌다리 입구에도 ‘청암정 출입금지’ 푯말이 달린 경고판을 설치해 청암정으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

청암정을 찾는 이들이 작품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꽃과 식물을 함부로 밟고, 가지치기를 할 때 사용하는 전지가위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나무에 제초제를 부어 죽이기도 하는 등 청암정 주변환경을 크게 파괴했다고 한다. 또한 사진 연출을 위해 다리 위에서 뛰는 등 문화재 보호를 감안할 때 해서는 안 될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때는 청암정을 폐쇄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암정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것이 청암정 안주인의 설명이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재는 ‘내 것’, ‘네 것’을 따져서는 안 되는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비록 현대인들이 선비정신을 이어받지는 못했을망정, 그 후손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이기도 하다. 다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오롯한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만대에 이어지길 기원한다. 

쌀다리는 거문고 모양을 닮은 평교형 돌다리다.
세연정 굴뚝다리는 건기에는 다리, 비가 많이 내리먼 폭포가 되도록 고안된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세연정 입구에는 굴뚝다리 외에도 거북이 등 위에 ‘비홍교’로 불리는 다리가 하나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충재 선생의 연로한 아버지와 어르신들을 위해 설치한 다리의 날개. 배려와 효 정신이 깃들어 있다.
풍광이 빼어난 청암정과 석교. 평소에는 다리 위에 출입금지 경고판이 설치돼 있는데, 안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경고판을 치우고 촬영했다.

이강식 기자  lks971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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