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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일의 멈춤, 내 인생의 변화[특집] 마음 멈춤! 인생 멈춤!
가진 걸 내려놓는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그 결정은 부부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바뀌게 해주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에서.

“멈춤을 통해 얻은 것은
새로운 일상과 꿈·희망이었다.”

남 부러워할 대기업을 다니던 직장인 두 남녀가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한 지 9개월이 되던 어느 날, 부부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양가 부모님 몰래 전셋집을 뺏고, 일상의 탈출을 준비해나갔다. 그렇게 떠난 그들은 아시아에서 남미까지 636일 간 세계 52개국을 여행했다. <잠시멈춤, 세계여행>의 저자 오빛나·배용연 씨 얘기다. 이들이 여행을 다녀온 지도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2년의 멈춤. 이 도발적 여행은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부탄 탁상사원. 고승 파드마삼바바가 암호랑이를 타고 절벽 위에 올라가 동굴에서 수행을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탁상은 ‘호랑이 보금자리’를 의미한다.

오늘도 여지없이 비가 내린다. 예년 대비 부쩍 빨리 찾아온 얄궂은 날씨 덕에 몇 주째 ‘집콕’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부부에게 10월은 언제나 특별하다. 2년간의 잠시 멈춤, 세계여행을 마치고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우리만의 기념일이 10월에 있기 때문이다. 

|   멈춤, 그 불안과 두려움을 딛고

7년 전, 우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신혼생활도 여느 신혼부부와 다르지 않았다. 회사생활로 바쁜 평일에는 출·퇴근을 전후해 서로의 생존여부(?)만 겨우 확인 해야 했고, 주말은 밀린 집안일과 각종 행사를 쫓아다니다 보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이제 막 독립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서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아프리카 동남쪽 마다가스카르의 서해안에 위치한 해변도시 모론다바의 바오밥나무 아래에서.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멈춤을 실행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아니 내려놓은 것들을 앞으로는 다시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부연하면 꼬깃꼬깃 모아놓은 전셋집 하나와 직장이 전부이긴 하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하디 평범한 우리 부부에게 이것들은 충분히 큰 가치를 지녔다.) 불안함을 잠재운 것은 우리가 ‘함께’한다는 사실이었다. 주례사에 흔히 등장하는 그 말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어려울 때 우리가 함께 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돈은 다시 모으면 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먼 훗날 지금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   자유롭고, 너무도 짜릿한

2012년 9월 3일은 우리 부부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그날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1년 9개월(636일) 간 세계 52개국을 다니는 여행의 첫 발을 뗐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여행은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 낯선 곳을 헤매는 일, 합리적인 가격을 찾아 발품을 파는 일, 어디서든 안전을 위해 경계를 바짝 세우는 일까지 그 모든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춤, 즉 세계여행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비교적 친숙한 아시아에서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유럽을 지나 중동,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여행길은 매일 매일이 새롭고 특별한 나날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학교나 회사에서는 접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이집트 시나이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다합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부부.

여행 중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보낸 두 달 남짓한 시간이었다. 우연찮게 승합차를 개조한 캠핑카를 빌리게 되면서 우리의 남아프리카 여행은 더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즐거워졌다. 우측에 있는 핸들로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것부터 한정된 도구로 직접 요리를 하며 자동차에서 생활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식단은 풍요로워졌고, 캠핑의 묘미와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에 빠져들게 되었다. 캠핑카로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하루 일과를 마친 우리는 찌그러진 머그컵에 와인을 홀짝이곤 했다. 활짝 열어둔 트렁크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 삼아서. 도시 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 아프리카의 살아 숨 쉬는 자연은 아름다움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여기가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이구나!’ 감탄하던 우리 대화의 끝은 늘 ‘떠나오길 잘했어.’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TV속에서나 보았던 경이로운 자연과 인류의 흔적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고, 오랫동안 품어온 크고 작은 꿈들을 하나하나 이뤄가며 얻는 성취감은 학교나 직장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   삶의 태도와 방식의 변화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1년이 넘는 장기 여행, 일상을 벗어난 잠깐(?)의 멈춤은 휴가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며칠에 불과한 일정이 아니라 길 위에서의 생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장기여행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이었다. 온전히 우리의 의지로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여행자처럼 앞으로의 삶을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과 용기를 얻게 됐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덕분에 여행을 마친 우리는 용감해져 있었다. 간당간당한 통장잔고에 직업도 집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지만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신만큼은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또렷해져 있었다. 덕분에 어쩌면 세계여행보다 더 과감한 ‘유럽살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귀국 3개월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멈춤’을 선택한 그때보다 훨씬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월수입·생활물가·언어·문화·날씨 등 새롭게 배우고 적응해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어디서든 배낭 하나 짊어지고 세계 곳곳을 여행했던 그때처럼 살아간다면 어려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을 것이란 자신감과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난생처음 경험하는 외국생활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집을 구하는 일부터 은행 방문, 인터넷 설치, 슈퍼에서 장보는 일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게 없었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누구도 챙겨주지 않으니 우리에겐 매일 매일이 크고 작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낯선 땅에서 불어오는 낯선 공기가 한없이 설레다가도 어떤 날이면 잔뜩 움츠린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내 나라와 나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의 보금자리가 조금씩 구색을 갖추고 새로 사귄 이웃과 친구들이 생겨나면서 낯선 땅에서 새롭게 시작한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뿌리를 내려갔다. 멈춤의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생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긴 했을까?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고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일상으로 돌아온 뒤, 멈춤을 결심하면서 우리가 내려놓았던 것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을 우리는 다시 가져올 수 없었지만 그 빈자리는 새로운 일상과 꿈, 희망으로 다시 차곡차곡 채워졌다. 

