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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6_나주 도래한옥마을281호
  • 글·홍점기 마을이장/ 사진·이강식 기자
  • 승인 2019.11.2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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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도래한옥마을은 풍산 홍씨 집성촌으로,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 100여 채 품은
500년 전통의 호남 3대 名村

나주 도래한옥마을은 나주시 다도면 풍산(楓山)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뒷산인 감태봉의 물줄기가 세 갈래로 마을을 통과해 ‘내 천(川)’자를 이룬다고 해서 ‘도천(道川)마을’로 불리다가 도내마을-도래마을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성은 1480년경 조선 중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마을에는 문(文) 씨·김(金) 씨·최(崔) 씨 등이 살고 있었는데 15세기 중엽부터 풍산 홍씨(豊山洪氏)의 집성촌으로 바뀌게 된다. 

필자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국학의 직학(直學, 교수)을 역임한 홍지경(洪之慶) 선생이다. ‘풍산’이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안동 풍산이 고향인데, 문과에 급제한 후 개경으로 옮겨왔다. 현재 그 후손들은 나주 인근 외에도 충북 청원, 충남 천안, 강원 원주, 경남 양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풍산 홍씨 일맥이 도래마을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조선 중종 무렵이다. 시조의 8대손이 되는 홍수(洪修) 선생이 1519년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훈구파가 신진 사림파를 숙청한 사건)를 즈음해 처가인 나주 금안동으로 피신을 한 게 계기가 됐다. 나주로 피신한 홍수 선생은 아들 이상(履祥, 1549~1615)을 낳는데, 이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홍이상 선생은 다시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여섯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도래마을에 터를 잡은 분은 이 중 셋째인 홍한의(洪漢義) 할아버지이다. 

도래마을 뒷산인 식산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   어린 시절 추억

필자(홍점기, 68세)는 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1969년에 고향을 떠나 부산과 창원 등지에서 40여 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2012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릴 때 친구들이 많이 그리웠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옛 향수를 불러 일으켜 마을 곳곳이 포근하게 느껴지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다. 

사춘기에 막 접어들 무렵, 마을에는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지면 저녁을 먹은 후 자주 모이곤 했다. 지금처럼 치킨이나 피자 같은 군것질거리가 없을 때여서 가끔씩 서리를 하고는 했다. 서리는 남의 집 가축이나 과일 따위를 몰래 훔쳐 먹는 것인데, 요즘이야 범죄에 해당하지만 당시는 지나치지만 않으면 눈감아주던 시절이다. 

어느 날, 친구들끼리 궁리해 닭서리를 하기로 결정했다. 동네의 한 집을 정하고 살금살금 닭을 잡으러갔다. 대문에서 망을 보는 친구를 한 명 세웠는데, 그 집 아들이었다. 손이 날쌔고 행동이 민첩한 친구가 닭을 잡아 가지고 나오기로 했다. 그러나 어른도 쉽게 못 잡는 닭이 쉽게 잡혀줄리 만무했다. 닭이 친구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홰를 치는데, 야밤에 그걸 듣지 못할 어른이 누가 있었겠는가. 한 마리를 잡고, 두 마리를 잡을 때쯤, 방안에서 어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기침소리에 놀라 잽싸게 도망을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 잡고 돌아가라.’는 신호였던 것 같다. 

이튿날 마을에서 닭의 주인이 되는 어르신을 마주칠 때면 “이놈들, 얼굴이 번들번들하구나.”하고 농을 건네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면 내심 찔려서 ‘앞으로는 혼나지 않게 서리를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집을 목표 삼아 서리를 하고는 했다. 한마디로 철부지들이었다. 

한 번은 닭을 잡아와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닭이 익어 부엌 바닥에서 먹기 시작하려는데, 한 어르신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이놈들 보소, 마당으로 다나와 이놈들아.”라며 우리를 불러 내셨다. 당시 한겨울이어서 마당에 눈이 쌓여 있었는데, 그 추운 마당에 서서 덜덜 떨며 한참동안 어르신께 훈계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훈계를 다 듣고 방에 들어와 다시 먹은 닭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마을 어른들은 ‘내 자식’과 ‘남 자식’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자식’으로 여기며 지켜봐주셨던 것 같다. 특히 우리 마을은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심하게 말썽 부린 게 아니면 모른 채 해주었고, 도가 지나칠 경우에는 훈계를 서슴지 않으셨던 것 같다. 

도래마을 양벽정. 정월 초하루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합동세배를 한다.

|   도래한옥마을의 전통

우리 마을에는 현재 87가구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여느 집성촌이 모두 그러하듯 우리 도래마을도 우리 마을만의 독특한 전통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합동세배다. 예로부터 음력 설날이 되면 집집마다 방문해 어른께 새해 인사를 올리는 게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다. 집성촌의 경우에는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향을 찾아온 후손들까지 몰려다니며 집집마다 인사를 올리고는 했다.

