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정안 밝히는 데 근간 두고 철저히 수행해야”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11월 7일 불기2563년 기해년 동안거 결제(11월 11일)를 맞아 법어를 내렸다.

진제 스님은 결제법어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결제와 해제에 빠지지 않는 사부대중이 가상하기는 하지만 부처님 법을 배우는 목적은 자기사를 밝히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진제 스님은 우두 선사의 법문을 들어 “여러 대중은 이러한 법문을 잘 새겨듣고서, 공부를 지어가다가 반짝 나타나는 하찮은 경계들을 가지고 살림으로 삼아 자칫 중도에 머무르게 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부처님의 정안을 밝히는 데 근간을 두고서 철저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고 당부했다.

동안거는 결제 하루 전날인 11월 10일 저녁 결제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각자의 소임을 정하는 용상방(龍象榜)을 작성하고, 결제 당일인 11일 오전 10시경에는 사찰별로 방장스님 등 큰스님을 모시고 결제법어를 청한 후 3개월간의 참선정진에 들어간다.

<이하 결제법어 전문>
대한불교조계종 기해년 동안거 종정예하 결제법어

眼中無瞖休挑括<안중무예휴조괄>하고
鏡中無塵不用磨<경중무진불용마>어다.
信足出門行大路<신족출문행대로>에
橫按拄杖唱山歌<횡안주장창산가>로다.
唱山歌兮 <창산가혜>여!
山是山 <산시산> 水是水 <수시수>로다

눈 가운데 티끌 없으니 긁으려 하지 말고
거울 가운데 먼지 없으니 닦으려 하지 말라.
발을 디뎌 문을 나가 큰 길을 행함에
주장자를 횡으로 메고 산 노래를 부름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금일(今日)은 기해년 동안거 결제일이라.

산문(山門)을 잠그고 삼동결제(三冬結制)에 임하는 대중(大衆)들의 마음자세는 모든 반연(攀緣)과 갈등(葛藤)과 시비장단(是非長短)을 내려놓고 이번 결제기간 동안 반드시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대오견성 하겠다는 각오가 확고해야 함이라.

흉내만 내고 앉아 있는 반딧불 같은 신심(信心)으로는 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부처님 진리의 세계에 도저히 갈 수가 없음이라.

해마다 반복되는 결제와 해제에 빠지지 않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가상(嘉尙)하기는 하지만 부처님 법을 배우는 목적은 자기사(自己事)를 밝히는 데 있다.

이번 결제동안 부지런히 정진해서 각자의 화두를 타파하여 확철대오(廓撤大悟)하게 되면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그때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그대로 불국토(佛國土)가 되고, 팔만사천 번뇌가 그대로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되는 것이다.

화두(話頭)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고 이 화두를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산책을 하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 一切時)에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여야 할 것이라.

중국 선종의 4대 조사(四代 祖師)이신 도신(道信) 선사 당시에 우두 법융(牛頭法融) 스님이 있었다.

우두 스님이 젊은 시절에 혼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노라면,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 와서 공부하는 자리에는 항상 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공양(供養) 때에는 천녀(天女)들이 공양을 지어 올렸다.

하루는 우두 스님이 도신 선사를 찾아뵙고 그간에 공부했던 것을 말씀드렸다. 도신 선사께서 그것을 들으시고는,

“네가 그러한 삿된 소견(所見)을 가지고 어찌 불법(佛法)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시며 직하(直下)에 방망이를 내리셨다.

무릇,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온갖 새가 꽃을 물어 나르고 천녀가 공양을 올렸으니 큰스님 중의 큰스님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불법의 근본진리를 아는 사람이 보건대는, 그것은 몇 푼어치 안 되는 살림살이이다.

우두 스님이 도신선사께 법 방망이를 맞고 분발(奮發)하여 다시 정진(精進)을 하니 새들이 꽃을 물어오지 않았고, 천녀들도 공양을 지어 올리지 않았다.

이렇듯 대적삼매(大寂三昧)를 수용하면 모든 성인(聖人)들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고, 천룡팔부(千龍八部)며 귀신·선신(善神)들은 더더욱 볼 수 없으며, 온갖 새와 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다.

광대무변한 진리의 심오한 세계는 스승 없이 혼자서는 다 알았다 할 수 없기에 반드시 먼저 깨달은 눈 밝은 선지식을 의지해서 점검받고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로다. 스승 없이, 점검을 받지 아니하고 알았다고 하는 사람이 요즈음도 부지기수(不知其數)인데, 그것은 다 외도(外道)의 소견(所見)에 집을 지어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외도(天魔外道)다” 즉, 정법을 이은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점검받은 바 없이 깨달았다 하는 자는 천마이고 외도일 뿐이라고 못을 박아놓으신 것이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어느 스님이 남전(南泉) 선사께서 여쭙기를,

“우두 스님에게 새들이 꽃을 물어다 바치고 천녀가 공양을 지어 올리는 것은 어떻습니까?”하니, 남전 선사께서는

“걸음걸음이 부처님의 계단을 올라간다.” 라고 답하셨다.

“도신 선사로부터 방망이를 맞은 후, 새들이 꽃을 물어오지 않고 천녀들도 공양을 올리지 아니한 때는 어떻습니까?”

“설령 온갖 새들과 천녀가 오지 않는 다해도 나의 도(道)에 비하면 실 한 오라기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이 부처님 진리에도 깊고 얕은 세계가 있다.

그러니 여러 대중은 이러한 법문을 잘 새겨듣고서, 공부를 지어가다가 반짝 나타나는 하찮은 경계들을 가지고 살림으로 삼아 자칫 중도(中途)에 머무르게 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부처님의 정안(正眼)을 밝히는 데 근간(根幹)을 두고서 철저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산승(山僧)의 스승이신 향곡(香谷) 선사께서 우두 선사의 법문을 들어 산승에게 물으신 적이 있음이라.

“우두 스님이 사조 선사를 친견하기 전에는 천동 천녀가 공양을 지어 올리고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어다 바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이에 산승이 “삼삼(三三)은 구(九)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우두 스님이 사조 선사를 친견한 후로는 천동 천녀들이 공양을 지어오지 않고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어오지도 아니한 때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이에 산승이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입니다.”라고 답하였다.

필경(畢竟)에 일구(一句) 어떠한 것인고!
橫按拄杖不顧人<횡안주장불고인>하고
卽入千峰萬峰去<즉입천봉만봉거>로다.

주장자를 횡으로 메고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천 봉과 만 봉 속으로 들어감이라.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고 하좌(下座)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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