|   여행에서 배운 세 가지

시간은 흘러 긴 여행의 끝, 다시 시작된 일상, 그리고 남편의 취업으로 시작된 네덜란드 생활도 5년차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이제 세 식구가 되었고(이제 곧 넷이 된다),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며, 서툰 언어로 이웃과 인사를 나눌 정도로 이 나라 생활에 익숙해졌다. 일과 육아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면서 마추픽추 정상에 올랐던 그 때가 까마득한 옛날 같고 예전처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요즘이지만, 여행길에서 배운 세 가지는 우리 부부의 삶에 단단하게 뿌리내려 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스위스 쿠어는 가장 낮은 곳이 해발 585미테斗. 멀리 알프스 만년설이 보인다.

첫 번째는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가볍게 사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면서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짊어진 채 살아왔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찾을 때처럼 우리의 의지로 나아갈 길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 당장은 남들처럼 더 비싼 차, 더 넓은 집, 더 화려한 명함을 갖지는 못했지만 괜찮다. 내 사람들에게 밥 한 끼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그리고 나의 이름 석 자가 박힌 책들과 함께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두 번째는 매일저녁 부부만의 대화시간을 갖는 것이다. 4년의 연애 후 결혼에 골인했지만 사실 내가 남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이해하게 된 것은 함께 여행한 길 위에서였다. 1년 9개월이란 시간을 24시간 내내 붙어서 지내야 했던 우리가 나눈 수많은 주제와 엄청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부부만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매일매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우리집 거실에는 TV가 없다.) 저녁 메뉴에 대한 토론부터 회사 이야기, 새로 문을 연 동네 카페이야기 등 별거 아닌 소소한 대화지만 이 시간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어가는 중요한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3년 전 태어난 첫 아이는 우리의 대화시간을 더욱 길어지게 했다. 난생 처음 경험한 육아는 주변에서 수 없이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고, 새롭게 얻게 된 ‘부모’라는 타이틀의 책임감은 해를 거듭할수록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함께 걸어갈 미래, 언젠가는 홀로 세상에 나아갈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 부부의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긴 여행을 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 외국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행복이라는게 뭔가 거창한 목표를 이루어야 얻어지는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고, 오늘의 행복을 희생해 얻게 된 미래는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명소에서 남긴 인생 샷 한 장 보다는 그 사진을 찍기까지의 여정이 우리의 여행을 특별하게 했던 것처럼, 행복은 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위로 오르는 길 자체라고 생각한다. 결혼과 세계여행, 외국살이, 소박한 우리의 보금자리와 보물 같은 아이, 세 권의 책과 앞으로 시작될 또 다른 도전까지, 우리 부부가 함께 걸어온 소소한 일상과 하루하루의 행복이 쌓여 이뤄온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나는 오늘도 깨닫는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잉카제국 절정기에 건설된 신비의 도시,페루의 마추픽추 유적지에서.
인도 남부 해안도시 콜람에서.
아프리카 나미비아(Nam加a)의 둔(모래언덕) 앞에서.
현재 살고있는 네덜란드 집 앞에서.
긴 여행과 낯선 외국생활을 하며 행복의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는 필자 가족. 현재 세 식구인데,조만간 네 식구가 된다.
636일간의 세계일주 후 부부는 네덜란드에 정착해 새로운 일상 속에서 꿈과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오빛나

여행작가. 공대를 다니다가 대학졸업반 때 배낭여행에 빠졌다. 졸업 후 야후코리아,LG전자 등 대기업에 다니며 쉴 틈 없이 일했다. 결혼 9개월 만에 사표를 던지고,남편과 세계일주를 떠났다. 2005년부터 여행 블로그(WWW.BITNA.NET)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트립풀 암스테르담〉•〈인조이 인도〉•〈잠시멈춤,세계여행〉등을 펴냈다.

 

글·사진 오빛나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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