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불교 숨 쉬는 다람살라

다람살라 네충사원.

불향 따라 세계인 발길 몰려
인도는 명맥만 … 불자 1% 미만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다. 하지만 현재의 인도에는 불교 관련 유적만 산재해 있을 뿐, 불자를 찾아보긴 힘들다. 필자가 처음 인도를 여행한 건 1997년이다. 이후 지난해까지 10여 차례 인도를 여행했다. 짧게는 수십 일에서 길게는 몇 달간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불교의 흔적들을 보고 느꼈지만 그 내용으로 인도불교를 소개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세계 불교인들이 주목하는 티베트 망명정부인 다람살라(Dharamshala)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다람살라는 히말라야의 초입인 다울라다르 산맥 아래에 있다.

서두에서 인도불교를 잠시 언급하자면, 인도불교는 12세기 말 이슬람교의 박해를 계기로 사실상 사라진다. 현재 인도의 불교인구는 0.8% 정도라고 하는데, 근래에 되살아난 불씨라고 할 수 있다. 인도에 불교의 불씨가 되살아난 건 19세기 후반 벵골 지방에 불교전통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몇몇 인도 학자들이 이 전통을 불교사상적으로 발전시키면서다. 이후 마하비라(Mahavira) 스님이 1890년대에 스리랑카에서 비구계를 받고 돌아와 쿠시나가라에 사찰을 창건했고, 뒤를 이어 몇몇 스님이 출가를 하면서 불교도협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19세기 말 아이요티 타스(Iyothee Thass, 1845~1914)를 중심으로 인도 중부 마드야프라데시 지역에서 불가촉천민[Dalit]들이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며 불교를 신앙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급기야 1956년에는 인도의 정치인이자 인권운동가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가 수십만 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한다. 이로 인해 현재 마하라슈트라 주에는 불가촉천민 출신의 불교 신도가 다수 살고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곳

그럼, 이제 다람살라 이야기로 넘어가자. 다람살라는 인도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주 서쪽에 있는 도시다.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여서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곳은 필자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새해를 맞은 다람살라의 풍경.

필자는 1997년 대학 졸업한 후 우연히 기회가 닿아 한 달간 인도로 떠났다. 델리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서 저녁버스를 타고 다람살라로 갔다. 그런데 다람살라 뒷산에 올랐다가 위에서 떨어진 돌을 맞고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필자가 사고 나기 일주일 전쯤 이스라엘 여행객이 실종돼서 현상금이 붙었는데, 그를 찾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의식을 잃은 필자를 발견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주워와 얼기설기 들것을 만들어 필자를 4~5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에 데리고 왔다. 그 병원에서 꼬박 한 달을 보냈다. 큰 사고를 겪고 회복했지만 바로 돌아오지 않고, 인도와 네팔 지역 히말라야를 서너 달 동안 돌아다녔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고 시기였다. 그런 후 바라나시에서 사진을 2년 정도만 해보자고 결심했는데,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2014년 경 다람살라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이다. 다람살라행 버스에는 검은 피부의 인도인 예닐곱과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서양인 넷을 빼면 승객들은 모두 이목구비 뚜렷한 티베트 사람들이었다. 티베트 설날 ‘로사’나 불교의 큰 명절은 아니었지만, 달라이라마의 법문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델리의 티베트인 구역 마주누까 틸라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노란 조끼 위에 폭이 좁고 긴 붉은 가사를 걸친 티베트 스님 곁에 앉았다. “꾸숄라, 따시델렉(스님, 안녕하세요).” 스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염주를 돌리며 만트라를 염송하던 스님도 티베트어 만트라와 함께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기도의 마음이 전해졌다. 달라이라마 존자가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종교는 친절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표정을 나누는 것만큼 큰 공덕은 없으리라. 

우리나라의 윤장대에 해당하는 마니차(기도바퀴)를 도는 티베트 불자들.

버스가 출발하자 사람들의 속삭임 대신 익숙한 관세음보살 진언이 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옴 마니 뻬메 훙(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뻬메 훙, 옴 마니 뻬메 훙.” 낮고 부드러운 진언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혼잡한 델리 생활로 잔뜩 구겨졌던 몸과 마음에 맑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옴 마니 반메 훔’ 진언에서 ‘옴’은 신성하고 원초적인 음, 마니는 보석이나 구슬, 반메는 연꽃, 그리고 훔은 깨달음의 정신을 각각 상징한다. 즉 “온 우주가 깨달아 연꽃의 보석으로 녹아들기를”, 또는 “온 우주에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기를”로 해석할 수 있다. 

언젠가 ‘옴 마니 반메 훔’ 다섯 글자의 뜻을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진언의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덧붙였다. “진언은 염송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 부지런히 염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티베트인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 때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잠들어 있을 때마저도 염송을 멈추지 않으려 노력한다. 

티베트불교와 망명정부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7세기다. 33대 짼뽀(군주) 송첸캄포는 주변 왕국을 정복해 최초의 티베트 왕국을 이룩하고,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인도에 특사를 파견한다. 이때 산스크리트어와 함께 인도에서 유행하던 탄트라불교(Tantric Buddhism)가 티베트로 수입된다. 또 641년 당나라 태종의 조카딸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중국의 선불교가 유입된다. 