그렇다보니 집집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도 며칠씩 손님맞이를 해야 했는데, 손님을 맞아야하는 집안 아낙네 입장에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기간에는 시어머니, 며느리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1949년경,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마을 어르신들이 ‘이대로 놔두면 마을 아낙들이 살아남지 못하겠다.’ 판단하고 마을 전체의 합동세배를 결정하였다. 이후 정월초하루가 되면 마을 사람 모두 마을 입구에 세워진 정자 양벽정(樣碧亭)에 모여 합동세배를 올리고 있다. 

다음은 구휼미 창고다. 집성촌이라고 해도 다른 성씨를 지닌 사람도 있고, 같은 성씨라고 해도 서로 간에 빈부 격차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 마을에는 예부터 부농(富農)이라 할 수 있는 집이 세 곳 있었다. 이 집들은 집안 한구석이나 대문 옆에 구휼미 창고를 만들어 놓았다. 이 창고는 지금도 있는데, 마을의 빈곤한 사람이 집주인과 마주치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곡식을 가져다가 배고픔을 달랠 수 있게 한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세 번째는 마을 고택의 굴뚝이다. 일반적으로 고택이라고 하면 굴뚝도 높이 세우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굴뚝을 토방 밑으로 해두었다. 사연인즉, 굴뚝이 높으면 밥 때가 되었을 때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도 보이게 되는데, 혹여나 주변 마을에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며 가슴 아프지 않을까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밖에도 도래한옥마을에는 전기줄과 전봇대를 볼 수가 없다. 한옥마을로 지정이 되면서 옛 마을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땅 밑으로 매립을 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형태의 양벽정 대문. 마을 주민 두 명이 설계하고 건축했다고 한다.

|   전남도 지정 한옥마을

500년 전통을 지닌 도래한옥마을은 호남의 3대 명촌(名村)으로 불린다. 북쪽으로 금성산, 남쪽으로는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한옥 100여 채가 고즈넉하게 자리한 조용한 마을이다. 조상님들로부터 물려받은 고택을 잘 지켜온 덕분에 2007년 1월 전남도 한옥보존시범마을로, 이듬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도래전통한옥마을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마을을 대표하는 문화재는 일명 ‘홍기응(洪起鷹) 가옥’이라 불리는 ‘계은고택(溪隱古宅)’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51호로 지정돼 있는데,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우리 마을의 종가로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04년에 건축되었다. 이 집의 특징은 기존 사대부의 솟을대문과 달리 문턱을 낮게 해 쉽게 넘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문을 넘으면 바로 곡식을 담아둔 뒤주가 자리하고 있다.
홍기응 가옥 외에도 중요민속자료 제165호로 지정된 우남고택(愚南古宅, 홍기헌 가옥)과 도민속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홍기창(洪起昌) 가옥, 도민속문화재 제10호인 홍기종(洪起宗) 가옥이 고택으로 이름나 있다. 두 고택은 자연 지형을 우선시해 건물의 절반 이상이 북향과 서향으로 지어진 게 특징이다. 또 마을 입구에는 조선시대까지 학당으로 사용하던 영호정(永護亭)이 있고, 마을에서 가장 격식을 갖춰 지은 정자인 양벽정의 내부에는 시문이 적힌 현판만 19개나 전한다. 

영호정은 ‘도천학당(道川學堂)’ 또는 ‘동학당(東學堂)’으로 불리던 학당이다. 조선 중기에 참판·대사헌·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 남평현감으로 재직할 때 고을에 학문을 장려하고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4곳의 학당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우리 마을에 터를 잡았던 홍한의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또 마을 한 가운데는 특이한 집 한 채가 더 있다. 바로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운동을 통해 시민의 힘으로 보존한 ‘도래마을 옛집’이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빈 집으로 방치돼 있던 가옥을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보존하자는 취지로 설립한 기구다. 옛집은 이 단체가 2006년 매입했는데,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에 이어 시민문화유산 제2호이다. 2016년에 나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도래한옥마을은 1978년부터 매년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도래의 날’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행사는 마을 주민들과 외지로 나가있는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모여서 여는 마을 축제이다. 지난 4월 27일 42회째 행사에는 많은 종친들이 모여 다채로운 공연과 장만한 음식을 펼쳐놓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초기에는 마을 어르신께 효도를 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회를 거듭하면서 전국의 향우들이 동참하는 큰 행사로 거듭났다. 

우리 마을 주민이나 외지에서 생활하는 사람 구분 없이 선조들의 물려주신 물질적 유산과 정신적인 유산을 대대손손 이어가려는 의지는 굳건하다. 앞으로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도래한옥마을을 아름다운 전통마을로도 보전해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도래마을 홍기헌 가옥. 대문과 창고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도래마을에서 보기 드문 초가다.
도래마을 계은정. 예전에는 마을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양벽정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고 전하는 주련이 걸려있다.
도래마을 고택의 담은 주로 황토와 돌을 섞어 만든 흙담이다.
홍기창 가옥의 구휼미 창고. 가난한 이들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구휼미 창고에서 먹을만큼의 곡식을 가져갔다고 한다.
도래마을 영호정은 도천학당 또는 동학당으로 불리던 학당이었다.
도래마을 옛집. 이 가옥은 내셔널트러스트운동으로 매입한 고택이다. 2016년 나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글·홍점기 마을이장/ 사진·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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