남걀사원의 내부.

8세기에 이르러 티베트불교는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38대 짼뽀 트리송 데첸왕은 인도 날란다대학의 승원장 산타락시타와 티베트불교의 구루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를 모셔와 법보를 전하게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와 부탄에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티베트 불교도들에게 ‘구루 린포체’ 또는 ‘로폰 린포체’로 불린다. 트리송 데첸왕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중국 선종과 3,000여 년간 지속 되어온 토속신앙 뵌교 그리고 인도의 탄트라불교는 하나로 합쳐져 티베트 금강승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1,300여 년간 히말라야산맥의 북쪽 고원을 지배하던 티베트불교는 1959년에 이르러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다. 달라이라마 일행의 망명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일행은 설산을 넘어 인도로 내려와 다람살라에 정착하는데, 이곳은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고향으로 자리 잡는다. 다람살라에는 티베트불교의 임시정부, 달라이라마의 사원, 크고 작은 티베트불교사원, 그리고 망명한 티베트 난민들의 허름한 집들이 산기슭을 촘촘히 채우고 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낡은 담벼락들이 만들어낸 골목을 지나다 보면 ‘옴 마니 뻬메 훙’ 진언을 외는 소리와 ‘삐걱삐걱’ 돌아가는 마니차 소리가 이방인의 귀와 마음을 부드럽게 사로잡는다. 지금은 평화로운 여행지로 자리 잡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나라 잃은 망명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4,000년을 이어온 보금자리를 버려야 했던 그들에게 만약 불교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라이라마라는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면 ‘티베트’라는 이름은 어쩌면 연기처럼 조용히 흩어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다람살라의 새벽과 남걀 사원

13시간을 달려 도착한 다람살라 중심 거리의 숙소들은 이미 빈방이 없어 숙소를 찾느라 꽤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북적거림이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건네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큰 법문이 있는 기간에는 잠시 일을 접고, 사원으로 나간다. 종일 법문을 듣고 오후 늦게 법문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거나 가게에서 차를 팔거나 공장에서 카펫을 만들거나 혹은 약국에서 환자를 보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환경에 맞춰 삶과 수행을 병행한다. 

남걀사원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할머니.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예불에 쓰이는 악기소리와 스님들의 깊고 낮은 염불소리가 기분 좋게 뒤섞여 매일 똑같은 시간에 들려온 까닭이다. 여러 사원과 집안 곳곳에서 이뤄지는 새벽예불로 다람살라는 깨어난다. 이곳 티베트 사람들이 일상생활 중에 행하는 새벽의 첫 번째 의식은 주석이나 황동으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 공양을 올리는 일이다. 깨끗하게 닦은 7개의 잔을 가지런히 놓고 보통 한 톨의 보리 높이가 남을 정도로 물을 가득 담는데, 물 공양은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보편적인 공양 방법이다. 사람들은 물을 공양 올리며 ‘옴 아 훔’ 진언이나 짧은 경문을 읊조린다. 

공양을 올린 사람들은 남걀 사원의 ‘코라(Kora)’를 돌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직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새벽임에도 그들의 발걸음은 재빠르다. 티베트의 수미산이나 이곳 달라이라마 사원 등 의미 있는 곳의 주위를 말하는 ‘코라’를 도는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빠르게 내딛는 발소리는 염송하는 만트라 소리에 더해져 자못 엄숙한 새벽풍경을 만든다. ‘코라’를 도는 길에는 경전이 조각된 돌 마니석이 수없이 널려 있고, 경전이 적힌 룽따가 곳곳에서 펄럭이며 바람에 법을 실어 세상으로 보낸다. 

달라이라마 궁 앞에 있는 남걀 사원은 달라이라마의 종파인 겔룩파 사원이다. 사원 지붕 앞쪽에 장식된 황금빛 법륜과 그 양쪽의 사슴 장식은 팔정도를 설하는 부처님을 묘사한다. ‘코라’ 돌기를 마치고 사원으로 들어서면 사원 곳곳에서 오체투지하는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만들어내는 소리가 타악기 연주처럼 들린다. 오체투지를 위해 만들어진 낡은 나무판자가 일 배를 올릴 때마다 삐걱거리며 바닥을 때리는 소리다. 

부처님이 모셔진 2층에 오르면 은은한 버터 램프의 기름향이 진동한다. 온통 노랗게 칠해진 법당의 벽을 따라 사원을 세 바퀴 돌다보니 스쳐가는 사람들이 남기는 작은 기도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동행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더없는 기쁨이다. 졸린 눈을 하고 있던 꼬마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낯선 여행객에게 ‘따시델렉’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사원을 몇 바퀴 돌고, 오체투지로 여념 없는 불자들과 낮고 굵은 목소리로 경전을 읊조리는 스님들 옆에 앉았다. 

5일간의 야단법석

달라이라마의 법문이 시작되는 날이 되자 사람들의 걸음이 분주해졌다. 들어와 앉는 순서대로 자리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법좌 바로 옆은 각 종파 큰스님들의 자리이고, 앞쪽 자리는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들과 법문을 듣기 위해 만리 길을 날아온 한국 스님과 불자들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 법당 주변에 자리를 깔고 앉은 외국인들과 현지 티베트인들은 한국인들이 법문을 청한 덕분에 5일간 귀한 법문을 듣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달라이라마 존자의 법회장에서 기도하는 스님들.

사부대중이 모두 자리하고 법문 시간이 되자 달라이라마 존자가 수행원들과 함께 법당에 들어섰다. 그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이어 부처님께 인사를 올린 후 법좌에도 정성스럽게 삼배를 올렸다. ‘자신이 앉을 법좌에 절을 올리다니?’ 의아한 사람들의 표정을 읽은 듯 그는 법문의 서두에 삼배의 의미를 풀어주었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불법을 전달하는 이 성스러운 법좌에 앉아 한 치의 오차 없이 최선을 다해 법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습니다.” 

필자는 5일간 법당 안에서 300밀리 렌즈를 통해 달라이라마를 자세히 관찰했다. 오전오후로 나뉜 하루 예닐곱 시간의 법문 동안 달라이라마는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단 한 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사람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며 기도를 보냈다. 법문을 듣다가 다리가 아프거나 졸리면 사람들은 코라를 하거나 세면을 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필자는 간간이 법당 주변의 티베트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마치 경쟁을 하는 것처럼 절을 하고 염불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 

법문이 이어지는 동안 법당의 분위기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웠다. 눈을 감고 법문을 경청하거나 노트에 촘촘히 받아 적는 사람들, 스님들이 나눠주는 버터차를 홀짝이며 아침식사 대용으로 가져온 음식꾸러미를 옆사람과 나누는 사람도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사지를 펴는 사람들, 마니차를 돌리며 만트라를 외는 사람들, 간간이 주의를 듣기도 하지만 이내 친구들과 장난 삼매경에 빠지는 어린아이들까지. 그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법문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야단법석이다. 

세상 모든 존재의 행복을 빌며

20여 년 전 이곳에서 처음 법문을 들었을 때, 필자는 옳고 그름에 무던히도 집착하면서 세상의 불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당시 법문을 듣는 5일 내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져 실실 웃고 다녔다. 불의의 사고를 겪은 직후여서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법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혹은 달라이라마와 여러 스님의 법력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가벼웠던 것만은 확실했다. 누군가의 보시로 이루어졌을 텁텁하지만 담백한 맛이 일품인 티베트 빵과 진득한 버터차 한 잔이면 배가 고프지 않았고, 다리의 통증으로 종종 자세를 바꿔 앉아야 했지만 안온한 법당의 기운은 필자의 날이 가득 선 마음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었다. 

법회장에서 티베트 할머니가 마니차를 들고 기도하고 있다. 마니차 안에는 경전이 들어있는데,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그때의 법문 시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5일간 법문 서두에 일정하게 했던 달라이라마의 기도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행복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들의 행복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 나는 나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원대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그 문장을 따라 읽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사원 안에 빼곡하게 자리한 깊고 맑은 눈들을 마주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필자는 그들이 내게 전하는 혹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전했을 사랑을 조금씩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들이 세상에 보내는 기도에 작은 기도를 보태고 있었다. 

다람살라행 버스에 처음 올랐을 땐 요즘처럼 외국인이 많지 않아 현지인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관심 밖에 머문다. 한 해 대여섯 차례씩 열리는 달라이라마의 특별법문을 듣기 위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람살라를 찾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과 국적 심지어 종교마저 제각각이어서 다람살라는 말 그대로 인종 시장 같다. 하지만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85세, 몇 년 안에 지금처럼 며칠씩 진행되는 법문은 끝나게 될 것이다. 

최근 5일씩 진행되던 법문은 나흘이 되더니 사흘로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더 많은 이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이곳을 찾는다. 필자 역시 주변인들에게 인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북부 산촌 다람살라를 꼭 한 번 들러보라고, 기왕이면 법문 기간에 맞추어 가라고 권한다. 남걀사원에서 환희심 가득한 티베트인들과 나란히 앉아 합장하면, 어쩌면 당신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될지 모른다고 말이다. 

다람살라 전체를 도는 링꼬라를 하다보면 오색깃발 룽따를 쉽게 볼 수 있다.
기도문이 적힌 마니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걀사원을 밝히고 있는 버터램프.
틱세(Tikse) 사원의 미륵불. 물을 공양한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철만

사진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1997년 떠난 인도 여행 중에 큰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적 성공의 길에서 방향을 틀어 사진과 함께 내면으로 향하는 시간을 살게 됐다. EBS 세계테마기행 스리랑카(2015)편과 인도(2018)편에 출연했다. 2009년 이후 아홉 차례 개인전과 초대전을 열었고, 저서로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만난다면〉·〈길은 다시, 당신에게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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